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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밝게 웃고 있는 강철민 이병
ⓒ 정연우

'파병 반대'를 외치며 부대 복귀 거부 농성을 벌였던 강철민 이병이 군 헌병대로 연행되어 간 지 5일이 흘렀다.

필자가 강 이병을 처음 만난 것은 지난 11월 27일 오후 4시쯤이었다. 그는 벌써 7일째 부대 복귀를 거부한 후, 서울 종로5가 기독교회관 7층 KNCC(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에서 신변 보호를 받고 있었다.

이날 오후 4시부터 5시 30분까지 2층 강당에서 열렸던 강 이병을 위한 기도회가 끝난 후 그는 다시 7층으로 올라갔다. 강 이병의 자유공간은 오직 기독교회관 건물뿐이었다. 밖은 군과 경찰 요원들이 사복 차림으로 대기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런 묘한 대치상황 속에서도 긴장감은 보이지 않았다.

▲ 강철민 이병이 사람들에게 얘기하고 있는 모습
ⓒ 정연우
28일 신병인도를 하루 앞두고 강 이병을 개인적으로 만나 보았다. 물론 취재 때문이긴 했지만 개인적으로 궁금한 것이 많았다.

강 이병은 많이 지쳐 보였다. 수많은 언론의 취재도 그렇지만 신병인도 하루를 앞두고 여러 생각이 교차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내 밝은 표정으로 인터뷰 요청에 응해 주었다.

잠시 후 강 이병은 여러 가지 자신의 입장을 얘기했다. 강 이병은 2003년 7월 7일 입대했다. 그리고 이라크 사태가 악화되고 파병론이 나오자 10월 한달 동안 파병반대 병역거부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했다고 한다.

그래서 11월 17일 첫 휴가를 나온 강 이병은 자신이 결심했던 일을 염창근씨(최근 이라크 파병에 대해 양심적으로 병역거부를 함)에게 연락을 해 밝혔던 것이다. 그 후 19일 여러 사람들을 통해 부대 복귀에 대한 권유와 법률적 조언을 들었다고 한다.

그래서 나왔던 결과가 11월 21일 첫 기자회견 내용이었다. 그는 기자 회견을 통해 노무현 대통령에게 드리는 편지를 발표하고 파병반대 농성에 들어갔다. 그는 자신의 파병반대의 뜻이 충분히 알려지기 전까지는 복귀하지 않을 것이라 했다.

그래서 지금에까지 이르게 된 것이다. 차마 그 앞에서 강 이병에 대한 여론이 좋지 않다고는 말할 수 없었다. 그는 이날밤을 넘기면 이제 거리로 나가 군 당국에 연행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너무 힘들어 할 마음에 하나의 상처는 주고싶지 않았다.

다른 취재진들은 한 둘씩 빠져나가고 남은 기자는 다큐멘터리를 찍고 있는 VJ(비디오 저널리스트)들과 나밖에 없었다. 이제 7층 실내는 조용해 졌고 분위기도 사뭇 마지막 밤을 위해 예배를 드리는 것 같았다.

▲ 보도자료를 주고 있는 앙마 김기보씨
ⓒ 정연우

그 곳에서 뜻밖의 사람을 만날 수 있었다. 바로 지난해 처음 촛불 시위를 제안한 '앙마' 김기보씨였다. 그는 그 곳에서 언론·홍보 업무를 맡고 있었던 것이다. 김기보씨는 활발히 활동했다. 여러 보도자료를 챙기고 행사를 준비하는 등 자신의 이름을 숨긴 채 도와주고 있었던 것이다.

김기보씨와 함께 잠깐 자리를 피해 담배를 피우면서 그의 속마음을 물어보았다.

그는 "강철민군이 언론의 희생양이 되어선 안 된다. 자신과 같은 일이 다시는 되풀이되어선 안되고 강철민군의 진실된 메시지가 전해질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도움을 주겠다"고 말했다.

저녁 7시쯤 기독교회관 밖에서는 촛불집회가 열렸다. 하지만 강 이병은 밖으로 나갈 수 없는 입장이라 같이 있던 사람들끼리 모여 진행했다.

▲ 자신의 기사를 읽어보고 있는 강철민 이병
ⓒ 정연우
그리고 기독교회관 7층에서 강 이병은 그의 학교 선후배들과 만나 모처럼 편안한 시간을 지내고 있었다. 그리고 때마침 다른 신문에 실렸던 그의 기사를 관심 있게 읽어보기도 했다. 그리고 밤은 점점 깊어갔고 같이 농성에 참가했던 많은 사람들은 다시 한자리에 모여 강 이병과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 날 밤은 조용해 보였지만 긴급 회의도 여러 번 있었다. 바로 다음날 거리행진을 위해 여러 가지 의견을 교환했던 것이다. 다들 잠을 자지 않고 철야로 그 날을 지샜다.

