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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통가족제도수호범국민연합(정가련)은 23일 오후 서울 탑골공원에서 집회를 열고 "호주제 폐지 결사 반대"를 주장했다. 사진은 이날 집회에서 삭발을 하고 있는 이해문 정가련 상임공동대표.
ⓒ 오마이뉴스 남소연



유림이 "분연히" 일어섰다. 명목은 호주제 폐지를 반대하기 위해서. 이들은 "우리 민족이 개·돼지와 다름없게 되는 꼴을 볼 수 없다"며 삭발까지 하고 나섰다. 또 "호주제 폐지 반대의 뜻을 대통령께 알리겠다"며 '1천만명 국민 서명운동'도 시작했다.

반면 여성부를 필두로 정부는 호주제 폐지에 팔을 걷어 부친 상태다. 정부는 관련 부처인 법무부·행정자치부·문화관광부와 한국여성단체연합(이하 여연)·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 등 시민사회단체를 중심으로 '호주제 폐지 특별 기획단'을 구성, 지난 16일 첫 회의를 마쳤다.

여성단체도 여론 모으기에 박차를 가했다. 여연은 "호주제 폐지는 여성 뿐 아니라 남성들도 원하는 일"이라며 지난 21일 '1만인 남성 선언운동'을 시작했다. '호주제 폐지'가 자칫 유림과 여성계의 세 대결로 비화될 조짐도 보인다.

@ADTOP1@"호주는 나라의 원수와도 같다…폐지되는 날 우리는 '짐승'으로 전락"

▲ 이날 집회에는 전국 각지의 유림회 소속 회원 600여명이 참석했다.
ⓒ 오마이뉴스 남소연
"우리 대한민국 정통가족제도수호범국민연합 애국시민 일동은 이제 배달겨레의 근본인 가족제도가 누구도 범할 수 없는 자랑스런 민족문화로서 수호되어야 함을 만천하에 선언한다.

반만 년 선조의 경험과 지혜를 모아 이를 선언하며, 민족의 보존과 발전을 위하여 이를 주장하며, 인류의 앞날을 진정으로 염려하여 이를 제기하니, 이는 하늘의 명령이요, 시대의 요결이요, 생존번영의 길이라.

아! 금수와 다를 바 없는 야만 사회를 초래하지 않으려면, 배달겨레의 숭고한 사랑을 보존하려면, 가정과 집안이 절손과 멸망을 당하지 않으려면, 우리의 숭고한 문화와 가족제도의 근간을 훼손하지 못하도록 엄중히 대처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이제 홀연히 분기하여 총궐기하였다." - '호주제 폐지 및 가족법 졸속개악 반대 선언문' 중에서


23일 오후 1시 서울 종로 탑골 공원. 오랜만에 유림이 한 자리에 모였다. 이들은 공주·천안 등 전국 각지에서 전세버스까지 대절해 상경했다. 갓을 쓰고 도포자락을 휘날리는 노인도 간간이 눈에 띄었다. 여성들은 한복이나 당의를 입고 참석하기도 했다. 한국씨족총연합회 총본부와 성균관 유도회 총본부 등 사회단체들로 구성된 '정통가족제도수호범국민연합'(이하 정가련)이 '호주제 폐지 및 가족법 졸속개악반대 국민총궐기대회'를 연 것. 하지만 엄밀히 말하면 이날 궐기 대회는 '유림총궐기대회'였다.

"아, 연락 받고 왔지유. 전세버스 1대에 50명이 타고 왔어… 그러면 안되지 않어유? 우리야 절대 반대지. 말이 안되지."

▲ 이날 당의를 입고 집회에 참석, 선언문을 낭독하고 있는 이미자 정가련 전국여성총본부장.
ⓒ 오마이뉴스 남소연
천안 유림회의 회원이라는 김영화(52)씨와 조춘호(55)씨는 여성이지만 호주제 폐지에 '결사 반대'하는 입장이다. 이들은 여성부가 호주제를 연내 폐지할 방침이라는 언론보도가 이어지자 유림회의 연락으로 이날 집회장을 찾았다. 이들이 호주제 폐지에 반대하는 이유는 "가족도 몰라보고 끝내는 아버지나 형제끼리 부부가 될 수 있다"는 데 있다.

