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9일 개봉한 영화 <콘크리트 유토피아>는 개봉 후 2주 동안 국내 박스오피스 1위 자리를 지키던<밀수>를 제치고 박스오피스 1위로 등장해 일주일 만에 전국 200만 관객을 돌파했다(영화관입장권 통합전산망 기준). 이병헌과 박서준, 박보영 등 스타배우들이 대거 출연하는 <콘크리트 유토피아>는 지난 2013년 독립영화 <잉투기>로 주목 받았던 엄태화 감독이 200억 원이 넘는 제작비를 지원 받아 만든 영화다.

사실 엄태화 감독 외에도 독립영화로 영화계의 유망주로 떠올랐다가 상업영화 감독으로 자리를 잡는 감독들이 적지 않다. 현재 <콘크리트 유토피아>와 여름흥행시장을 이끌고 있는 <밀수>의 류승완 감독을 비롯해 작년 넷플릭스 드라마 <수리남>을 통해 건재한 연출력을 과시했던 윤종빈 감독, <벌새>로 국내외 영화제를 휩쓸고 현재 SF소설을 영화화한 신작 <스펙트럼>을 준비하고 있는 김보라 감독 등이 대표적이다. 

반면에 독립영화를 통해 엄청난 주목을 받았음에도 상업영화에서는 아직 크게 빛을 보지 못한 감독들도 적지 않다. 아무래도 상대적으로 흥행에 대한 부담이 덜한 독립영화를 연출할 때와 거액이 투입된 상업영화를 연출할 때는 그 부담의 크기가 다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는 지난 2013년 부산국제영화제를 통해 상영되며 관객들을 큰 충격에 빠트렸던 독립영화 <한공주>를 만들었던 이수진 감독도 마찬가지였다.
 
 <한공주>는 지난 2004년 모 지역에서 있었던 실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독립영화다.

<한공주>는 지난 2004년 모 지역에서 있었던 실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독립영화다. ⓒ CGV아트하우스

 
멜로와 스릴러, 드라마 다 되는 30대 여성배우

1987년 경기도 이천에서 태어난 천우희는 초등학생 시절 반장을 도맡아 했고 중학교 때도 전교부회장을 맡았을 정도로 교우관계가 좋고 공부도 잘하는 학생이었다. 고교 진학 후 연극반 활동을 하면서 자연스레 연기에 관심을 갖게 된 천우희는 2004년 영화 <신부수업>에서 단역으로 출연하면서 영화에 데뷔했다. 천우희는 대학에서도 연기를 전공하며 본격적으로 배우의 꿈을 키웠다.

2009년 봉준호 감독의 <마더>에서 진구가 연기한 진태의 여자친구로 출연한 천우희는 2011년 영화 <써니>에서 속칭 '본드녀' 이상미 역을 맡아 엄청난 존재감을 과시했다. <써니>는 심은경과 강소라,민효린을 비롯한 '7공주' 멤버들이 주인공이지만 영화에서 관객들에게 가장 강렬한 인상을 남긴 배우는 단연 상미를 연기했던 천우희였다. 천우희는 2013년 <우아한 거짓말>에서 만지(고아성 분)의 친구 미란을 연기했다.

그렇게 한국영화의 유망주로 성장하던 천우희는 2013년 조금 뜻밖의 선택을 했다. 바로 주연 데뷔작으로 누구도 주목하지 않았던 독립영화 <한공주>를 선택한 것이다. 모두가 의외의 선택이라고 했지만 천우희는 <한공주>에서 뛰어난 연기를 선보이며 2014년 청룡영화상에서 여우주연상을 수상하는 쾌거를 달성했다. 당시 여우주연상 후보가 김희애, 전도연, 손예진, 심은경이었음을 고려하면 천우희의 수상은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대이변'이었다.

천우희는 <한공주> 이후에도 2014년 비정규직의 이야기를 다룬 <카트>에 출연했고 2016년에는 나홍진 감독의 세 번째 장편영화 <곡성>에서 연쇄살인사건현장에 소리소문 없이 나타나는 미스터리한 여성 무명을 연기했다. 2017년 고 김주혁의 유작이 된 <아르곤>을 통해 드라마에서 첫 주연을 맡은 천우희는 2019년 <극한직업>의 이병헌 감독이 연출과 각본을 맡은 드라마 <멜로가 체질>에서 또 한 번 좋은 연기를 선보였다.

사실 천우희는 <우상>이 18만, <비와 당신의 이야기>가 39만, <앵커>가 17만 관객에 그쳤을 정도로 흥행성적이 좋은 배우라고 할 수는 없다. 하지만 천우희는 2011년 <써니>로 주목 받은 후 연기공백이 거의 없을 정도로 부지런히 활동하는 배우다. 지난 2월 넥플릭스 영화 <스마트폰을 떨어뜨렸을 뿐인데>를 선보인 천우희는 작년 말 드라마 <머니게임> 촬영을 마쳤고 현재는 장기용과 함께 드라마 <히어로는 아닙니다만>을 촬영하고 있다.

실화를 바탕으로 만든 독립영화
 
 천우희는 첫 주연작이었던 <한공주>를 통해 청룡영화상 여우주연상을 수상하는 대이변을 일으켰다.

