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캘리포니아 주지사였던 아놀드 슈왈제네거는 전성기 시절 할리우드의 대표적인 '힘 캐릭터'였다. 배우 데뷔 전, 세계 최고의 보디빌더로 이름을 날렸던 슈왈제네거는 <코만도>와 <터미네이터> <프레데터> 등 여러 액션영화들에 출연하며 영화 속에서 엄청난 힘을 과시했다. 사실 슈왈제네거가 그 엄청난 근육을 가지고 힘이 약한 캐릭터를 연기한다면 관객들의 동의를 구하기 힘들 것이다.

아놀드 슈왈제네거의 뒤를 이어 2000년대부터 할리우드를 대표하는 '힘 캐릭터'로 명성을 날린 배우는 프로레슬러 출신의 '더 락' 드웨인 존슨이었다. 프로레슬러 시절 WWE의 가장 터프한 시대에서 최고의 스타로 군림하던 드웨인 존슨은 배우 전향 후 또 한 번 근육량을 늘려 할리우드에서 독보적인 '힘 캐릭터'로 자리를 잡았다. 드웨인 존슨은 2019년과 2020년 할리우드에서 가장 많은 수입을 올린 배우로 선정되기도 했다.

할리우드의 '힘 캐릭터' 계보가 아놀드 슈왈제네거와 드웨인 존슨으로 이어졌다면 한국영화의 힘 캐릭터는 역시 이 배우가 가장 먼저 떠오른다. 바로 맨손으로 좀비를 때려잡고 무시무시한 범죄자를 어린 아이 다루듯 두들겨 패는 마동석이 그 주인공이다. 심지어 마블 히어로 영화 <이터널스>에서도 힘을 앞세운 길가메시를 연기했던 마동석이지만 유독 윤종빈 감독의 <범죄와의 전쟁: 나쁜 놈들 전성시대>에서는 허세만 가득한 약한 캐릭터로 출연했다.
 
 <범죄와의 전쟁>은 청소년 관람불가 등급임에도 470만 관객을 동원하며 큰 사랑을 받았다.

<범죄와의 전쟁>은 청소년 관람불가 등급임에도 470만 관객을 동원하며 큰 사랑을 받았다. ⓒ (주)쇼박스

 
배우가 곧 장르가 된 'K-파워'의 상징

한국에서 태어나고 자랐다가 1989년 미국으로 이민을 간 마동석은 전 UFC 챔피언 마크 콜먼의 개인 트레이너로 활동하다가 서른이 넘은 나이에 한국으로 돌아와 배우 생활을 시작했다. 2004년 영화 <바람의 전설>로 데뷔한 마동석은 2005년 <천군>에서 북한군을 연기했다. 그리고 2007년에는 윤종빈 감독의 상업영화 데뷔작 <비스티 보이즈>에서 하정우를 벌벌 떨게 만드는 사채업자 역으로 관객들에게 강한 인상을 남겼다.

이후 <좋은 놈,나쁜 놈,이상한 놈> <부당거래> <퀵> <통증> 등을 통해 관객들에게 '강한 남성'의 이미지를 굳혀 가던 마동석은 2011년 윤종빈 감독의 차기작 <범죄와의 전쟁>에 캐스팅됐다. 마동석은 <범죄와의 전쟁>에서 무도인을 자처하는 태권도장 관장 김서방을 연기했다. 최익현(최민식 분)의 도움으로 나이트클럽의 관리부장이 되지만 허세를 떨다가 조직폭력배 창우(김성균 분)에게 한 방에 나가 떨어지는 약한 캐릭터였다. 

하지만 마동석의 연약한 캐릭터는 <범죄와의 전쟁>이 사실상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이웃사람>과 <반창꼬> <군도: 민란의 시대> 등에서 다시 강한 힘을 보여준 마동석은 2016년 <부산행>에서 무서운 좀비를 맨손으로 때려잡는 캐릭터를 연기하며 천만 배우에 등극했다. 2017년에는 단독주연을 맡은 <범죄도시>로 680만 관객을 동원하며 '마동석 시대'를 활짝 열었다(영화관입장권 통합전산망 기준).

