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영화 <패러다이스>는 '에온'이라는 생명공학회사가 개발한 DNA 매칭을 통해 수명을 사고파는 산업이 가능하게 된 미래상을 그리는 작품이다.

영화의 첫 장면은 18세 청년이 자기 부모의 압력(가정경제 문제)에 등떠밀려 '15년 수명 양도 계약서'에 싸인하는 상황이다. 이 계약을 성사시킨 주인공 '막스'는 의기양양하게 회사로 복귀해 우수직원상을 받는다. 그런데, 막스의 우수상 수상 장면 뒤로, '아담'이라는 수명 거래 반대 무장조직의 테러로 구매자들이 시술실 안팎에서 단체로 사망하는 사건이 이어진다. 오래 살아보겠다고 수명을 구입했는데 벌써 죽다니.   
 
바로 그 순간 관객들은 "아하!"하며 눈치채게 된다. 저 수명 구매자들이 사들인 수명의 본질이 '장수(長壽)'가 아니라는 사실을. 그들은 제 나이보다 훨씬 젊은 신체를 확인하는 바로 그 순간에 목숨을 잃었다. 늙고 부유한 '자칭 엘리트'들이 원한 것은 장수라기보다는 청춘이었다.
 
자본주의 체제의 작은 톱니바퀴 
 
 넷플릭스 영화 <패러다이스> 포스터.

넷플릭스 영화 <패러다이스> 포스터. ⓒ NETFLIX

 
방금 전 '에온'의 우수사원으로 뽑힌 막스가 아내 엘레나와 함께 처가를 방문한다.그런데 장인은 막스를, 젊음은 있지만 돈은 없는 사람들의 DNA를 강탈하는 사기꾼쯤으로 비꼰다. 부부는 집으로 돌아오며 장인의 언행을 주제로 말다툼을 벌이지만, 막스가 제시한 '자본주의 체제의 작은 톱니바퀴'라는 개념정의를 둘이 공유하면서 심플하게 화해한다. 어떤 업무든 열심히 일할 뿐인데, 그걸 나무라는 게 문제라는 식.
 
집 가까이 왔을 때 그들은 자기들의 집이 불타고 있는 걸 보게 된다. 안타깝게도 아직 집값을 다 지불하지 못한 상황이다. 그런 데다 몇 시간 전 부부가 외출하며 제대로 끄지 않은 것으로 추정되는 촛불에서 화재가 기인했다는 이야기까지 나오자 그들은 망연자실한다. 보험회사로부터 보상을 받을 수 없는 데다, 남은 집값 또한 즉시 납부해야 하는 참담한 현실이다. 그때 문득 상담직원이, 집 계약시 무심코 담보로 넣었던 엘레나의 수명 40년으로 집값 250만 유로(대략 36억 원)을 변제할 수 있기 때문에, 그것이 강제집행 들어갈 수 있다고 암시한다.  
 
아니나 다를까, 엘레나는 길거리에서 붙잡혀 '에온'으로 압송된다. 저당잡힌 담보물로서 엘레나는 곧바로 DNA 공여시술 절차에 들어간다. 한편 막스는 회사 대표 '조피'에게 그간의 자기 업적을 어필하며 도와달라고 호소하나, 하필 조피가 엘레나의 수명 구매자였기에 그녀에겐 도울 의지가  없다(영화 중반, 조피가 젊음을 양도받기 위해 일부러 방화했을 가능성이 암시되기까지 한다).
 
결국 엘레나는 조피에게 젊음을 넘겨주었다. 엘레나는 급속도로 늙어간다. 뱃속의 아기도 신체의 급격한 노화로 인해 유산된다. 엘레나는 체념한다. 반면 막스는 체념하지 않는다. 막스는 조피를 납치해 엘레나와 함께 DNA 민간불법 시술업자에게 가서 두 사람의 신체 상태를 다시 원래대로 뒤바꿔놓겠다는 목표를 세운다. 엘레나는 처음엔 막스에 동의하지 않지만, 막스가 납치해온 여성을 보고는 '해볼 만하다'는 정도로 마음이 변한다. '내 젊음을 가져가서 저 사람이 젊어졌구나' 생각한 것 같다. 막스와 엘레나 부부는 DNA 거래가 남들 문제 아닌 자기들 문제가 되자, '자본주의 체제의 작은 톱니바퀴'라는 심플한 수사(rhetoric)는 완전히 잊었다.
 
