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대한민국의 '3대 영화제'는 청룡영화상과 대종상시상식, 그리고 백상예술대상을 꼽는다. 하지만 이 3대영화제 외에도 영화 감독조합에서 주최하는 디렉티스컷 어워즈와 평론가들이 주는 한국영화평론가협회상, 촬영감독협회에서 주최하는 황금촬영상, 독립영화협회에서 주최하는 올해의 독립영화상, 독립영화와 저예산 영화를 대상으로 하는 들꽃영화상 등 크고 작은 영화제들이 꾸준히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그리고 한 때 관객들의 많은 관심을 받았지만 현재는 아쉽게 폐지된 영화제도 있다. 대표적인 영화제가 MBC에서 개최했던 대한민국 영화대상이다. 2002년부터 2010년까지 8번(2009년 미개최)에 걸쳐 개최된 대한민국 영화대상은 한 때 종합예술 시상식인 백상예술대상을 제치고 3대 영화제에 포함될 정도로 빠르게 자리를 잡았다. 하지만 제작비 및 스폰서 문제를 해결하지 못해 2011년 아쉽게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말았다.

대한민국 영화대상에서는 2003년 <지구를 지켜라>의 장준환 감독과 2004년 <범죄의 재구성>의 최동훈 감독, 2008년 <추격자>의 나홍진 감독 등 오늘날 한국영화를 대표하는 감독들이 신인감독상을 수상하며 이름을 알린 바 있다. 그리고 지난 2002년 제1회 대한민국 영화대상에서는 한 여성감독이 이 영화를 통해 초대 신인감독상의 영예를 안았다. 갓 스무 살이 넘은 청춘 여성들의 방황을 다룬 정재은 감독의 <고양이를 부탁해>였다.
 
 <고양이를 부탁해>는 개봉 20주년이 된 2021년 4K 리마스터링 버전으로 재개봉했다.

<고양이를 부탁해>는 개봉 20주년이 된 2021년 4K 리마스터링 버전으로 재개봉했다. ⓒ (주)엣나인필름

   
여자들의 우정을 흥미롭게 다룬 한국영화

사실 <영웅본색>과 <좋은 친구들>,<친구>,<신세계> 등 남자들의 의리와 우정을 소재로 한 영화들은 꾸준히 만들어져 관객들에게 좋은 반응을 얻었다. 하지만 여성들의 우정을 소재로 한 영화는 리들리 스콧 감독의 <델마와 루이스> 정도를 제외하면 쉽게 떠오르지 않는 게 사실이다. 하지만 한국영화 중에도 여성들의 우정을 소재로 만들어 관객들의 좋은 반응을 얻었던 영화들이 없었던 게 아니다.

1995년에 개봉했던 이민용 감독의 <개 같은 날의 오후>는 무더운 여름날, 변두리 서민 아파트 여성들이 남자들을 피해 아파트 옥상에 모이면서 벌어지는 소동을 그린 블랙코미디영화다. 이들은 서로 친하게 지내기도 했고 일면식조차 없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같은 아파트에 사는 '여성'이라는 공통점을 통해 가까워졌다. 그렇게 서로의 사연을 공유하고 서로를 이해하게 된 여성들은 옥상에서 자신들을 무시했던 남자들과의 싸움을 이어간다.

2011년에 개봉해 736만 관객을 동원했던 강형철 감독의 <써니>는 여고를 주름잡던 7공주가 20년 후에 다시 만나 시한부가 된 리더의 소원을 들어주는 워맨스 드라마다(영화관입장권 통합전산망 기준). <써니>는 젊은 배우들이 나오는 1980년대와 중년 배우들이 등장하는 2010년대 이야기들을 교차해 보여주며 많은 웃음을 선사했고 세월의 흘러도 변하지 않은 7공주들의 우정과 의리를 통해 많은 관객들의 공감을 얻어냈다.

코로나가 한창이던 2020년 10월에 개봉해 전국 157만 관객으로 손익분기점을 넘기며 작은 이변을 일읕켰던 <삼진그룹 영어토익반>은 대기업 말단사원이 폐수방류를 목격하며 벌어지는 이야기를 담은 영화다. 각각 생산관리부와 마케팅부, 회계부에서 일하는 입사 8년 차 동기 여성 3명이 해고의 위협을 무릅쓰고 대기업인 회사에 맞서 정의롭게 싸우는 과정을 통해 평단은 물론이고 관객들에게도 좋은 평가를 받았다.

<이태원 클라쓰>와 <그 해 우리는>을 통해 스타배우로 도약한 김다미와 11일 현재 넷플릭스 월드랭킹 1위에 올라있는 드라마 <기생수: 더 그레이>의 주인공 전소니가 출연했던 <소울메이트>도 여성들의 우정을 그린 대표적인 영화다. 2016년에 만들어진 중국영화 <안녕, 나의 소울메이트>를 리메이크한 <소울메이트>는 전국 23만 관객에 그치며 흥행에는 실패했지만 둘도 없는 친구가 어른이 되면서 멀어지는 과정을 담담하게 그려냈다.

'도끼로 사람을 찍어도 믿는다'는 여자들의 우정
 
 고교시절 단짝이었던 5명의 친구들은 졸업 후 다른 삶을 살면서 미묘하게 사이가 멀어진다.