<범죄도시> 이후 마동석은 <챔피언>과 <동네사람들> <성난 황소> <악인전> 등 원톱 주연의 액션영화들에 연이어 출연했다. 물론 흥행에 성공한 작품은 그가 성주신으로 출연했던 <신과 함께 - 인과 연>, 2014년에 출연했던 드라마를 영화화했던 <나쁜 녀석들: 더 무비> 정도에 불과했다. 하지만 마동석의 영화들은 '장르가 마동석'이라 불릴 만큼 영화 속에서 '힘 캐릭터'로서 독보적인 존재감을 내뿜었다.

작년 할리우드에 진출한 마동석은 여러 가지 능력을 가진 히어로들이 등장하는 <이터널스>에서 독보적인 파워를 자랑하는 길가메시를 연기하며 국적을 뛰어넘는 '힘 캐릭터'로서의 정체성을 이어갔다. 2019년 <백두산>을 끝으로 한동안 국내 개봉작이 없었던 마동석은 올해 개봉 예정인 <범죄도시2>를 통해 자신의 '시그니처 캐릭터'라 할 수 있는 마석도 형사로 돌아올 예정이다.

자존심이나 의리 따위 찾을 수 없는 건달들의 삶
 
 <범죄와의 전쟁>에서는 2000년대 조폭영화에서 흔히 등장하던 건달들의 의리 따위는 나오지 않는다.

<범죄와의 전쟁>에서는 2000년대 조폭영화에서 흔히 등장하던 건달들의 의리 따위는 나오지 않는다. ⓒ (주)쇼박스

 
2005년 중앙대 영화학과 졸업작품이었던 <용서 받지 못한 자>를 통해 혜성처럼 등장한 윤종빈 감독은 첫 상업 영화 <비스티 보이즈>가 나쁘지 않았던 평가에도 전국 71만 관객에 그치며 흥행에 실패했다. 상업영화 데뷔작 실패로 영화계에서 어정쩡한 위치에 머무는 듯했던 윤종빈 감독은 3년 후 <범죄와의 전쟁>을 통해 청룡영화제 각본상과 백상예술대상 영화 부문 대상을 수상하며 화려하게 재기했다.

실제로 <범죄와의 전쟁>은 해학과 풍자가 가득한 블랙코미디이자 한국형 갱스터 무비의 수작이라는 평가를 받으며 전국 470만 관객을 동원했다. 특히 서열에 집착하는 기성세대의 민낯을 꼬집은 "느그 서장 남천동 살제?"는 국민적으로 센세이션을 일으켰던 "살아있네"와 함께 <범죄와의 전쟁>을 대표하는 최고 명대사로 꼽힌다. "살아있네"는 거제도에서 태어나 부산에서 학창시절을 보낸 윤종빈 감독이 실제 친구들과 자주 쓰던 말이라고 한다.

건달도 아니고 민간인도 아닌 반쪽짜리 건달 최익현을 연기한 최민식은 영화 속에서 유독 후배들에게 맞는 장면이 많았다. 그것도 곽도원, 김성균, 김혜은 등 대부분 영화가 익숙하지 않았던 신예들이라 대선배 최민식을 대단히 어려워 했다고 한다. 그 중 곽도원이 연기한 조범석 검사가 화장실에서 최익현의 급소를 걷어차며 폭언을 하는 장면이 있는데 당시 최민식은 곽도원의 '실감나는' 연기에 허벅지가 시퍼렇게 멍이 들었다고 한다.

<범죄와의 전쟁>이 개봉되기 10년 전만 해도 한국영화는 조폭을 미화하는 코미디 영화가 대세를 이루고 있었다. 하지만 <범죄와의 전쟁>에 등장하는 조폭들은 멋은커녕 그저 비열하기 짝이 없는 존재로 그려진다. 부산 최고의 주먹으로 나오는 최형배(하정우 분)마저도 최익현과 차 안에서 싸울 때 동네 아저씨들마냥 개싸움을 하다 형사들에게 끌려나간다. 영화 속에서 멋지게 표현되는 조폭들의 의리도 <범죄와의 전쟁>에서는 전혀 나오지 않는다.

