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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성남
노무현 대통령은 대선 후보 시절 많은 국민들과 만나 사연과 고통과 의견을 들었다. 우리는 그 과정이 단지 표를 얻기 위한 과정은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이후 노무현 대통령이 당선되고 난 후 기자회견장의 뒷 배경에 큼지막하게 써 놓은 문구가 있었다.
‘국민이 대통령입니다.’

‘노무현 대통령이 만나야 할 대통령’ 시리즈는 바로 그 문구의 의미에 맞게, 국민 한 명 한 명이 대통령인 시대에 우리 사회 각계의 사람들의 삶과 고통과 희망을 듣고자 한다. 이 시리즈는 총 8회에 걸쳐 진행되며, 줌마네 아줌마 자유기고가들이 참여했다. <필자 주>



“예쁜 사진 찍어 드릴 테니 다정한 포즈 좀 취해 보세요.”
박선애.순애 할머니 자매는 쑥스러운 듯 어색한 듯 서로 가까이 다가서 어깨를 나란히 한 채 카메라 앞에 앉았다. 어딜 가든 꼭 붙어 다니는 두 할머니들. 언니인 선애 할머니는 말씀은 별로 없으시지만 활달하고 다부져 보이고, 동생인 순애 할머니는 인정이 많아 보였다.

두 할머니는 아직 쌀쌀한 날씨 탓인지 바깥나들이보다는 집안에서 라디오를 듣고 책이나 신문을 읽으면서 시간을 보낸다. 겉으로 보아선 여느 동네에서 만날 수 있는 자매할머니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러나 이 두 할머니의 삶을 반추해 보면 시대가 어떻게 한 사람의 삶을 관통하는지, 그리고 그것이 어떤 자국을 남기는지를 여실히 볼 수 있다.

1.

두 할머니는 전북 임실이 고향이다. 이들 할머니는 원래 7남매 다복한 집안에서 나고 자랐다. 하지만 일제 시대 독립 운동을 하셨던 아버지의 영향을 받았던 형제들은 이내 생과 사를 가르는 이별과 만남의 시간을 보냈다. 미군정에 반대했던 오빠는 예비검속으로 끌려가 돌아오지 못했다. 남동생은 빨치산 연락병으로 활동하다가 숨졌단다.

두 분 할머니들도 한국전쟁 중에 빨치산 활동을 하다가 구속돼 10년 이상 옥살이를 했다. 두 할머니는 출소 후 모두 결혼했다. 그러나 그 이후로도 할머니들이 보낸 삶은 고단하고도 힘든 시간들이었다.

서울 강북의 한 동네에 살고 있는 두 할머니의 거실에는 언뜻 보아서는 이해하기 힘든 사진이 한 장 걸려 있다. 한 할아버지와 두 할머니 그리고 딸이 한 명 있는 사진이다. 두 할머니는 선애.순애 할머니이고, 할아버지는 선애 할머니의 남편 윤희보 할아버지이다. 그리고 딸은 선애 할머니의 딸 희선씨다.

희선씨 가족사진에 순애 할머니가 함께 한 것은 희선씨가 두 할머니를 모두 엄마라고 부르기 때문이다.

원래 희선씨는 선애 할머니와 윤희보 할아버지가 마흔이 넘어 얻은 무남독녀다. 그러나 1974년 할아버지는 반공법 위반으로, 할머니는 사회안전법으로 구속되면서 길에 버려졌다. 그때 희선씨 나이가 6살이었다. 그 후 먼 친척 집에서 방치되다시피 지내던 것을 순애 할머니가 데려다 키우면서 이모를 엄마로 부르게 됐다.

“원래 이름은 윤봉혁이었어. 귀한 자식이라 집안의 돌림자를 넣어 부모가 손수 지어준 이름이었지. 하지만 살아남기 위해서는 부모가 지어준 이름도 버려야만 했지. 희선이란 이름은 형부 이름에서 희자를, 언니 이름에서 선자를 따와 내가 지어준 이름이야.

