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장 종이 위에 세계의 운명이 놓인 순간이 있었다. 알버트 아인슈타인과 로버트 오펜하이머가 만난 어느 날도 그랬다. 물리학자라는 점 말고는 공통점을 찾을 수 없는, 동료라기보다는 학술적 반대자에 가까웠던 둘의 만남은 그만큼 중요한 일이 벌어지고 있음을 시사했다.
 
오펜하이머는 아인슈타인에게 종이 한 장을 건넨다. 거기엔 복잡한 계산식이 적혀있다. 아인슈타인이 묻는다. 이걸 누가 계산했소? 오펜하이머가 한 학자의 이름을 댄다. 그리고는 아인슈타인에게 보아주겠느냐 묻는다. 원자가 쪼개지며 나오는 엄청난 힘, 그로부터 생겨나는 거대한 폭발 뒤로 끊이지 않는 연쇄적인 폭발이 이어질 수도 있음을 그는 우려하고 있다. 그가 이끌던 맨해튼 프로젝트의 한 연구자가 그와 같은 계산을 내어놓았던 것이다.

어쩌면 핵폭탄은 인간의 예상보다 훨씬 더 위험할 수 있는 것이고, 오펜하이머와 같은 걸출한 학자조차도 그 결과를 장담하지 못하는 일이다.
 
오펜하이머 포스터

▲ 오펜하이머 포스터 ⓒ 유니버설 픽쳐스

 
전란의 시대에 찾아온 신의 힘
 
때는 바야흐로 전란의 시대였다. 1941년 미국이 참전하기까지 유럽은 거듭된 전쟁 가운데 놓여 있었다. 1차 대전과 스페인내전, 나치의 등장과 2차 대전 발발은 인류의 미래가 장밋빛보다는 핏빛에 가까우리라는 비관에 힘을 실었다. 지난 수세기 간 이어진 인간이성에 대한 믿음은 파시즘과 군국주의에 밀려 낭떠러지로 떨어지기 직전이었다. 나치독일과 일제가 수세에 몰릴수록 전역은 넓어지고 전황 또한 급박해졌다. 한쪽이 파멸하기 전엔 멈추지 않을 듯한 극단적인 국면이었다.
 
그 시기 과학은 새로운 영역에 접어들었다. 세상을 이루는 기본단위이자 완전체 그 자체라고 여겨졌던 원자가 쪼개질 수 있음이 밝혀진 것이다. 이발소에서 머리카락을 자르다 뛰쳐나온 제자는 그대로 오펜하이머(킬리언 머피 분)를 찾는다. 제자가 들고 온 신문엔 오펜하이머조차 믿지 못할 소식이 담겨 있다. 1938년 핵분열 실험의 성공 얘기로, 천하의 오펜하이머조차 "이건 불가능해"하는 말을 연발한다. 그러나 가능한 일이었고, 그들이 원하든 원치 않던 간에 세상은 새로운 장으로 접어든 것이다. 오펜하이머는 말한다. 이 소식으로부터 모든 물리학자가 같은 생각을 하리라고 말이다. 바로 폭탄이다.
 
영화 <오펜하이머>를 깊이 이해하기 위해선 몇 가지 사전지식이 필요하다. 1938년 독일에서 이뤄진 실험은 우라늄 원자가 쪼개지며 막대한 에너지가 방출되는 현상을 확인했다. 질량이 에너지로 바뀔 수 있음을 입증한 아인슈타인의 이론으로부터 실제 핵분열과 에너지 방출을 확인하기까지는 그리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남은 건 에너지를 활용하는 것이었다. 그 에너지는 이제껏 인류가 다뤄온 것과는 차원이 다를 터였다.
 
오펜하이머 스틸컷

▲ 오펜하이머 스틸컷 ⓒ 유니버설 픽쳐스

 
신무기 개발에 매달린 천재 물리학자
 
이 실험으로부터 모든 물리학자가 폭탄을 떠올리게 되는 건 그들이 살고 있던 시대 때문이다. 실험이 있기 2년 전인 1936년은 세계사적으로 특별한 해다. 1차 대전 이후 적어도 표면상으론 억제돼 있던 전쟁의 위협이 머리를 치켜든 것이다. 데인 이가 불을 보듯, 전쟁을 생생히 기억하는 유럽이 패닉에 빠진 것도 당연한 일이다. 이 해 동안 스페인 내전이 발발하고 나치 독일이 발톱을 내밀었다. 이듬해엔 중일전쟁과 난징대학살이, 다시 다음해엔 독일이 주변국을 병합하며 본격적인 전쟁 준비에 돌입한다. 원자가 쪼개지고 신의 힘이 인간에게 올 수 있음을 깨달은 1938년, 눈 밝은 이들은 또 한 번의 세계대전이 코앞으로 다가왔음을 느낀다.
 
유대인이며 그 당시 많은 지식인이 그러했듯 공산주의에 호감을 가지고 있던 천재 물리학자 오펜하이머에게 그로브스 대령(멧 데이먼 분)이 찾아온 것도 그 즈음이었다. 군의 신임을 받는 그로브스 대령은 맨해튼 프로젝트의 책임자를 찾던 중으로, 당대 최고 중 하나인 오펜하이머가 그의 눈에 띈 것이다. 핵분열이 가능하단 사실이 확인된 이상 원자폭탄의 발명도 시간문제다. 중요한 건 나치가 먼저냐, 연합군이 먼저냐의 문제뿐이란 데 둘은 뜻을 같이한다. 그렇게 맨해튼 프로젝트가 돛을 올린다.
 