윤종빈 감독의 페르소나이자 중앙대 영화과 선배이기도 한 하정우는 <용서받지 못한 자>부터 <군도: 민란의 시대>까지 윤종빈 감독이 연출한 모든 영화에 주연으로 출연했다. 네 작품을 연속으로 함께 한 윤종빈 감독과 하정우는 2018년 490만 관객을 동원했던 <공작>에서 잠시 떨어져 있었지만 올해 공개될 예정인 넷플릭스 드라마 <수리남>을 통해 다시 의기투합할 예정이다(<수리남>에는 하정우 외에도 황정민, 박해수, 유연석 등이 출연한다).

조진웅-곽도원-김성균 등 명품배우들의 향연
 
 <범죄와의 전쟁>에서 김판호를 연기한 조진웅은 이후 여러 작품에 출연하며 '믿고 보는 배우'로 자리 잡았다.

<범죄와의 전쟁>에서 김판호를 연기한 조진웅은 이후 여러 작품에 출연하며 '믿고 보는 배우'로 자리 잡았다. ⓒ (주)쇼박스

 
<범죄와의 전쟁>은 '최민식, 하정우 보러 갔다가 조연배우들에게 반하는 영화'로 유명했다. 그만큼 매력적이고 생동감 있는 캐릭터들이 많이 등장했다. 특히 최형배의 라이벌(?) 김판호를 연기한 조진웅은 불과 몇 개월 전 <뿌리깊은 나무>에서 무휼을 연기했던 배우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비열한 조폭연기를 선보였다. 조진웅은 이후 영화 <끝까지 간다> <암살> <독전> <공작>, 드라마 <시그널> 등에 출연하며 '믿고 보는 배우'로 성장했다.

배우 곽도원에게도 <범죄와의 전쟁>은 대단히 의미 있는 작품이었다. 곽도원이 연기한 조범석 검사는 <범죄와의 전쟁>에서 얼핏 정의로워 보이지만 최익현의 인맥을 활용해 검찰의 고위직에 오른다. 곽도원은 <범죄와의 전쟁> 이후 <변호인>과 <타짜:신의 손>에서 인상적인 연기를 선보였고 <곡성> <아수라> <특별시민> <강철비> <남산의 부장들> <국제수사> 등에서 잇따라 주연으로 출연했다.

연극배우로 활동하던 김성균은 <범죄와의 전쟁>이 영화 데뷔작이었다. 김성균은 독특한 단발머리의 헤어스타일이 워낙 인상적이라 일부 관객들로부터 "어디서 진짜 깡패를 데려 왔냐"고 오해를 받았을 정도로 엄청난 존재감을 발휘했다. <범죄와의 전쟁> 이후 <이웃사람>에서 연쇄살인범을 연기하며 악역전문배우로 자리를 잡아가던 김성균은 2013년 <응답하라1994>의 삼천포를 통해 이미지 변신에 성공하며 친숙한 배우로 자리 잡았다.

여성 배우가 거의 출연하지 않은 <범죄와의 전쟁>에서 김혜은이 연기한 김판호의 내연녀 정사장은 관객들에게 더욱 인상적으로 다가올 수밖에 없었다. MBC에서 기상캐스터로 활동했던 단아한 이미지의 김혜은이 조폭들과의 협상에서 잔뜩 긴장한 최익현을 보며 "오빠야, 쫄았제?"라고 비웃는 연기는 대단히 파격적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최악현을 비웃던 정사장은 나이트클럽이 최형배 조직에 넘어간 후 최익현의 내연녀가 됐다.
그 시절, 우리가 좋아했던 영화 범죄와의 전쟁: 나쁜 놈들 전성시대 윤종빈 감독 최민식 마동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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