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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성남
노무현 대통령은 대선 후보 시절 많은 국민들과 만나 사연과 고통과 의견을 들었다. 우리는 그 과정이 단지 표를 얻기 위한 과정은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이후 노무현 대통령이 당선되고 난 후 기자회견장의 뒤 배경에 큼지막하게 써 놓은 문구가 있었다.
'국민이 대통령입니다.'

'노무현 대통령이 만나야 할 대통령' 시리즈는 바로 그 문구의 의미에 맞게, 국민 한 명 한 명이 대통령인 시대에 우리 사회 각계의 사람들의 삶과 고통과 희망을 듣고자 한다. 이 시리즈는 총 8회에 걸쳐 진행되며, '줌마네'의 자유기고가들이 참여했다...<필자 주>


김대중 전 대통령은 퇴임을 열흘 앞둔 지난 2월 15일, 청와대에서 칠레 대통령과 한·칠레 자유무역협정 체결 축하주를 마셨다. 그날 일단의 농민들은 '추곡수매가 인하 반대'와 '농산물 시장반대'를 주장하며 시위를 벌였다. 굳이 이날의 농민시위가 아니더라도 우리 농촌이 쌀더미보다 높은 빚더미를 쌓아놓고 산다는 것은 낯설지 않은 이야기다.

기자는 영산강을 젖줄로 하여 광활한 평야가 있고, 최고의 맛을 자랑하는 배의 특산지인 전남 나주를 찾았다. 그러나 농민들의 현실은 생각보다 비참했다. 새 정부가 들어서면 으레 가질 법한 희망과 기대의 싹마저 마음속에 챙길 여지도 없어 보였다.

"친구들은 내가 시골에서 이렇게 사니까 편안하게 사는 줄 알고 부러워하며 요렇게 살고 싶다고 하는디 속 모르는 소리 하는 것이제."

나주시 공산면에서 만난 박상희(48)씨는 한탄부터 늘어놓았다. 그의 말처럼 녹음이라도 우거지면 정말 '초원 위의 그림 같은 집'이다. 집 앞에는 '계림축사육계단지' 건물이 육중한 자태로 서 있었다.

▲ 육계단지 앞에서 - 박상희씨부부
ⓒ 정희경
박씨는 마침 한 파스(병아리가 닭으로 상품화되는 과정, 이하는 설명 생략)가 끝난 상태라 온 가족과 병아리의 보조밥통을 씻고. 왕겨를 깔기에 바빴다. 자동화처리 시설이 있지만, 다시 한 파스를 위한 준비는 모두 사람 몫이었다. 육계단지(고기로 먹을 수 있는 닭)는 겉보기에는 어느 중소기업 못지 않아 보였다. 그러나 현재 박씨는 신용불량자이다.

박씨가 농촌에 정착한 때는 20여년 전이었다. 그때만 해도 그런 대로 살 수 있는 땅이 있었고, 작물마다 운때도 잘 맞아 쏠쏠히 재미를 보기도 했다. 박씨가 내리막길을 걷게 된 때는 아이러니하게도 정부에서 농업후계자로 지목하면서부터였다. 당시 정부는 소 입식(10두)조건으로 융자를 주었다.

그러나 몇 년 지나지 않아 소 수입 개방에 따른 소값 파동이 일어났다. 소 한 마리 당 100만원 넘게 주고 샀는데 결국 '개값'에 내놓아야 했다. 그후 박씨는 육계로 전환했다. 처음에는 조그맣게 시작했으나 1995년 김영삼 정부가 내놓은 '국제적 경쟁력을 갖추기 위한 대규모 축사단지 시책'에 호응하여 정부의 정책자금 3억원과 개인 돈 1억원씩을 투자해 5명이 육계단지를 조성했다. 그러나 육계 역시 '닭 쫓던 개'꼴이 되고 말았다.

"마침 재미를 볼려고 하는디 IMF가 와버렸지. 그러니 수입에 의존하는 사료값, 기름값은 천정부지로 오르지, 사료 질도 엄청 나빠져 버려 닭이 크지를 않는 거여. 이전보다 일주일이 더 걸리더라구."

계약사육을 맺은 회사도 환율대란으로 사정이 어려워지니 원가절감을 추진했고, 그 비용을 고스란히 육계단지가 떠 안았다.

"돈은 계속 까먹는디 안 키울 수가 없어, 근다고 하늘만 쳐다보며 놀 수도 없고. 불투명했지만 한 1년을 비싸지겠지, 잘 크겠지, 잘 되겠지 하며 고생고생 했는데, 도저히 버티지 못한 채 경매에 넘어가 버렸지라우."