순애 할머니는 희선씨 이름에 담긴 비밀을 털어놓았다. 그런 이름의 비밀은 어린 희선씨에겐 큰 고통이었을 법했다. 그럼에도 희선씨는 묵묵히 참았다. 자신이 왜 봉혁에서 희선이가 됐고 이모를 왜 엄마라고 불러야하는지를 어린나이에도 정확히 알고 있었지만 입밖에 낼 수 없었기 때문에. 그때는 부모를 만날 수도 없었고 보고 싶다고 말할 수도 없었던 시절이었다. 반공이 국시였던 때 부모가 모두 빨갱이로 잡혀 감옥에 가 있었던 아이는 이모부 호족에라도 올라 있어 그나마 학교라도 다닐 수 있었다.

▲ 박순애.선애 할머니
ⓒ 홍미용
희선씨는 이모에게 종종 ‘새가 되고 싶다’고 했다. 새처럼 자유롭게 날아 엄마 아빠에게 가고 싶었던 아이의 맘은 조금 자라서는 ‘비행사가 되고 싶다’로 바뀌었다.

그런 희선씨를 기르며 이모인 순애 할머니의 맘고생도 이만 저만이 아니었다. “나도 과거 옥살이 이력 때문에 사회안전법으로 구속될까봐 걱정돼서 지문을 없애려고 손바닥을 거친데 문지르기도 했고, 행여 어린 조카가 빨갱이의 자식으로 잡혀갈까 숨죽이며 숨어 살아 왔지.”

순애 할머니의 남편도 사람들이 행여 조카의 신병을 의심할까봐 한 술 더 떠서 동네 사람들에게 희선씨를 자신이 바람 피워서 난 자식이라고 소문내고 다녔다고 한다. 그래서였을까. 희선씨는 이모부 장례식 때 상주 노릇을 했다.

순애 할머니는 당시의 희선씨를 떠올리면서는 목소리가 젖어들었다.
“우리 애가 공부는 잘했어. 아무쪼록 공부 잘하고 있으면 얼른 통일이이 돼서 엄마 아빠 만날 수 있다고 그랬거든. 그래도 어린 것이 어찌나 기특하던지. 절대로 내색을 하지 않는 거야. 살림도 어렵고 전에 옥살이로 몸도 아프고. 마음을 솥에 넣어 달달 볶았어.”

2.

몇 차례를 만나고 나서야 듣게 된 두 할머니의 이력은 지나온 삶의 고개를 넘는 숨가쁨은 없었다. 애절함과 고생이 말로 못할 듯하지만, 이미 세월에 상당히 씻긴 듯했다. 거실 창가에는 분홍 연산홍과 선인장 난초들이 옹기종기 놓여있다. 그곳에 이른 봄볕이 내렸다.

예전부터 꽃을 좋아하셨던 선애 할머니는 74년 부부가 수감되기 전까지 신림동에서 화원을 했다. 창가에 놓인 화분들은 당시의 생활이 지금까지 스며들어 있는 듯했다.

선애 할머니가 남편인 윤희보 할아버지를 처음 만난 것은 한국전쟁중 빨치산 활동으로 구속되었다가 출소 한 얼마 후인 1968년, 함께 활동하던 동지들의 소개를 통해서였다. 할머니보다 10살이나 많았던 할아버지에 대해 가졌던 처음 느낌은 ‘존경할만한 사람’이었다고한다. 결혼 후 할아버지는 할머니에 대한 애정을 내놓고 표현하지는 않았지만 시어머니 몰래 집안일에 서툰 할머니를 도와 물을 길러 주시곤 했다.

그러나 그런 신혼의 애틋함은 오래 가지 못했다. 두 사람은 74년 같이 구속됐다가 선애 할머니가 79년, 할아버지가 89년 출소할 때까지 20년 가까운 세월을 떨어져 살았다. 그때까지 할머니가 할아버지를 만난 것은 딱 두 번이었다. 서로 감옥에 있을 때 운 좋게 두 번 만난 것이다.

그러나 할머니는 출소한 뒤로는 단 한번도 할아버지를 면회가지 않았다. 가족을 통해 전향을 강요하는 일이 빈번했던 때라 보고 싶은 마음을 접을 수밖에 없었다. 대신 가족에 대한 사랑과 그리움의 마음을 전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편지였다. 할아버지는 할머니와 딸에게 수많은 옥중 편지를 보냈다고 한다. 당시 할아버지가 보낸 편지에는 이런 싯구도 있었다.

국화꽃이 웃음을 터뜨렸다구
송이 송이 간직간직된 그윽한 모습
뭉클한 아내마음 달래준다오.

