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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춘기가 한창이던 중학교 2학년 때 나에겐 아주 끔직한 일이 벌어졌다. 20년이 넘은 까마득한 일이지만 아직도 내 머리에 생생히 남아 있는 사건이 일어났다. 슬픔의 연속, 생활고의 연속이었다. 한곳에서 구멍이 나더니 동시다발로 나를 죄어오기 시작했다.

추석날 문중 선산 때문에 싸움이 벌어졌는데 할아버지 뻘 되는 분이 몰래 땅을 팔아 해치운 일로 추석 연휴 3일간을 꼬박 몸 싸움을 치열하게 했다. 급기야 아버님이 허리를 다쳐 두어 달 누워 계시고 어머니 혼자서 가을걷이를 하는 통에 과로로 쓰러져 결국 그 해 음력 11월 보름날 내 곁을 떠난 충격이다.

미신을 믿던 분이라 굿을 하고 단골래를 불러 푸닥거리하고 신단수 떠놓고 자식들의 건승을 빌었던 어머니! 돌아가시기 2년 전부터는 이제 '미신도 싫고 귀신도 싫다'며 스스로 교회에 나가신 당신이시다. 고통스럽게 세상을 뜨시기 며칠 전에는 동네 사람들이 '덕석'(멍석)에 둘둘 말아 절구통을 들고 징을 울리는 '주장맥이'를 하여도 별 소용이 없었다.

동냥치가 옆집에서는 으레 쫒겨나기 일쑤였지만 언제나 반가이 맞아 같은 밥상에 고봉으로 차려주신 어머니다. 학교 다닐 때 "고구마 캐먹지 말라, 무 뿌리 하나라도 캐 먹으면 안된다. 오이도 절대 따 먹으면 안된다"라고 하지 말아야 될 것을 가르쳐주신 자상한 어머니셨다.

어린 나에게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울 엄마가 세상을 뜬다는 것은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었고 얼마 안가 금방 훌훌 털고 건강해지리라 여겼다. 내가 죽음의 의미를 제대로 알아차리기엔 어머니는 49살 밖에 안된 젊은 나이였기 때문이고 나도 마음의 준비도 전혀 안된 철부지였다.

어머니는 새벽에 돌아가셨는데 보통 때와 마찬가지로 나는 김치에 도시락을 싸서 학교에 갔다. 큰 집 누나가 학교로 전화를 해 어머니가 계신 광주 기독병원에 한 번 가보자고 거짓말을 시켰을 정도로 믿기지 않는 일이었다. 집에 도착하고서야 어머니가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되었다.

이후 내 생활은 뒤죽박죽이었다. 집안 살림에 일대 전환이 일어났다. 가마솥에 밥을 해먹던 우리는 그 날로 전기밥통에 밥을 해 먹었다. 가득 해 놓고는 밥풀이 누렇게 다닥다닥 말라붙을 때까지 김치 하나에 얹어 먹기 일쑤였다.

김치 하나도 이웃 사람들의 일정에 맡겨야 했다. 다들 김장을 하고 난 다음에 우리 집에 도와주러 오신 동네 아주머니들이 야속한 시절이었다. 한 겨울 빨래도 초등학교 4학년인 동생과 맨 손으로 냇가에 가서 빨다가 "어메, 저 불쌍한 것들!"하며 동네 아주머니 할머니들이 강제로 빼앗아 해주시면 "아, 내가 정말 불쌍한 처지가 되었구나"하며 어머니의 그 큰 빈자리를 실감하게 되었다.

매일 술로 살아오신 아버지와 함께 살림을 한다는 것이 수월치도 간단하지도 않았다. 어머니 계실 때라면 아무리 고주망태가 되어 돌아오셔도 밤이든 아침이든 술국을 대령하셨기 때문에 별 탈이 없었지만 동생과 나만 남았던 시골집에서 따스한 기운이 돌기는 이미 틀려버린 거다.

한 여름 대낮에도 절대 찬밥을 드시지 않던 아버지 덕에 나는 따뜻한 밥을 먹었다. 하지만 어머니가 안 계신 이후 아버지는 이젠 어쩔 수 없다는 듯 체념하고 전기 밥통에서 퍼낸 누렇게 뜬 밥, 누린내에 절어버린 밥을 드시지 않을 수 없었다. 눈물에 밥을 말아먹은 적도 있었다.

이 집 저 집에서 갖다준 김치에 하얀 쌀밥만 먹어대니 내 키가 클 리도 없었고 뱃 속은 허해져만 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고등학교에 다녔던 형이 복귀하여 살림을 거들고 아버지의 탈선을 막아 보려고 했지만 오히려 화만 불러오는 결과를 가져왔다.