결국 3억원을 대출받아 시작한 일이 두 손 들었을 때는 눈덩이처럼 불어 빚이 5억원이나 되었다. 부부가 새벽 6시부터 밤2시까지 매달리며 일했지만, 상품을 낼 때마다 최고가를 친다해도 치솟아 오르는 사료값, 기름값, 전기료, 약값 등을 제하고 나면 원금은 고사하고 이자 감당마저 어려웠다. 사정이 그러니 대학생과 중고등학생인 세 자녀들에겐 겨우겨우 등록금이나 주고 있다.

"내가 한번도 내색은 안 했지만 죽을 마음을 먹고 마누라, 자식새끼들 쳐다본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제. 그런디 농촌에서는 죽는 것도 맘대로 못혀. 죄다 연대보증에 걸려 있으니께."

박씨는 다행히 친지와 주위의 도움을 받아 경매로 넘어간 축사를 인수받아 다시 시작하게 되었다. 현재 그는 2억5천만원 정도의 빚이 있단다. 아직까지 생산비를 상회하는 이익이 발생하지 않아 연체율을 감당하지 못 해 이자는 생각도 못 하는 상태다.

"금융신용불량자로 찍혀있으니 죽기 전까지는 범법자로 살아 가야지라. 부채 탕감은 고사하고 빚이나 제때 갚고 회생할 수 있도록 장기 저리로 융자를 늘려 주었으면 쓰것는디.…" 그런 박씨의 소원은 "내 이름으로 통장 하나 갖는 것"이었다.

정부 시책에 맞춰 일을 했으나 결국 빚더미에 앉게 된 농민은 비단 박씨만은 아니었다. 정부의 말에 따라 농사를 지었던 당시의 청년들은 지금 대부분 억대의 빚더미에 허덕이는 중·장년이 되어 살고 있다. 역시 농업후계자였던 나주시 동강면에 사는 양연모(48)씨도 마찬가지이다.

양씨는 1984년 농촌에 왔을 때 영농 공부에 몰두해 불과 1년만에 동네에서 농학박사로 불렸다. 그러나 그는 지금 갚아야 할 빚이 연대보증까지 합해 7억원 정도 된다고 한다. 논 32마지기로 출발한 의욕적인 청년, 양씨의 첫 실패기 역시 소파동으로 비롯되었다.

"당시만 해도 소를 키워야 돈이 된다며 동네어른들이 장려했지라. 근디 전두환 성인가, 동생인가 하는 새끼가 거시기 하는 바람에 작살나 버렸지라우."

그는 어이가 없어서 소를 정리하고 개를 5마리 키웠다. 소를 팔아 개를 키운 꼴이었다.

이후 양씨 역시 다시 서서히 소 값이 오르자 재기를 노렸다. 5명이 법인을 구성해 시설자금을 융자받아 180평 축사에 한우 50두를 키웠다. 그 역시 정부의 적극적인 정책 장려였다고 한다. 처음엔 식당도 운영했고 한우의 육질이 좋아 판로도 직접 개척했다. 그러나 그것도 잠깐이었다. 이번엔 우루과이라운드에 따른 수입농산물이 식탁을 점령했다. 작물을 지었던 농가들은 자연스레 한우로 몰렸다. 결국 공급과잉으로 인해 한우 값 폭락이 빚어졌다.

"지금 생각하면 참 미련한 짓거리였어∼. 소 값도 아니고 시설 자금인디 소 값이 계속 좋아진다면 충분히 가격이 나올 수 있것지만, 소는 최소한 1년 이상은 키워내야 허는디. 그 동안에 사료값들이 전부 빚 아니요, 그러니 시설자금이라는 것이 농촌 사람들에게는 한계가 있어 부러요."

그 결과 그는 회생할 수 없는 억대의 빚더미에 앉게 되었다. 논 32마지기는 담보로 야금야금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농기계마저 처분해 개인 빚을 청산해야 했다.

"실은 논도 다섯 마지기만 내 것이고 나머지는 형님들 것이었는디…. 파산하고 아들놈 대학 입학하는데 형들이 입학금을 보내왔더구만이라. 아들 놈이야 헐 수 없이 한 학기 마치고 곧바로 군대 보냈지라. 3년 후면 좀 나아질까 싶은 맘에…."

양씨는 명절 때면 형제들 볼 면목이 없어서 일부러 일용직이라도 나가 품팔이를 한다. 그렇게라도 자신의 실패를 비껴가고 싶어했다.

▲ 나주 배밭 정경
ⓒ 정희경
나주 평원에 잠긴 어둔 시름은 나주의 특산물이라는 배 재배 농가에도 깊었다. 나주는 연평균·강우량·일조량·적당한 배수의 토질 등 배 농사를 짓기에는 둘도 없는 천혜의 조건의 갖춘 곳이다. 그래서 나주에서 출하되는 배는 육질이 연하고 부드러우며 과즙이 많고 당도가 높기로 유명하다. 그러나 그런 자연이 준 선물도 정부정책을 만나면 포장지만 번지르르한 선물이 되고 만다.