역시 공주에서 4시간이 넘게 버스를 타고 왔다는 김교창(78)씨도 마찬가지. 여든이 넘는 나이도 그에겐 '불참 이유'가 못됐다. 호주제 폐지는 김씨에게 '청천벽력'과도 같은 일. 그는 "호주제가 없어지면 국가의 원수와도 같은 가장이 없어진다"고 말했다.

도포를 입고 갓을 쓴 채 시위에 참석한 유림도 있었다. 대전 진잠 향교 지부회장을 맡고 있는 박용근(70)씨는 "우리 어머니가 낳아 주신 그대로 몸을 보존하고 있다"며 "머리도 갓난 때 그대로 손을 안 댔다"고 자랑스러워했다. "이런 일엔 술을 안 마실 수 없어 소주를 세 홉이나 마셨다"는데도 쉽게 눈치를 못 챌 만큼 점잖았다. 어느 때건 '군자의 도'를 지키는 조선시대 선비의 모습이었다.

뿐만 아니다. 사고 또한 조선시대 선비의 그것이었다. 박씨는 "호주제가 없어지면 이 나라가 망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며 "애미·애비 모르는 강아지가 되려고 하는데 우리 유림이 나서서 나라를 구제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이들은 최근 여성계와 이미경 민주당 의원이 추진, 입법 발의를 준비중인 '호주제 폐지를 위한 민법 개정안'의 내용은 전혀 몰랐다.

박씨는 "아니 폐지되면 이미 우리는 강아지가 돼 있는데 법 내용은 알아서 뭣 하느냐"며 "법을 알고 모르고 하는 건 중요하지 않다"고 항변했다.

기성세대만 호주제 폐지를 반대하는 것은 아니라며 인터뷰를 자처한 '20대'도 있었다. 호주제 폐지를 반대하는 대학생들과 함께 인터넷 카페에서 활동하고 있다는 박완석(24)씨는 "이혼 가정 때문에(이혼한 여성이 전 남편과의 자녀를 데리고 재혼했을 경우 아이의 성이 재혼한 남편과 달라 받는 고통) 호주제를 폐지해야 한다고 하는데 성만 바꾼다고 상처가 없어지느냐"며 "이혼가정에 대한 인식을 바꿀 일"이라고 말했다.

그가 활동하고 있다는 인터넷 카페 이름은 '극렬 페미 갱생을 위한 시민들의 모임(cafe.daum.net/babofemiboonja)'. 여성주의자들을 겨냥한 이름이다. 그는 "여성계가 너무 결과의 평등만을 바라고 있다"며 "여성계가 바뀌어야 한다는 필요성으로 만든 모임"이라고 소개했다. 이어 그는 이런 말도 덧붙였다. "우리 카페 회원들은 거의 대학생이다. 젊은 사람들은 모두 진보면 좋은 줄 안다. 그래서 사회가 좌파적으로 흐르는데 그렇게 되면 안 된다." 박씨에게 '여성주의'는 '극렬 진보'였다.

이날 이해문(성균관 유도회 총본부회장) 정가련 상임공동대표와 최규동 정가련 상임위원은 머리칼을 잘랐다. "호주제 폐지에 반대하는 정가련의 의지를 보이기 위해서"가 삭발의 이유다. 이해문 대표는 "삭발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여기에 삭발이 아니라 분신할 사람도 많이 있다"고 말했다.

또한 정가련은 이날부터 '호주제 폐지에 반대하는 1천만 국민 서명운동'도 시작했다. 정가련 측은 "향후 서명운동 자료를 대통령께 제출해 국민의 뜻을 알리겠다"고 말했다.