고교시절 단짝이었던 5명의 친구들은 졸업 후 다른 삶을 살면서 미묘하게 사이가 멀어진다. ⓒ (주)엣나인필름

 
2001년 가을부터 겨울까지 <조폭 마누라>와 <달마야 놀자>, <두사부일체>로 이어지는 '조폭 코미디'가 극장가를 지배하며 나란히 서울관객 100만을 넘기는 흥행돌풍을 일으켰다. 하지만 조폭 코미디가 크게 유행하면서 상대적으로 적은 제작비 때문에 유명배우들을 캐스팅할 수 없었던 작은 영화들은 스크린 확보와 흥행에 어려움을 겪을 수 밖에 없었다. <고양이를 부탁해> 역시 그런 작품들 중 하나였다.

<고양이를 부탁해>는 한국예술종합학교 연출제작과 출신의 정재은 감독의 장편 데뷔작이자 이요원과 배두나, 옥지영(개명 후 옥고운) 등 당시만 해도 신인에 가까웠던 배우들이 주연을 맡은 영화였다. 2001년 10월에 개봉한 <고양이를 부탁해>는 서울에서 2만4000명의 관객에 그치며 흥행에 실패했다. 하지만 이후 수 많은 영화제에서 각종 상을 휩쓸면서 <와이키키 브라더스> 등과 함께 관객들 사이에서 '재개봉 운동'이 벌어지기도 했다.

<고양이를 부탁해>는 고교 시절 단짝 친구였던 혜주(이요원 분), 태희(배두나 분), 지영(옥지영 분), 비류(이은실 분), 온조(이은주 분)가 학교를 졸업하고 서로 다른 삶을 살면서 겪게 되는 갈등과 방황, 화해를 그린 작품이다. 이야기 진행이 정적이고 관객들의 눈을 사로잡을 만한 극적인 사건도 일어나지 않기 때문에 다소 지루하게 느끼는 관객들도 적지 않았다. 하지만 배두나와 이요원의 신인시절을 보는 것만으로도 팬들에게는 매우 흥미로운 작품이다.

<고양이를 부탁해>에서는 혜주만 혼자 졸업 후 서울로 왔고 태희와 지영, 비류, 온조는 계속 인천에 사는 걸로 나온다. 실제 촬영 역시 인천에서 주로 이뤄졌는데 동인천역과 차이나타운, 월미도 등 인천사람이라면 한눈에 알아볼 수 있을 법한 인천의 유명한 장소들이 등장한다.

<고양이를 부탁해>로 국내외 4개 영화제에서 상을 받은 정재은 감독은 2005년 어그레시브 인라인 스케이팅을 소재로 한 차기작 <태풍태양>을 선보였다. 천정명과 김강우, 이천희, 조이진 등이 출연한 청춘 성장영화 <태풍태양>은 개봉 직전 준주연으로 출연한 김상혁이 음주운전 스캔들에 휘말리면서 전국관객 5만5000명에 그쳤다. <태풍태양> 이후 상업영화 연출이 뜸해진 정재은 감독은 2022년 다큐멘터리 영화 <고양이들의 아파트>를 연출했다.

청춘스타 배두나가 '배우'로 인정받은 영화
 
 배두나에게 <고양이를 부탁해>는 청춘스타에서 '배우'로 성장하는 계기였다.

배두나에게 <고양이를 부탁해>는 청춘스타에서 '배우'로 성장하는 계기였다. ⓒ (주)엣나인필름

 
이요원이 연기한 혜주는 상고를 졸업한 후 서울의 한 증권사에 입사해 바쁘게 살아가고 있다. 쇼핑이 취미이고 인천에 사는 친구 4명을 모두 서울로 불러낼 정도로 성공한 친구지만 회사 안에서는 선배들의 잔심부름을 소화하는 것만으로도 정신이 없다. 결국 혜주는 바쁜 생활을 이어가다가 고교시절 단짝친구였던 지영과 멀어졌고 회사에서도 학력을 이유로 자신보다 늦게 들어온 신입사원에게 기회를 빼앗긴다.

배두나가 연기한 태희는 고교 졸업 후 취업을 포기하고 아버지가 운영하는 찜질방에서 일을 도우며 살아가고 있다. 친구들 중 가장 밝고 오지랖도 넓은 태희는 지영이 무고하게 구치소에 들어갔을 때 "나는 네가 도끼로 사람을 찍어 죽였다고 해도 네 편이야"고 말할 정도로 친구를 믿어준다. 배두나는 <고양이를 부탁해>를 통해 2001년 여성 영화인의 밤 연기상과 2002년 백상예술대상 여자최우수연기상을 수상했다.

집안형편이 어려운 지영은 고교시절 단짝이었던 혜주가 졸업 후 서울 증권사에 취업한 것에 묘한 콤플렉스를 느끼며 혜주와 조금씩 멀어진다. 사고로 할머니까지 돌아가시고 혼자가 된 지영은 경찰조사에서 묵비권을 쓰면서 사고의 용의자로 의심 받지만 태희의 도움으로 구치소를 나와 태희와 함께 여행을 떠난다. 지영을 연기한 옥지영은 지난 2017년 옥고운으로 개명 후 드라마와 영화를 넘나들며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작년에 개봉했던 <노량: 죽음의 바다>에서 이순신 장군(김윤석 분)의 아내 방씨부인을 연기했던 문정희는 <고양이를 부탁해>에서 혜주가 다니는 증권사의 팀장으로 출연했다. 팀장은 일을 잘하는 혜주를 좋게 생각하지만 그녀가 고졸에 야간대학도 다니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된 후 다른 직원에게 기회를 준다. 팀장은 혜주에게 악의를 가진 인물은 아니지만 그 시대에 만연하던 '학벌지상주의'를 대변하는 캐릭터였다.
그시절우리가좋아했던영화 고양이를부탁해 정재은감독 배두나 이요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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