"예를 들어 수박농사 해서 돈 좀 벌었다 해 불면 고추농사, 콩농사 할 것 없이 하다못해 지붕의 달팽이까지 싹 내려와 수박농사 지어불먼 홍수출하 되서 싸그리 가 버린다 그 말이여."

나주시 용산동에 사는 강현식(가명. 35)씨는 대뜸 정부의 무계획적인 농업정책에 대한 항변부터 늘어놓았다.

강씨는 이른바 명문대 출신이다. 대학 다닐 때 농촌동아리에서 활동하게 된 것이 계기가 되어 고향에 정착했다. 논농사 18마지기와 함께 배 농사로 시작했으나, 그 역시 8년 만에 1억원이 넘는 빚을 안았다.

배 값은 작황과 수급 조절이 잘 될 때는 1박스당 최고 7만원, 최저 3만원에 팔았다. 그러나 배 농사가 돈이 된다 싶으니까 농가에서 너도나도 배나무를 심었다. 공급물량이 많다보니 배 값이 폭락했고 두어 번 출하했더니 고스란히 8천만원이 빚으로 남았다. 더욱이 수입 과일로 인한 배 소비 감소도 빚을 늘리는데 한몫 했다.

봄부터 꽃을 틔우고, 작열하는 뙤약볕 아래 농약을 들이키며 벌레를 퇴치하고, 퇴비를 주며, 가을 태풍을 견뎌 자식처럼 키워낸 배가 한 박스에 3천원일 때도 있었다. 가격보장과 수급조절이 되지 않는 조건에서는 무엇을 하든 밑지는 농사밖에 할 수 없는 실정이었다.

"지금 농가에서는 무엇을 하든 투기나 같지라우. 지난해엔 태풍 '올가'의 피해로 장기간 복구가 불가능한 '김해지역의 덕택'에 다른 농가들의 소득이 쪼금 보장 되었지라. 그러니 농촌에서는 한쪽에서 울어야 다른 한쪽에서 웃을 수 있게 구조가 만들어 졌어요."

그나마 농촌에서 도박이 아닌 것은 쌀 농사였다. 정부수매가가 있어 다른 작물보다는 안정적이었다. 그러나 그마저도 올해엔 정부의 '수매가 2%인하'와 '생산조정제' 발표에 따라 위태롭게 되었다.

"생산조정제라는 것이 논에다 아무 것도 안 심고 묵히면 1ha당 정부에서 300만원씩 보상을 해 주겠다 하는디, 현재 임차농지는 250만원이여. 그냥 놔두면 300만원을 보상해 주는디 누가 250만원을 받고 임대를 하겄어?"

결국 생산조정제는 전체 농가의 72%를 차지하고 있는 임차농가의 비용상승을 유발할 것이다.

강씨는 이런 정책들이 쌀 재협상을 앞둔 '쌀 포기 정책'의 일환이라며 분노를 터뜨렸다.

"일본은 쌀 자급률이 40%밖에 안되는데, 올해 목표가 60%로 높이는 게 국가슬로건이요. 걔들 죽었다 깨어나도 쌀 자급은 못 허요. 우리는 100% 가깝게 쌀 자급이 되고 있는데 미련한 놈들이 그걸 보존하려고 하지는 않고 자급률을 떨치려고 헌당께."

강씨는 시종일관 '대책 없는 농업정책'으로 일관해 온 그 동안의 정부에 대해 거센 항의를 마다하지 않았다. 그러나 정부에 대한 항의는 비단 강씨만의 목소리는 아니었다. 박상희씨나 양연모씨 역시 표현법만 다를 뿐 속내는 다를 바 없었다.

그럼에도 그들은 여전히 농민이었다.
박상희씨는 애초에 오늘 노무현 대통령 취임식에 초대받은 사람이었다. 그러나 박씨는 "취임식에 가고 싶지만, 축사를 한시도 비울 수가 없어서 참가하지 못하겠다"고 말했다. 지난 2월14일 '쌀 수매가 2% 인하규탄' 농민시위에 참여했다 연행 된 후 풀려난 양연모씨는 그래도 여전히 "농사가 좋다"고 말했다.

"허는 일 없이 놀기 같이 고된 것이 없지라우. 축사라도 나가 꼼지락거려야 사는 맛이 있지, 일하면 신간이 편한께로."

기자는 기차에서 마셨던 커피값이 배 한 상자 값인 3천원이었다는게 서울로 올라오는 내내 마음에 걸렸다. 그러나 그 마음도 농촌 현실에 비하면 사치일지도 모르겠다. 그 동안 농촌은 서서히 무너졌다. 한우가 무너졌다. 고추가 무너졌다. 마늘이 무너졌다. 이제 쌀이 무너지려 한다. 그 다음은 어디가 무너질까! 국민참여를 표방한 노무현 정부에서 농민들의 참여는 '농민시위'뿐이어야 하는지 마음이 무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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