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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 새끼꼬는 모양. 제가 직접 꼬아봤는데 요새는 콤바인으로 벼를 베므로 지푸라기가 짧아서 매우 더딥니다.
ⓒ 김규환
겨울철엔 나무하는 것 빼곤 주로 집에서 활동을 한다. 간혹 복령을 캐러갈 때도 집을 나가지만 며칠 동안 밖으로 나가지 않고도 해야 할 일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으니 아버지라고 마냥 주막거리만 들락거리지 않았다.

환한 낮엔 져다놓은 통나무를 톱으로 잘라 장작을 패고 보름이나 스무날에 한번씩 외양짚(외양간에 짚과 소똥 따위가 섞인 두엄의 원재료)을 낸다. 눈 오는 날을 잡아 외양간과 돼지우리를 치우고 나면 하루가 꼬박 걸렸다.

그러고도 쇠죽 쑤는 일상사와 자잘한 일을 하노라면 시간가는 줄 모른다. 밤엔 멍석을 짜고 짚새기를 삼았다. 조리를 절어 가욋돈 마련하는 일도 아버지 주도하에 이뤄지지만 아버지 몫으로 툭 떼어진 일이 있다.

바로 사내키(새끼줄) 꼬기다. 새끼줄은 나무를 묶거나 봄철 보리를 묶을 용도로 제일 많이 쓰였지만 실제 농사가 사람 손에 의해 행해지던 70년대 말까지는 새끼줄 없인 어떤 일도 못하니 부지런히 한 사래씩 꼬아 사려놓아 걸어놓아야 한다.

산판을 벌이듯 한 골짜기에서 놉을 얻어 이레 남짓 나무를 베어오면 새끼줄은 자그마치 열 사래로도 부족하니 손바닥이 부르터라 비벼대야 한다.

▲ 금줄에도 새끼줄이 필요한데 왼 새끼줄입니다.
ⓒ 김규환
아이를 낳으면 그냥 오른쪽 방향으로 돌린 새끼줄에 아들이었을 경우 빨간 고추를 꽂고 딸을 낳으면 솔가지를 꺾어 끼웠다. 하지만 당산제와 초상이 났을 때 등 제사 지내려면 외(左)로 꼰 금줄이 필수품이다.

이승과 저승을 넘나드는 의례에서는 왼손 새끼줄을 꼬아야 하므로 그 때 그 때 상황이 벌어질 때마다 꼬는 게 원칙이었다. 상갓집에 가보면 어르신을 떠나보낸 죄인이 머리에 둘러메고 있는 수질(首絰)과 허리춤에 돌린 요질(腰紩) 또한 왼 새끼였다.

▲ 여성들은 어른들이 돌아가시면 머리에 수질을 씁니다. 역시 왼 새끼줄입니다.
ⓒ 김규환
새끼줄 꼬기는 농경이 시작된 이래 수천 년 동안 손으로 꼬다가 1970년대에 무동력 발판 형 기계가 등장했다. 이후 80년대 초, 발로 밟을 필요 없이 전기에 꽂아놓고 지푸라기만 쑤셔 넣으면 제 스스로 돌아가 새끼줄을 만들어주는 동력식으로 바뀌어 한결 수월해졌고 이젠 공장에서 생산한 줄을 쓰고 있다.

뒤늦게 우리 마을에도 전기가 들어왔으나 기계를 살 형편이 되지 않기도 했지만 굳이 살 필요도 없었다. 아버지 손이 부지런하여 하룻밤이면 두세 사래는 쉽게 꼬았고 어린 우리들도 아버지를 도와 거들었다.

밖으로 도저히 나갈 수 없거나 마땅한 일감을 미리 준비하지 못한 날에 새끼줄을 꼰다. 탐진 짚 다발을 물에 담가서 약간 불렸다가 밑동 겉잎을 뽑아버리고 가지런히 다시 묶는다. 밑을 끌박아(낫으로 벤 부분을 가지런히 하기 위해 밑동을 반반한 바닥에 떨어뜨렸다 올렸다를 반복하는 행위의 사투리) 놓는다.