1월 어느날 백아산(810m) 바로 앞마을에 눈이 소복이 쌓였다. 발이 푹푹 빠지도록 내렸다. 그날도 아버지는 소주 대(大)병을 갖다가 김치 쪼가리에 한 병을 거의 소비하고 계셨다. 형은 몇 번에 걸쳐 말려 보다가 결국엔 아버지와 다투었다.

저녁 해가 질 무렵부터 시작된 아버지의 신세 한탄은 밤 10시가 되자 폭발하였다. 어머니 영정 사진을 마당으로 던져버렸다. 유리는 산산조각 났고 아버지는 비틀거리는 몸으로 마당에 나가 하나 남은 어머니 사진도 갈갈이 찢고 마신다.

형과 다툰 뒤 이내 아버지는 자꾸 서울로 가신다 했다. "야 이놈들아! 나 서울로 가버릴란다." "니 큰 형한테 갈 거야!"하시고는 마른 눈이 차곡차곡 쌓이던 날 카키색 방한복을 입으시고 밤 11시가 다 되어 집을 나섰다. 몇 번이고 말려봐야 이미 소용이 없는 일이었다.

눈 오는 날은 밤에도 하얗다. 세상 천지에 굵은 소금만 뿌려둔 듯 길이고 나무가지고 산이고 온통 형광등 불 빛 마냥 하얗다. 아버지가 길을 나서자 나도 얼른 채비를 하였다. 뽀드득 소리가 나면서 무릎 언저리까지 눈이 차 올라왔다. 맨 정신에 한걸음 디디기조차 힘들다.

헛기침 한 번 할 수 없었다. 공동묘지를 지나 도둑거리에 도착하자 제법 바람이 거세게 불어왔다. 비틀거리며 걷는 아버지 모습이 안됐지만 아는 체를 할 수 없었다. 주위는 쥐죽은 듯이 고요하다. 사람이라곤 아버지와 100m 뒤에 내가 있을 뿐이었다. 동물들도 다들 눈 속에 자신의 몸을 숨겨 잠자고 있는 중이었다.

10리를 걸어 원리 삼거리에 이르러 '선세재'를 넘는데는 여간 고역이 아닐 수 없다. 비나 눈이 많이 오면 차도 올라오기 힘들어 다시 광주로 돌아가야 하는 구불구불하고 험한 비포장 도로다. 고개 정상을 넘어 곡성군에 접어들자 작은 소리도 울림이 있어 아버지 기침 소리가 더 크게 들렸다. 해소를 앓으셨기에 기침 하는 횟수가 자꾸만 늘어갔다. 몇 번이고 고꾸라지신다.

가파른 길에서 넘어지면 큰 사고 날 게 뻔하다. "어쩐다지?" "이때 내가 기침을 먼저 해야 되는 것 아닌가?" 용기를 내기로 했다. 내리막길 다섯 구비를 돌았을 때, "아부지~"라고 소리쳤다.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신다. 부자간 포옹이 이 눈길에서 벌어졌다. 눈물이 펑펑 눈오듯이 쏟아졌다. 새벽 1시가 다 된 시각이다.

다시 방향을 돌려 두 손을 잡고 집으로 돌아오던 그때 아무도 우리를 본 적이 없었다. 아무 말도 필요 없었다. 그 순간에도 당신은 내가 추울까봐 안아주셨다. 세 시간 가량 걸린 왕복 눈 길에 집으로 돌아온 나는 앓아 눕고 말았다.

그 뒤로 아버지 당신마저 고단한 삶을 20여 년도 살지 못하고 저 세상으로 가셨다.

눈! 여름과 가을에 피는 어떤 꽃 보다 아름다운 꽃이다. 아름다운 눈에만 추억이 있는 것이 아니다. 눈에는 여학생과 같이 걷던 소중한 추억이 있고 가슴 시리게 아픈 추억도 있다. 눈꽃이 이제는 나에겐 해마다 당신들을 잊지 못하는 추억이 되었다.

눈이 많이 오는 날을 잡아 한적한 밤길을 따라 아버지 뒤를 아무 말 없이 다시 걷고 싶다.

덧붙이는 글 | 이제 시간이 흐르니 너무나 소중한 기억으로 남습니다.
눈에 얽힌 아름다운 기억을 모아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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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규환은 서울생활을 접고 빨치산의 고장-화순에서 '백아산의 메아리'를 들으며 살고 있습니다. 6, 70년대 고향 이야기와 삶의 뿌리를 캐는 글을 쓰다가 2006년 귀향하고 말았지요. 200가지 산나물을 깊은 산속에 자연 그대로 심어 산나물 천지 <산채원>을 만들고 있답니다.도시 이웃과 나누려 합니다. cafe.daum.net/sanchaewon 클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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