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쓴 소설이 영상매체로 다시 태어나는 일은 작가에게 대단한 영광일 밖에 없다. 그것은 작품이 활자를 넘어 생명력을 가질 수 있음을 인정받는 일이며, 소설로는 가 닿지 못할 많은 관객과 새로이 만날 기회이기 때문이다. 특히 영화화된 작품이 원작의 명성을 해치지 않고, 심지어는 나름의 성취를 이룬다면 원작가에게 그만한 기쁨도 흔치 않은 일이 될 테다.
 
지난 13일 세상을 떠난 작가 코맥 매카시는 이 같은 영광을 누린 그리 많지 않은 작가 가운데 하나다. 코엔 형제의 대표작으로 원작의 가능성을 스크린 위에 한껏 구현해냈다는 평을 들은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또 매카시에게 퓰리처상의 영광을 안긴 <더 로드>까지 두 편의 작품이 연달아 성공을 거둔 것이다.

영화로선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가 훨씬 좋은 평가를 받긴 하였으나 <더 로드> 또한 묵시록적 세계관을 가진 영화를 논할 때 빠지지 않고 언급될 만큼 인상적인 작품이 되었다.
 
더 로드 포스터

▲ 더 로드 포스터 ⓒ SK플래닛

 
매카시가 천착한 인간다움에 대한 이야기
 
<더 로드>는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등과 마찬가지로 매카시가 천착한 메시지를 진하게 구현해낸 작품이다. 늘 무언가의 경계, 혹은 부서지고 무너져 내리는 것들 가운데 귀한 것을 위해 싸우는 인간을 그려내는 그의 이야기가 단순하면서도 선명하게 반영된 작품이라 하겠다.
 
때는 가까운 미래, 북아메리카 대륙에 사는 아버지와 아들의 이야기다. 그들이 숨 쉬는 땅은 분명 미국의 영토지만 이제는 미국이라 부를 수도 없는 무엇이 된 지 오래다. 말하자면 온 세상이 불타 파괴되고 잿가루만 날리는 이 땅에서 치안이며 공권력이며 공적 서비스따윈 모두 사라져버린 것이다.
 
무엇도 남지 않은 황폐한 세상 가운데 아버지(비고 모텐슨 분)는 홀로 아들(코디 스미스 맥피 분)을 건사한다. 한때는 임신한 아내와 행복한 미래를 그렸을 그이지만, 남은 건 어린 아들과 당장 내일 먹을 것도 구하기 어려운 척박한 세상뿐이다. 이들은 더 따뜻하리란 기대를 품고 무작정 남쪽으로 향하는데, 그 과정에서 수많은 어려움과 위협을 마주한다.
 
더 로드 스틸컷

▲ 더 로드 스틸컷 ⓒ SK플래닛

 
인간 이하이길 강요하는 세상에서 살아남기
 
황폐한 세상한 인간에게 인간 이하이길 강요한다. 그리하여 세상엔 다른 사람의 물건이며 먹거리를 빼앗는 이들이 넘쳐난다. 그뿐이면 다행한 일, 심지어는 사람을 사냥하여 그 살점을 뜯는 이들도 적지 않다. 음식을 구할 길 없는 세상에서 남은 식량을 죄다 끌어 모아 남으로 향하는 아버지와 아들에게 그들을 노리는 폭력배며 부랑자의 위협은 당면한 문제로 다가온다.
 
영화는 매우 단선적이고 선명하다. 부자는 거듭 남으로 걸어가고 그 과정에서 몇 개의 어려움을 마주한다. 폐병을 앓는 아버지는 남은 날이 많지 않고, 그 때까지 제 아들에게 살아가는 법을 가르치려 분투한다. 희망이 없는 세상, 스스로 목숨을 끊는 자들이 넘쳐나는 이 땅에서 아버지를 지탱하는 건 오로지 제 곁에 있는 자식 뿐이다.
 
매카시는 이 작품을 통하여 황량하고 척박한 세상에서 그럼에도 횃불을 들어올리는 인간의 의지를 그린다. 어찌하여 누구는 남의 살을 뜯고, 또 다른 누구는 다른 이를 위하여 위험을 감수하는지를 그려내는 것이다. 영화의 이 같은 관심은 어느날 밤 아버지와 아들이 나눈 짧은 대화를 통하여 형상화되는데, 다음과 같다.
 
더 로드 스틸컷

▲ 더 로드 스틸컷 ⓒ SK플래닛

 
끝까지 불씨를 꺼뜨려선 안 된다고
 
모닥불 앞에서 아버지가 말한다.
"불씨를 꺼뜨려선 안 돼."
 
아들이 답한다.
"어느 불씨요?"
 
다시 아버지가 말한다.
"네 가슴 속에 있는 그 불씨 말이야."
 
아버지가 말한 불씨는 곧 아이에게 세상을 바라보는 기준이 된다. 그에게 세상은 불씨를 가진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 어떠한 상황에서도 인간다움을 지켜내는 선한 자와 그렇지 못한 악한 자로 나뉘게 되는 것이다.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를 통하여 운명처럼 닥쳐오는 재난이며 불행 가운데서도 어떻게든 제가 지켜야 할 것을 지키려는 이들의 모습을 그린 매카시다. 그때는 당해낼 수 없는 사이코패스 킬러였던 재앙은 이제는 온 지구를 불태우는 천재지변이 되었으나, 사람이 할 일은 그때나 지금이나 불씨를 지키고 횃불을 들어올리는 것임을 매카시는 절실하게 이야기하려 한다.
 
세상엔 아주 많은 작가들이 있으나 인간답기 어려운 순간까지 인간다워야만 한다고 목놓아 이야기하는 작가는 그리 많지만은 않다. 매카시의 부고가 더욱 안타깝게 다가오는 건 가슴에 불씨를 간직한 인간의 상실이란 언제나 괴로울 밖에 없는 탓이다.
 
더 로드 스틸컷

▲ 더 로드 스틸컷 ⓒ SK플래닛

 
덧붙이는 글 김성호 평론가의 얼룩소(https://alook.so/users/LZt0JM)에도 함께 실립니다. '김성호의 씨네만세'를 검색하면 더 많은 글을 만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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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평론가.기자.글쟁이. 인간은 존엄하고 역사는 진보한다는 믿음을 간직한 사람이고자 합니다. / 인스타 @blly_kim / 기고청탁은 goldstarsky@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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