▲ 새끼줄 한 사래는 2~300미터 쯤 됩니다.
ⓒ 김규환
진지를 드신 아버지는 쇠죽 몇 바가지를 퍼주고 방으로 들어오셨다. 외풍에도 살랑살랑 흔들리던 호롱불이 문을 세게 젖히고 안으로 닫자 꺼질 듯 말 듯 누웠다가 다시 일어서서 그을음을 마구 쏟아낸다.

“쥐새끼들이 외양간 위에 많탕께. 낼은 당감자(고구마)나 몇 개 삶아놓더라고.”
“짚다발을 다 쪼사(쪼아) 놨소?”
“숫제 사내키를 꼴 수도 없어. 저러다간 쇠죽 쑬 짚도 온전한 것이 없을 거구만….”
“직아부지 알았어라우.”

윗목에 퍽쩍은이(행감을 치고 편히 앉은 모양의 사투리) 앉아 사내키를 꼬기 시작한다. 양쪽에 각각 대여섯 개씩 나눠 가로질러 놓고 열십자 모양을 만든다. 한쪽 엉덩이로 누르고 첫물에는 방향을 거꾸로 하여 이삭이 붙었던 꽁지가 뒤쪽으로 향하게 한다.

누구에게 빌기라도 하듯 왼손에 겨우 매달려 걸쳐있는 두 가닥 짚을 오른손 바닥으로 싹싹 밀어 마찰을 하여 오른쪽으로 넘긴다. 두 가닥이 거의 붙어 다니듯 왼쪽에 있는 가닥을 잽싸게 가져와 다시 오른쪽으로 돌려 넘긴다. 넘기고 비비기를 반복하자 밑동 끝에서는 “사사삭 싹!” 마무리를 하고 양쪽에서 한 개씩 짚을 꺼내 홀쳐 묶어둔다.

▲ 망태를 만들 때는 더 가늘게 꼬아야 합니다. 짚신이나 둥우리 골망태를 만들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 김규환
이제부터는 정식으로 새끼줄을 꼴 차례다. 방향을 바로잡아 놓고 줄 굵기가 일정할 때까지 꼬인 지푸라기를 약간 풀어주고 묶인 다발에서 세 개를 꺼내 겹쳐 넣고 다시 “싹싹” “쓱쓱” 비벼 나간다.

새끼줄은 굵기가 일정하고 조임 상태도 한결같다. 누런 줄이 방 안을 감싸기 시작했다. 처음엔 윗목만 차지하고 있다가 한 시간여 지나자 큰방을 몇 바퀴 돌아도 될 정도로 자꾸만 길어져 간다.

나는 장난 겸 아버지 근처에 줄이 꼬이지 않도록 이리저리 앞문에서 뒷문 쪽으로 끌고 가며 돌아다녔다. 어머니는 침침한 호롱불 반대편에서 자식들 헤진 양말과 내복, 빤스(팬티의 일본말)를 꿰매고 있다.

“어이 출출헌디.”
“뭣 좀 드리끄라우?”
“션한(시원한) 찬물 째까 갖과봐.”
“엄마, 지가 댕겨오께라우.”

“덜커덩”

부엌으로 난 쪽문을 열고 신을 가까스로 찾아 설강에 올려진 바가치(박 껍질로 만든 바가지의 사투리)를 더듬었다. 그 사이 부엌엔 주르르 달려가는 자그마한 형체의 동물이 있었다. 계념치 않고 물동이에서 한 바가지 퍼서 방으로 들어왔다.

“정제(정지)에도 쥐새끼가 있당께라우.”
“안 되겠구만 낼 당장 쥐약을 놓자고.”
“여깄어라우.”
“아따 시원 허다. 정신이 빠짝 들고 이까지 시리네.”

아궁이 불이 사라지자 부엌은 한데나 마찬가지다. 어떨 땐 물동이까지 얼어 녹이느라 한동안 고생하던 어머니를 자주 보곤 했다. 살얼음이 낀 물을 벌컥벌컥 마시자 잠마저 싹 달아났다.

▲ 새끼줄이 없으면 나무 할 때는 칡넝쿨로 대신할 때도 있지만 대체로 예전엔 새끼줄 없으면 농사짓기 힘이 들었으니 얼마나 꼬아야했는지는 상상해보면 알 겁니다.
ⓒ 김규환
얼마 지나지 않아 “퉤퉤” “퉤-” 손바닥에 침을 뱉는 횟수가 잦아졌다. 수도 없이 비벼대기도 했지만 짚이 바삭거릴 정도로 말라가자 아버지 손바닥은 불이 난 듯 뜨거워져 열이 심해졌을 게다.

