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상업조직은 원료, 노동, 기계를 가장 싼 값에 모은 다음 그것을 결합하여 제품을 만들어 가능한 가장 높은 값으로 팔려고 한다.
(...중략...)
생산 라인 가동 비용이 엄청나게 비싸지면 가동을 중단하기도 하는데, 이때 기계는 자신의 불행한 운명을 한탄하지 않는다. 석탄 사용을 중단하고 천연가스를 사용해도 도태된 에너지 자원은 절벽에서 뛰어내리지 않는다. 그러나 노동자는 자신의 가격이나 존재를 줄이려는 시도에 감정으로 대응하는 습관이 있다. 노동자는 화장실에 들어가 흐느끼기도 하고, 실적 미달에 대한 두려움을 술로 달래기도 하며, 해고를 당하느니 차라리 죽음을 택하기도 한다. 

- 알랭 드 보통 <불안>, 141p
 
알랭 드 보통의 <불안>은 현대인이 삶 가운데 불안을 느끼는 이유, 나아가 지나칠 만큼 사회가 요구하는 가치, 즉 성공이며 부를 맹목적으로 추종하는 문제를 파헤친 흥미로운 저술이다. 방대한 지식과 인간에 대한 깊은 관심을 바탕으로 시대적 문제를 꿰뚫어낸 이 저작 가운데 몇몇 문장은 적어두고 수시로 다시 읽어야 할 만큼 깊은 지혜를 담고 있다 해도 좋겠다.
 
책은 다수 노동자를 고용하는 현대적 상업회사의 발전부터 고용된 노동자들의 필연적 불안까지를 역시 흥미롭게 서술한다. 위에 언급한 문장은 그 일부로, 저자는 회사의 해고결정과 그에 따른 노동자의 반응을 이야기한다. 특히 우울을 느끼고 알코올에 의존하며 극단적 선택까지 서슴지 않는다는 문장은 오늘날 노동자 해고 관련 문제가 속출하는 한국의 현실에도 남다른 감상을 안긴다.
 
재춘언니 포스터

▲ 재춘언니 포스터 ⓒ 부천노동영화제

 
지적인 시선이 닿지 않는 한국노동의 현실
 
보통의 뛰어난 통찰에도 불구하고, 그러나 나는 한 가지 지적을 하고 싶다. <불안>의 기업과 노동자에 대한 묘사 가운데 보통이 보지 못한, 혹은 놓치고 적지 못한 중요한 요소가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건 다름 아닌 현장이다. 실제 해고가 일어나는 노동현장의 현실을, 적어도 그가 익숙한 스위스나 프랑스, 영국이 아닌 한국의 현실을 그는 알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이 글을 적는 이유가 된 제10회 부천노동영화제 상영작 <재춘언니>가 기록한 이야기가 그 답이 되어줄 테다.
 
<재춘언니>는 제목 그대로 노동자 임재춘의 이야기다. 임재춘은 기타제조업체 콜트·콜텍에서 30년 동안 일한 노동자다. 한때 세계 판매량 1위를 기록할 만큼 널리 알려진 기타제조업체였던 콜트·콜텍이지만, 2007년 갑자기 대량 해고를 단행한다. 한순간 일자리를 잃은 노동자들은 복직투쟁에 나섰다. 한두 해면 나름의 성과를 보리란 기대는 어김없이 빗나간다. 법정투쟁은 대법원까지 이어졌고, 노사합의가 이뤄진 건 그로부터도 한참 후인 2019년 4월이 되어서였다. 무려 4464일의 투쟁, 콜트·콜텍은 그렇게 한국 최장기 노사분규 사업장이 되었다.
 
한국은 법치국가다. 시민의 권익을 침해하는 모든 사항은 법에 따라 행하여져야 한다. 그중에서도 노동자의 권익에 대해서는 근로기준법이 구체적으로 규율하고 있다. 해고도 마찬가지다. 콜트·콜텍의 정리해고는 근로기준법 제24조에 따른 것이다. 이 조항은 정리해고의 요건을 정하고 있는데, 그 조문은 '사용자가 경영상 이유에 의하여 근로자를 해고하려면 긴박한 경영상의 필요가 있어야 한다'는 내용이다.
 
재춘언니 스틸컷

▲ 재춘언니 스틸컷 ⓒ 부천노동영화제

 
한국 최장 노사분규 사업장 콜트·콜텍 이야기
 
업체는 당시 흑자를 내며 운영되던 중이었으므로 노동자들은 해고가 위법하다고 주장하며 투쟁을 시작했다. 설사 변화하는 시장환경으로 미래에 경영상의 이유가 따른다 할지라도 법이 정한 요건인 긴박한 경영상의 필요라고 볼 수 없다는 주장이다. <불안>의 저자 보통이 생각한 것과 달리, 노동자가 해고결정에 그저 습관처럼 감정적으로 대응하는 것이 아님을 이러한 실태가 증명한다.
 