▲ 이날 집회에 참석해 '대한민족 만세'를 부르고 있는 유림회 회원.
ⓒ 오마이뉴스 남소연
하지만 이날 탑골공원 주변에서 이들을 바라보는 시민들의 눈길은 그리 곱지만은 않았다.

주부인 박은미(30)씨는 "호주제가 그간 누구에게 득을 가져다 주었는지는 이를 반대하는 세력이 어떤 층인지를 보면 된다"며 "(유림 등의 주장이) 한심하고 답답하다"고 말했다.

또 박씨는 "당장 '1인 1적제'로 개편되진 못하더라도 '친양자제도'는 어서 받아 들여야 한다"고 덧붙였다.

현재 대학에 다니는 송재연(25)씨도 마찬가지 의견을 내놨다. 송씨는 유림을 가리켜 "왜들 그러시는지 어이가 없다"며 "나는 호주제 폐지에 찬성하는 입장"이라고 말했다.

이어 송씨는 "결혼은 당사자간의 동등한 결합이어야 하는데 현재로선 서류상으로도 여자가 남자에게 존속되고 있다"며 "이밖에도 이혼가정을 위해서도 당연히 폐지돼야 하는 것 아니냐"고 지적했다.

한편 이같은 유림의 반발에 대해 호주제 특별 기획단에서 활동 중인 남윤인순 한국여성단체연합 사무총장은 "호주제 폐지는 민법 상의 가(家) 제도를 없애고 호주 중심의 가족 편제 방식을 바꾸자는 의미"라며 "호주제가 없어진다고 가족제도가 없어지는 것은 아닌데 유림이 사실을 호도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어 남윤 사무총장은 "호주제 폐지를 둘러싼 문제가 자칫 성 대결이나 '유림 대 여성계'로 비춰지는 것은 옳지 않다"며 "이미 많은 남성들도 호주제의 부당성을 느끼고 있고 호주가 되는 데 대한 부담을 느낀다는 의견을 내놓고 있다"고 덧붙였다.

여성부에서도 유림의 반발로 정부의 방향이 흔들릴 여지는 없으리란 입장이다.

조성은 여성부 공보관은 "호주제 폐지는 참여정부의 공약이자 정부의 확정 사항"이라며 "호주제 폐지 특별 기획단이 구성됐다는 것은 호주제 폐지라는 전제 하에 정부에서 민간단체와 함께 시기나 방법을 논의하기 시작했다는 의미"라고 밝혔다.

또 조 공보관은 "현재 호주제 폐지 기획단에서는 민법 상의 호주제를 먼저 폐지하고 가족법을 개정할 것인지, 두 법률을 동시에 개정할 것인지 등의 방법에 대해 논의를 벌이고 있는 중"이라며 "이같은 사항이 확정돼 국무회의 의결이 끝나면 정부안으로 국회에 제출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호주 없어지면 가족 붕괴?"
여성계, '기우' 한목소리

▲ 지난 달 22일 국회에서 열린 '호주제 폐지를 위한 간담회'.
ⓒ오마이뉴스 이종호
이날 시위에 나선 정통가족제도수호범국민연합(이하 정가련) 소속 유림이 호주제 존속을 주장하는 이유는 대체적으로 이렇다. "호주제가 없어지면 가족이 붕괴된다""내 가족이 누구인 줄 어떻게 아는가?"

그간 호주제 폐지를 준비해온 여성부나 여성계에서는 이런 주장은 '기우'라는 입장이다.

여성부가 지난 4월 내놓은 호주제 폐지 홍보자료인 '호주제 폐지, 행복한 가족으로 가는 지름길'을 보면 이런 기우에 대한 해답이 명쾌하게 나와 있다.

첫째, 우리의 가족을 지켜주는 것은 호주제가 아니다. 호적은 개인의 신분관계를 등록하는 행정문서일 뿐이다.