11월 28일 아침이 밝아 왔다.

기독교 회관 7층이 분주해 졌다. 여러 신문방송사 취재진들이 속속 도착했고 아침까지 회의가 지속되었다. 28일 11시에 기자회견이 잡혀 있었다. 강 이병은 KNCC측과 변호인 등 다양한 사람들과 의견을 교환하고 있었다.

▲ 학교선후배 학생들과 친구들이 쓴 편지를 읽고 있는 강철민 이병
ⓒ 정연우

그러는 와중에 학교 선후배, 친구 등 함께 농성에 참여했던 분들의 뜻이 적힌 편지를 전달했다. 그리고 기자회견에 앞서 그는 주위사람들에게 작별 인사를 건넸다.

기자 회견이 시작되었고 여러 지지단체들의 대표들도 참석했다. 그들은 강 이병 지지의견을 표명했고 마지막으로 강 이병의 발언을 들을 수 있었다.

드디어 기자 회견이 끝나고 기독교 회관 밖에는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평화유랑단 차 위에서 강 이병을 지지하는 사람들도 볼 수 있었다.

▲ 행진을 위해 기독교 회관 밖을 나서는 강철민 이병
ⓒ 정연우

강 이병은 사람들과 같이 잠시 기독교회관 앞에서 자신의 뜻을 다시 한번 얘기한 후 청와대를 향해 행진을 시작했다. 하지만 미리 나와 있던 경찰 병력에 의해 200m 앞에서 행진이 차단되었다.

더 이상 행진이 어려운 시점에서 강 이병 측과 경찰 측 사이에서 신병인도 협상이 진행되었다. 행진은 평화적이었다. 대치하고 있던 경찰 병력에게 장미꽃과 포옹을 선사하는 장면도 눈에 띄었다.

▲ 행진에 나선 강철민 이병
ⓒ 정연우

이제 강 이병은 경찰병력 쪽으로 신병이 인도되었다. 그러는 와중에 약간의 몸싸움이 벌어졌다. 군 차량이 정진우 목사를 태우지 않고 출발했던 것이다.

신병인도는 전격적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같이 농성을 했던 사람들은 잠시 후 다시 기독교회관으로 돌아가 자신들이 그 동안 썼던 집기며 비품들을 정리해서 돌아갔다. 남은 건 아무 것도 없었다.

며칠이 흘렀다. 하지만 아직 강 이병이 어떻게 수사와 재판을 받을지 관심 있게 지켜보는 사람들이 있었다. 강 이병은 상무대로 호송되었다고 알려졌지만 현재는 광주광역시에 위치한 31사단 헌병대에서 조사를 받고 있다고 한다.

취재를 마치고 부산으로 돌아오는 기차 안에서 입석으로 탄 군인을 만날 수 있었다. 그 군인은 분대장 교육을 받고 휴가 나왔다고 자신을 소개했다. 나는 조심스럽게 그에게 강 이병 문제에 대해 물어 보았다. 하지만 그는 뜻밖의 말을 했다.

"강 이병도 강 이병이지만 저는 그 사람보다 우리 기억 속에서 잊히진 서해교전 전사자들의 이름은 기억하고 있나 먼저 묻고 싶어요"하고 되물었던 것이다.

그랬다. 그 군인의 말처럼 우리는 너무나 많은 것들을 쉽게 알게 되고 쉽게 잊어 가는 건 아닌지 모르는 일이었다. 내가 만났던 강 이병도 그렇고 '앙마' 김기보씨, 그리고 서해교전에서 숨진 군인들. 언젠가 역사책에서만 전해질 이야기를 우리는 지금 너무 쉽게 잊어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현재 강 이병 군대복귀 거부사건 이후로 강 이병 구명을 위한 대책회의나 민간단체 운직임이 활발히 이루어 지고 있다고 한다. 앞으로 수사가 끝난 후 재판이 진행될 때 얼마나 사회 이슈가 될 지는 모르지만 아직 끝나지 않은 문제인것만은 확실하다.

하지만 이번 강 이병의 문제가 개인의 희생으로써 막이 내려서는 안될 것이다. 끝으로 이번 강 이병 문제를 통해 개인의 권리가 단체또는 국가권력기관의 이해관계에 의해 희생되지 않았으면 하는 작은 바램이 이루어졌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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