공장, 노동자, 사업체를 제 소유물처럼 여기며 함부로 팔고 자르는 것이 당연하다 믿는 이들이 이 세상에는 너무나 많다. 고용유연화를 외치는 이들과 노동자의 권익을 이야기하는 이들이 첨예하게 맞서는 2023년이다. <재춘언니>가 그 완성도에도 불구하고 의미가 있는 이유가, <불안>의 편협한 문장을 바로잡아야 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우리의 세상은 우리가 싸우는 만큼 나아질 수 있으므로.
 
물론 아쉬운 점이 여럿이다. 이수정 감독의 97분짜리 다큐멘터리는 노동자들이 회사를 상대로 투쟁하는 과정을 마치 영화나 드라마의 메이킹 필름처럼 만들었다. 다분히 허술하고 맥락 없는 촬영이며 편집이 눈살을 찌푸리게 할 때도 없지 않다. 영화 속에선 내내 임재춘 형이라 불리던 그의 이름에 어째서 언니가 붙었는지도 전혀 설명되지 않는다. 감성에 호소하는 대목을 넘어 사안을 모르는 이를 이성적으로 설득하는 과정도 허약하다. 
 
재춘언니 스틸컷

▲ 재춘언니 스틸컷 ⓒ 부천노동영화제

 
농성 천막 안의 노랫소리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의 의미만큼은 절대로 없다고 할 수 없다. 임재춘과 같은 노동자들의 상황이, 또 그 투쟁과정의 절박함이 영화 안에 고스란히 담겼기 때문이다.
 
뿐인가. 투쟁 과정 또한 흥미롭다. 영화의 시작은 셰익스피어의 연극인데, 무대 위엔 기타 목을 검처럼 들고 맞서는 배우들이 섰다. 배우는 다름 아닌 재춘과 그 동료다. 이들이 햄릿과 레어티스가 되어 연기를 펼친다.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흥미로운 순간도 늘어간다. 투쟁 구호로 가득한 천막 안에서 재춘과 그 동료들은 노래를 부르고, 작곡을 하고, 가사를 쓴다. 때로는 니체의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낭독하며, <햄릿>을 준비하는 것이다.
 
부당해고에 반발하며 대법원 앞에서, 옛 공장부지 앞에서, 그야말로 곳곳을 떠돌며 시위하는 이들이 투쟁의 수단으로 예술을 꺼내는 모습이 적잖이 인상적이다. 노동자의 복직투쟁이 거친 몸싸움쯤으로 비춰지곤 하는 부당한 편견에 반박이라도 하듯이 예술로써 싸움을 벌이는 것이다.
 
재춘언니 스틸컷

▲ 재춘언니 스틸컷 ⓒ 부천노동영화제

 
불안 너머에 답이 있다
 
싸움이 길어질수록 나가떨어지는 사람들이 적잖다. 도망친다는 표현이 영화 안에 수차례씩 등장한다. 왜 아닐까. 12년이란 세월은 검은 머리 위에 허연 서리를 내리기 충분하다. 강산이 바뀌고 청춘이 떠나가는 길고 긴 시간을 건너 세상이 돌아보지 않는 싸움을 하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알랭 드 보통처럼 이를 감정에 따른 비합리적 결정으로 이해하는 이도 없지는 않겠으나, 누군가는 부당한 결정에 맞서 삶의 의미를 되찾고 자긍심을 지키기 위한 투쟁으로 이해할 수도 있을 것이다. 때로는 인생을 걸고 열세일 밖에 없는 싸움에 나서는 이도 있는 것이다. 돌아보면 역사란 그런 이들이 바꿔온 것은 아닌가 싶어진다.
 
임재춘 노동자는 2022년 겨울 세상을 떠났다. 생의 끄트머리에서 무려 13년 동안 천막농성을 했던 시간의 영향이 없지 않았을 것이다. 두 딸의 아버지로서 일자리를 잃고 떠날 수도, 기약도 없는 싸움에 내몰린 마음이 어떤 것이었을지 짐작하기조차 어렵다. 그러나 그는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고, 성취를 거두었다. 그처럼 어렵고 고단한 삶을 지탱하는 이들에게 그가 걸어낸 길이, 얻어낸 성과가 하나의 지표가 되었을 게 분명하다.
 
노동은 여전히 뜨거운 감자다. 현 정부 출범 이래 노동개혁을 핵심 정책과제로 꺼내들더니 노조를 상대로 한 공세 또한 멈추지 않고 있다. 유연성이란 허울 좋은 말 아래 임재춘과 같은 노동자들이 열악한 싸움터로 내몰릴 광경이 선하다. 한편에선 국민을 분노케 하는 50억 클럽과 같은 기득권층의 부패가 도를 넘어서고 있다. 공공의 칼날을 쥔 자들이 노동자를 적으로 돌리고 껴안는 것이 무엇인지 직시해야 한다. 우리의 시대는 알랭 드 보통이 지적한 '불안'을 넘어서 '분노'해야 하는 때가 아닌가.
덧붙이는 글 김성호 평론가의 얼룩소(https://alook.so/users/LZt0JM)에도 함께 실립니다. '김성호의 씨네만세'를 검색하면 더 많은 글을 만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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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평론가.기자.글쟁이. 인간은 존엄하고 역사는 진보한다는 믿음을 간직한 사람이고자 합니다. / 인스타 @blly_kim / 기고청탁은 goldstarsky@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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