해피엔딩인 듯, 해피엔딩 아닌, 해피엔딩 같은     
 
그런데 아뿔싸! 문제가 생겼다. 막스가 치밀한 계획 하에 납치해온 젊은 여성이 조피가 아닌 것이다. 외부로 노출된 적 없는 조피의 딸(마리)이었다. 마리는 막스와 엘레나에게 자신이 조피가 아니라고 통사정하지만, 막스와 엘레나는 마리가 조피의 친딸인지라 (검사해볼 것도 없이) 엄마와 동일한 DNA를 보유했으리라는 점에 착안한다. 이 와중에 '아담' 소속 테러리스트들이 막스, 엘레나, 마리가 있는 곳에 들이닥친다. 물론 '에온' 측 경호팀도 막스 일행이 있는 곳으로 벌써 출동했다.
 
영화 말미, 딸을 찾으러 직접 달려온 조피와 막스의 대면협상은 불행하게도 결렬되고, 곧바로 '아담' 측과 '에온' 측이 서로 죽고 죽이는 살벌한 전쟁이 벌어진다. 얼마 뒤, 이 참혹한 전쟁터에서 가까스로 빠져나온 세 사람, 마리, 막스, 그리고 엘레나.
 
그들은 DNA 민간불법 시술업자가 알려준 비밀장소로 함께 출발한다. 그런데 막스의 마음이 바뀌었다. 마리의 젊음을 빼앗는 건 '못할짓'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 그 순간 엘레나의 마음도 이미 바뀐 상태다. 죄 없는 마리를 풀어주자 먼저 제안하기까지 했었던 엘레나였지만, 지금은 아니다. 젊음을 반드시 되찾아야겠다는 열망에 휩싸여있다. 엘레나는 막스가 마리를 풀어주자고 여러 번 권유하자, 막스를 길가에 버려두고, 자기가 직접 마리를 데리고 DNA 민간불법 시술업자와 약속된 비밀장소로 간다. 거기서 엘레나는 젊은 여인으로, 마리는 늙은 여인으로 변모한다. 이후, 막스도 변모한다. 무장조직 '아담'에서 활동하는 테러리스트가 된 것.
 
이제 해피엔딩인 듯, 해피엔딩 아닌, 해피엔딩 같은 엔딩이 펼쳐진다. 등장인물 누구도 맘놓고 행복을 누리는 게 아닌 '어두운' 엔딩이다. 그런데, 따져보면 이 작품은 그 같은 어두운 엔딩에 이를 수밖에 없었다. 이유는 하나로 추론된다. '패러다이스' 즉 낙원이라는 말이 얼른 '선(good)'을 떠올리게 하지만, 이 영화에 전적으로 선한 사람들이 나오지 않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사회적 기여도가 높은 엘리트들에게 수명을 선사하지만 과학과 재산과 권력을 총동원해 자기 욕심을 챙기는 조피는 선해 보이지 않는다. 엘레나는 점점 흑화되는 과정에서 마리에게 과도한 폭력을 행사하고 마침내 마리의 젊음을 갈취한다. 마리는 늙은 자신의 모습을 확인하며 DNA가 일치하는 엄마에게 수명기증 의지가 있는지 떠보는데 엄마는 다른 기증자를 찾아주겠다고 대답한다.

젊음 앞에서는 모녀관계도 부질없다. 막스는 이제까지는 '말'로 자신의 목표를 이루어왔지만, 이제부터는 '폭력'으로 자신의 목표를 이루려 할 것이다. 그렇다고, 이들 모두를 간단히 악한 사람으로 분류할 수도 없다. 각자 그럴 만한 이유가 있고, 전말을 따져보면 저마다 타당하고 논리적이다.

요컨대 이 영화는 정도 차이는 있지만 이야기의 흐름 속에서 '선'하지 않게 행동하는 사람들을 등장시켜, 그들이 그리 행동하게 된 인과관계를 보여준다. 결과적으로 '패러다이스'와 '선'의 밀접한 상관관계를 희망하는 일반적 정서에 잔잔한 균열을 일으키는 영화라고 말할 수 있겠다.

'선'을 '패러다이스'로부터 분리하는 작품, '패러다이스—선'의 환상적 관계를 깨트리는 작품, 일종의 쿨한 안티판타지 영화라고나 할까. 겸하여, 깊은 존재론적 질문까지 던져준다. 자연 상태의 인간에게 선한 패러다이스가 과연 선선히 주어질 수 있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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