상강지낸 늦가을 꽃피움이여
곱게 곱게 단장한 청아한 모습
뭉클한 아내 마음 달래준다오.(중략)

20여년을 생이별한 부부가 함께 만난 때는 89년이었다. 사회안전법이 폐지됐고 살아서는 못 만날 줄 알았던 사람이 감옥문을 나왔으니 선애 할머니의 기쁜 마음을 말로 다 표현하지 못할 정도였다.

“그때는 얼마나 좋았던지. 그때 뭐 돈이라고 딱 700만원 있었어. 어찌어찌해서 1000만원짜리 방을 구해서 여동생이랑 모두 4식구가 한 집에서 살게 됐는데, 아침에 눈을 떴을 땐 서로 같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너무 기뻤지.”

3.

그러나 그로부터 10여년이 흐름 지금 할아버지는 가족과 함께 살고 있지 않다. 지난 2000년 남북 정상회담 후 비전향 장기수 북송 때 할아버지는 북으로 가셨다.

선애 할머니는 전향하지 않았던 장기수였기에 대상자에 포함되어 있었지만 처음부터 가실 마음이 없었다. 호적상 모녀 사이로 되어 있는 여동생 순애 할머니와 딸 때문이었다.

“힘들게 자란 딸과 동생을 남겨둔 채 북으로 갈 순 없었지. 그때 서울의 한 호텔에서 할아버지를 보내 드렸지. 그날 희선이는 참 많이 울었어. 나야 뭐 기쁜 마음으로 보냈지. 어차피 가야 할 사람인데…. 뭐. ‘또 만나자’ 서로 말 안 해도 알지.”

할아버지 보고싶지 않냐는 짖궂은 질문에 선애 할머니는 계면쩍고 약간은 수줍은 표정을 지었다.
“왜 안 보고 싶겠어. 우리가 결혼해 한 10년 같이 살다 20년 가까이 헤어져 살다가 다시 한 10년 같이 살다가 또 헤어졌으니.... 그래도 50년 넘게 만나지 못한 사람들도 많은데 뭐...”

선애 할머니는 그리움과 섭섭함을 감추려 했다. 개인의 마음을 애써 표현하지 않는 것이 동지로 만난 두 사람이 서로 사랑하는 방식이었고 시대가 강제한 요구였기도 했다.

할머니는 인터뷰 내내 정치 사회문제에 대해 해박함을 보여주었다. 개인적인 감정이나 가족사에는 말을 아낀 대신에 틈 날 때마다 통일을 강조하시곤 해서 처음에는 뜻밖의 생경함을 느끼기도 했다. 하지만 세월이 흘렀어도 변하지 않는 통일에 대한 열정과 어렵고도 긴 세월 동안의 오랜 바람에 잠시 숙연해지기도 했다.

인터뷰를 하던 선애 할머니 손에 이끌려 거실 벽에 걸린 액자 앞에 섰다. 금강산을 수놓은 액자였다.
“참 곱지? 금강산이 세계 명산 중에 하나라잖아. 여행 다녀온 사람이 선물로 준 거야.”

속내를 드러내지는 않았지만 왠지 더한 간절함이 느껴졌다. 지난 2월 말 각계 대표 400명이 역사적인 금강산 육로 관광길에 올랐었다. 두 할머니에게 금강산 육로 관광이 의미하는 것은 남달랐다. 분단의 역사와 함께 했던 비극의 가족사에 이별을 고하고 싶은 희망이기도 할 것이고, 평생을 걸고 싸워서 이루고자 했던 조국의 평화와 통일에 다가서는 작은 성과로 느낄 법도 하다.

세상은 그처럼 조금씩 변해가고 있다. 이 땅에서 다신 전쟁 같은 비극이 일어나선 안 되고 많은 사람들이 가족과 헤어지고 고통 받고 죽어간 역사를 되풀이해서도 안 된다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다. 그리고 지금 희선씨가 아버지와 함께 살지 못하듯 분단은 분단세대의 고통으로 끝나지 않고 있다.

할머니들 역시 남은 시간은 그리 많아 보이지 않았다. 금강산 육로관광길은 뚫렸다고 하지만 건강이 좋지 않으신 순애 할머니는 그마저 엄두가 나지 않는다는 표정이다. 대신 선애 할머니가 힘있게 말했다.
“우리 모두 금강산 육로관광 한번 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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