천우희는 첫 주연작이었던 <한공주>를 통해 청룡영화상 여우주연상을 수상하는 대이변을 일으켰다. ⓒ CGV아트하우스

 
최근엔 개념이 다소 넓어졌지만 독립영화는 전문 제작사와 투자사의 지원을 받지 않고 만드는 영화를 뜻한다. 독립영화는 제작비가 적게 들어가기 때문에 흥행에 대한 부담 없이 감독이 다양한 예술적 시도를 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반면에 전문배급사를 통한 대규모의 상영관 확보는 기대하기 힘들다. <한공주> 역시 크지 않은 규모로 개봉했지만 전국 22만 관객을 모으며 독립영화 중에서는 흥행에서도 상당히 좋은 성과를 거뒀다.

영화 <한공주>는 지난 2004년 모 지역에서 있었던 집단 성폭행 사건을 모티브로 만들어진 영화다. 남고생 44명(검찰로 송치된 가해자수)이 여중생 한 명을 1년 동안 집단으로 성폭행했던 끔찍한 사건으로 이수진 감독(다소 여성스런 이름을 가지고 있지만 남성감독이다)에 의해 2013년 일부 각색된 채로 영화화됐다. 하지만 영화에서 공주(천우희 분)가 겪은 고통 중 상당 부분은 실제 피해자가 직접 겪었던 일이다.

이수진 감독이 <한공주>를 통해 이야기하고 싶었던 부분은 바로 피해자에 대한 '2차 가해'였다. 실제로 영화 속에서 공주는 음악을 좋아하면서도 자신의 얼굴이 세상에 알려지는 것을 극도로 꺼렸다. 기타를 치며 노래를 부르는 자신의 모습을 카메라로 촬영한 친구에게 지나칠 정도로 화를 내기도 했고 친구들이 오디션에 합격한 공주를 위해 깜짝 선물로 팬카페를 개설했을 때도 당장 삭제하라며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였다. 

이는 자신의 존재가 가해자 부모들을 비롯해 세상에 알려지는 것을 막기 위한 공주의 '자기방어'였다. 결국 팬카페를 보고 공주의 존재를 알게 된 가해자 가족들은 공주가 전학 간 학교의 교실로 찾아와 마치 공주가 가해자인 것처럼 원망의 소리를 쏟아냈다. 결과적으로 이 사건이 공주가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 이는 실제 사건에서도 가해자 가족들이 신원이 노출됐던 피해자에게 저질렀던 '2차 가해'였다. 

<한공주>를 통해 8개의 영화제에서 무려 11개의 상을 휩쓸며 천우희 이상으로 많은 주목을 받은 이수진 감독은 지난 2019년 100억 원에 가까운 많은 제작비가 투입된 첫 번째 상업영화 <우상>을 선보였다. <우상>은 <한공주>의 주인공 천우희와 90년대 중·후반과 2000년대 초·중반 한국영화를 이끌었던 한석규와 설경구가 출연했다. 하지만 이수진 감독의 첫 상업영화 <우상>은 전국 18만 관객에 그치며 흥행 참패했다.

공주에게 따뜻하게 다가온 친구 
 
 정인선이 연기한 은희는 전학 온 공주에게 유일하게 따뜻하게 다가온 친구였다.

정인선이 연기한 은희는 전학 온 공주에게 유일하게 따뜻하게 다가온 친구였다. ⓒ CGV아트하우스

 
큰 상처를 안고 새 학교로 전학을 온 공주는 새 학교에서도 적응을 하지 못하고 아웃사이더로 지냈는데 우연히 공주의 노래 소리를 들은 다정한 성격의 '인싸' 은희가 공주에게 말을 걸며 다가왔다. 처음엔 은희를 경계하며 쌀쌀맞게 굴던 공주도 점점 은희에게 마음을 열며 은희가 속한 아카펠라 그룹에도 가입했다. 하지만 은희 역시 가해자 가족이 찾아온 후 공주의 과거를 알게 되고 공주의 동영상을 본 후 큰 충격에 빠진다.

어쩌면 공주에겐 유일한 친구였던 은희를 연기한 배우는 봉준호 감독의 <살인의 추억>에서 엔딩 여자아이를 연기했던 정인선이었다. 구김살 없는 밝은 성격의 소유자인 은희는 공주가 과거의 상처를 잊고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 있도록 큰 도움을 준 좋은 친구지만 공주가 겪었던 끔찍한 과거를 알게 된 후엔 다른 친구들과 크게 다르지 않은 반응을 보였다.

한공주는 제작비가 적게 들어간 독립영화인 만큼 조연캐스팅에도 그리 많은 투자를 할 수 없었다. 따라서 <한공주>에는 관객들에게 익숙한 배우들이 많이 나오지 않는다. 특히 공주의 가장 친한 친구이자 공주가 겪은 비극의 원인제공자이기도 한 전화옥 역의 채소영은 공개된 필모그래피가 <한공주> 한 작품일 정도로 활동이 짧았다. 공주 아빠 역의 유승목과 조여사 역의 이영란 정도가 그나마 관객들에게 익숙한 얼굴이었다.
그 시절, 우리가 좋아했던 영화 한공주 이수진 감독 천우희 정인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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