전반부는 그로브스 대령과 오펜하이머가 주변 과학자를 섭외해 엄청난 신무기를 개발하기까지의 과정을 흥미롭게 그린다. 미래를 내다볼 여유도 없이, 어떻게든 진행해야 했던 수많은 실험과 갈등, 필연적인 시행착오가 잘 알려진 것처럼 차근차근 진행된다. 결국 오펜하이머는 나치보다 빨리 원자폭탄을 개발하고, 그 폭탄은 서울과 부산 거리만큼 한반도로부터 떨어진 두 지역에 하나씩 떨어진다. 그렇게 2차 대전은 막을 내린다.
 
오펜하이머 스틸컷

▲ 오펜하이머 스틸컷 ⓒ 유니버설 픽쳐스

 
이 과학자의 알려지지 않은 뒷이야기
 
후반부는 전반부와는 전혀 다른 이야기로 채워진다. 누군가에게 이 이야기는 전반부만큼, 어쩌면 그보다도 흥미로울 것이다. 이전엔 알지 못했던 이야기가 본격적으로 펼쳐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어쩌면 이것이야말로 놀란이 굳이 이 이야기를 영화화한 이유일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오펜하이머는 원자력에너지위원회의 청문회 자리에 나와 있다. 수소폭탄 개발을 반대하는 오펜하이머의 애국심을 조사하겠다는 게 그 이유다. FBI가 불법도청한 자료를 근거로 청문위원들은 오펜하이머를 몰아붙이고 출두한 증인들은 그를 매도하기에 바쁘다. 그는 국가기관에서 근무하기 위해 필요한 보안허가를 마침내 박탈당한다.
 
크리스토퍼 놀란의 첫 전기영화인 <오펜하이머>는 널리 알려진 사실과 그 사실 뒤에 숨은 어느 진실을 은근하면서 분명하게 내보인다. 저 유명한 트리니티 실험을 영화의 중간 즈음에 배치한 것은 원자폭탄의 발명과 그로부터 이어진 윤리적 쟁점이 영화의 유일한 관심이 아님을 드러낸다. 놀란이 더욱 집중한 것은 인류에게 금지된 것을 가져다 준 과학자가 겪게 되는 고통이며, 그 과정에 대응하는 그와 그 주변인들의 자세다.
 
오펜하이머 스틸컷

▲ 오펜하이머 스틸컷 ⓒ 유니버설 픽쳐스

 
나가사키와 히로시마의 비극을 기억하며
 
도입부는 저 유명한 신화 속 이야기로부터 시작된다. 인간에게 신의 불을 가져다 준 프로메테우스가 독수리에게 간을 쪼아먹히는 형벌을 당하는 이야기다. 오펜하이머의 운명이 꼭 그와 같아, 그는 훗날 저의 애국심이며 전쟁을 억제하고자 했던 진의를 인정받기까지 아주 오랫동안 온갖 오명과 수치를 감내해야만 했던 것이다. 영화 속 그의 매혹적인 아내 키티(에밀리 블런트 분)가 말한 것처럼 그는 그를 감당하는 것이 제게 주어진 처벌이라 여겼는지도 모르겠다.
 
<오펜하이머>는 천재적이며 오만하고 순진했던 과학자의 이야기다. 그는 전쟁과 패배를 두려워하여 이제껏 없었던 무기를 만드는 데 정성을 쏟는다. 그러나 그 무기는 죄책감 없는 자들의 손에 들려 수십만의 생명을 앗아가고 만다. 청년시절 교수의 책상에 두었던 독사과를 겨우 쳐냈던 오펜하이머는, 제가 만든 폭탄이 사람들 머리 위로 떨어지는 걸 끝내 막지 못한다.

무기의 존재는 더욱 강한 무기의 개발로 이어진다. 하나의 폭발이 끊이지 않는 또 다른 폭발을 이끄는 것이다. 한 편의 전기영화가 마치 공포영화처럼 보이는 건 우리가 사는 세상이 오펜하이머의 폭탄과 그 연쇄 폭발로부터 여적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절망하는 오펜하이머의 앞에서 아무것도 모르고 환호하던 군중들처럼, 우리는 우리 앞에 펼쳐진 절망과 공포를 보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오펜하이머 스틸컷

▲ 오펜하이머 스틸컷 ⓒ 유니버설 픽쳐스

 
덧붙이는 글 김성호 평론가의 얼룩소(https://alook.so/users/LZt0JM)에도 함께 실립니다. '김성호의 씨네만세'를 검색하면 더 많은 글을 만날 수 있습니다.
오펜하이머 유니버설 픽쳐스 크리스토퍼 놀란 킬리언 머피 김성호의 씨네만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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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평론가.기자.글쟁이. 인간은 존엄하고 역사는 진보한다는 믿음을 간직한 사람이고자 합니다. / 인스타 @blly_kim / 기고청탁은 goldstarsky@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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