둘째, 호주제는 일제의 잔재이자 일본에서도 사라진 제도이다. 일본은 천황제를 유지, 강화하기 위해 호주제와 가(家)제도를 옮겨와 우리 전통에 없는 호주제를 급조했다. 조선시대에도 호주제는 없었다.

셋째, 호주제 때문에 우리나라는 인권 후진국이라는 비난을 받는다. 지난 99년 유엔인권이사회에서도 한국의 호주제에 대해 "여성의 지위를 종속적으로 규정하고있는 호주제는 가부장적인 사고를 반영, 이를 강화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또한 호주제로 인한 성감별 여아 낙태는 심각한 성비불균형을 가져온다. 지난 2001년 우리나라에서 출산된 '남아대 여아'의 성비는 '105.4대 100'으로 심각한 수준이다.


이밖에도 정가련 측은 친양자제도(재혼한 여성의 자녀가 양아버지의 성을 따를 수 있도록 하는 제도)에 대해서도 반대하고 있다. 이를 받아들일 경우 누가 내 가족이며 뿌리인 줄 알겠느냐는 것이다.

하지만 이에 대해서도 여성계는 '쓸데 없는 걱정'이라고 일축했다. 남윤인순 한국여성단체연합 사무총장은 "현재의 호적제도 하에서도 발생할 수 있는 문제"라며 "현행법도 부나 모계의 4촌 이내의 혈족과는 금혼을 규정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어 남윤 사무총장은 "다만 현실적으로 혈족관계는 생부나 생모에 의해 알 수 있는 것"이라며 "또한 따로 근친혼 금지 조항 등의 법으로도 규율할 수 있는 문제"라고 꼬집었다. / 김지은 기자
"전국 돌며 '호주제 폐지 반대 궐기대회 열 것"
[인터뷰] 이해문 정가련 상임공동대표

▲ 집회 후 기자들의 질문에 답하고 있는 이해문(왼쪽) 대표.
ⓒ오마이뉴스 남소연
이날 머리칼까지 자른 이해문 정통가족제도수호범국민연합 상임공동대표는 사뭇 비장한 표정이었다.

그는 "우리가 호주제의 폐해까지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이런 문제는 고쳐나가야 한다"라며 "우리도 진보적인 생각이 있다"고 항변했다. 그러나 이 대표는 "(호주제) 폐지는 결사 반대"라며 "삭발 아니라 분신자살 할 사람도 많다"고도 했다.

또한 그는 "향후 전국을 돌며 국민 총궐기 대회를 잇따라 열 것"이라며 '결사반대'의 의지를 피력하기도 했다.

다음은 이날 집회 후 이 대표와 나눈 일문일답이다.

- 왜 호주제 폐지에 반대하나?
"호주제는 우리 가족제도로 우리의 근본이다. 현재의 호주제가 문제 있다는 것은 우리도 안다. 고쳐나가야 한다. 그러나 무슨 세법 개정하는 것도 아니니 전 국민이 토론해서 법을 만들자는 취지다. 그래서 계승할 필요가 있으면 계승해야 한다. 우리도 이런 진보적인 생각이 있다. 그러나 지금의 졸속적 폐지는 결사 반대다."

- 여성부에서 '호주제 폐지 특별 기획단'을 구성하면서 반대 여론 수렴을 위해 참여 의사를 타진한 것으로 알고 있다.
"그렇다. 하지만 현재의 기획단은 '폐지를 위한' 것 아닌가? 그런 기획단에는 참여할 수가 없다. 개정을 위한 기구라면 들어갈 수 있다."

- 친양자제도는 왜 반대하나?
"아이를 배려하겠다면 성은 그대로 두고 아들로 행세할 수 있는 법을 만들면 되지 않겠나?"

- 앞으로의 계획은 무엇인가?
"정가련에는 전국적으로 294개의 지부(향교)가 있다. 또 300여개 단체가 참여하고 있다. 전국을 돌면서 궐기대회를 할 것이다. 또 1천만명 서명운동을 벌여 대통령께 제출하겠다." / 김지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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