“아부지 글지 말고라우 물 한바가지 더 떠오끄라우?”
“그려, 글고 당신은 싱건지국이나 끓여오더라고.”

‘햐~ 싱건지국? 시큼한 싱건지국에 밥을 말아 먹는다고?’ 일찍 자지 않고 기다린 보람이 있었다. 아버지께 물바가지를 갖다드리자 한 모금 양껏 머금어서 “푸우우 푸” “푸 푸 풋” 입으로 짚 다발에 부어 축여놓으신다.

“아야, 말래 것도 들다(들여다) 놔라.”
“예, 아부지.”

▲ 허리에 복대를 차듯 어른들이 돌아가셨을 때 두르던 것이 요질입니다.
ⓒ 김규환
고요한 마루에서 그날 잠깐 본 풍경을 잊지 못한다. 하얀 달빛이 우리 집 마당에 머물고 있었고 아래채 헛간 그늘엔 돼지 두 마리가 코를 골고 외양간 황소는 숨을 멈췄다가 속에 있는 뭔가를 게워내려는 듯 거칠게 한꺼번에 쏟아낸다.

장독대엔 눈이 녹지 않아 더 환하다. 담벼락에 나란히 서있는 감나무와 배나무 잎사귀가 배시시 떨며 웃고 있다. 세월이 눕혀놓았는지 사립문은 한쪽으로 꽤나 기울어 있어 고샅 밖에 있던 날바람(몹시 센 바람의 북한 사투리)도 기어들어올 태세다.

누가 간질이지도 않았는데 간지럼 타듯 추위를 몰아내고 꽁꽁 언 짚 다발을 들고 방으로 들어갔다. 아버지는 쉬지 않고 새끼줄을 꼬고 계신다. 어머니는 싱건지(동치미)만 숭숭 썰어 넣고 멸치 빻아서 국물과 뜨물만 붓고 김 날 때까지만 끓여 얼른 방안으로 들어오셨다.

‘나간 사람 몫은 있어도 자는 사람 몫은 없다’는 속담에 걸맞듯 다른 방에서 잠에 떨어진 형제들은 부르지 않았다. 식은 밥 두 숟가락씩 말아 먹으니 시큼한 국물에 속이다 풀렸다.

▲ 당산에 쳐진 금줄에도 새끼줄이 있군요.
ⓒ 김규환
두 사래를 사리고 세 번째를 시작하자 나는 식곤증인지 때가 늦어선지 잠에 곯아 떨어졌다. 검불을 치우고 두 분도 깊은 잠에 빠졌다. 다음 날에도 눈이 계속오자 아버지는 이틀 밤낮을 새끼줄 꼬는 걸로 그치지 않고 망태기를 삼느라 어깨가 달아날 지경이었다.

몇 년이 지나 이장 댁이었던 병갑이 형네는 전기코드에 꼽아 발도 하나 까딱거리지 않고 새끼를 쉽게 꼬았지만 예전 그 멋진 아버지의 솜씨에는 비교되지 않게 엉성하고 볼품이 없었다.

▲ 70년대 후반에서 80년대 주로 썼던 새끼 꼬는 기계인데 짚 다발을 옆에 두고 서서 양손에 쥐고 밀어 넣으면 자동으로 돌아가 새끼를 꼬아주고 둥그렇게 사래주었습니다. 이젠 이런 풍경도 거의 보기 힘들어졌습니다. [인제산촌문화박물관에서 촬영]
ⓒ 김규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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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규환은 서울생활을 접고 빨치산의 고장-화순에서 '백아산의 메아리'를 들으며 살고 있습니다. 6, 70년대 고향 이야기와 삶의 뿌리를 캐는 글을 쓰다가 2006년 귀향하고 말았지요. 200가지 산나물을 깊은 산속에 자연 그대로 심어 산나물 천지 <산채원>을 만들고 있답니다.도시 이웃과 나누려 합니다. cafe.daum.net/sanchaewon 클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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