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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사람들이 대한의 독립을 외치고있다
▲ 3.1운동 당시 수많은 인파 많은 사람들이 대한의 독립을 외치고있다
ⓒ 3.1운동100주년기념사업추진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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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1일 하오 2시 종로 탑골공원에는 2천여 명의 학생과 시민이 회집(會集)하여 민족대표들의 참석을 기다리고 있었다. 민족대표들은 당초 이곳에서 독립선언을 하기로 했다가 학생ㆍ시민들이 일경과 충돌하면 희생자가 생길 것을 우려하여 장소를 태화관으로 바꾸었다. 

시민ㆍ학생들은 기다려도 민족대표들이 나타나지 않자 군중 속에서 한 청년이 팔각정 위로 올라가 독립선언서를 우렁차게 낭독하였다. 낭독이 끝나자 군중들의 독립만세가 고창되고, 이어서 공원 문을 쏟아져 나와 시위행진을 벌였다. 일부 시위자들은 태극기를 들고 있었다. 

학생과 시민들이 탑골공원을 뛰쳐 나와 거리행진에 나서자 고종의 인산(因山)에 참석하고자 전국에서 상경한 사람들이 합세하면서 시위대는 삽시간에 수십만 군중으로 불어났다. 시위대 일부는 종로에서 광교→시청앞→남대문을 돌아 의주통으로 꺾이어 프랑스 공사관 쪽으로, 다른 일부는 종로→덕수궁→대한문 앞에 이르러 독립만세를 불렀다. 

그 사이에 출동한 일제경찰의 제지를 받았으나 민중들은 조금도 흩어지지 않고 대열을 정비하면서 시위를 벌였다. 시위 군중은 다시 여러 대열로 나뉘어 미국 영사관→창덕궁→일본보병사령부→총독부청사 앞을 행진하면서 만세를 불렀다. 
 
민족대표들이 1919년 3월 1일 오후 2시 인사동 태화관에 모여 독립선언식을 하는 모습(기록화)
▲ 민족대표 33인의 독립선언식 민족대표들이 1919년 3월 1일 오후 2시 인사동 태화관에 모여 독립선언식을 하는 모습(기록화)
ⓒ 33인유족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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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1일의 독립만세 시위는 서울 뿐만 아니었다. 평양ㆍ의주ㆍ정주ㆍ해주ㆍ옹진ㆍ사리원ㆍ황주ㆍ서흥ㆍ연백ㆍ수안ㆍ원산ㆍ영흥에서 같은 시각에 만세시위가 있었다. 경의선과 경원선 등 철로변에 위치한 도시들이어서 서울과 연락이 용이한 까닭이다. 

독립만세 시위는 3월 2일부터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서울의 여러 지역을 비롯하여 조선8도 전지역에서 조직적으로 또는 자발적으로 벌어졌다. 민족대표들은 비폭력ㆍ일원화ㆍ대중화의 3대원칙을 제시했고, 시위군중은 이에 따랐다. 비폭력적으로 질서정연하게 진행되었다.   3월 1일부터 5월 말까지 3개월 동안 전개된 시위 상황을(박은식의 <한국통사>)보면 다음과 같다. 

집회 총인원 2,023,098명, 사망자 7,509명, 부상자 15,961명, 피검자 46,948명, 불탄 교회당 47동, 불탄 학교 2동, 불탄 민가 715호 등이다. 일제는 이보다 훨씬 축소하여 통계를 조작하였다. 

3ㆍ1독립시위는 국내 뿐만 아니었다. 한인이 모여사는 해외 곳곳에서 전개되었다. 서간도와 북간도를 비롯하여 남북만주 일대와 중국본토 여러 지역, 러시아 연해주, 미주ㆍ하와이, 일본 등지에 살던 교포들이 참여하였다. 
 
민족대표 33인이 서명한 기미년 '3.1독립선언서'. 왼쪽 끝에 서명자 33명의 명단이 보인다.
▲ 기미독립선언서 민족대표 33인이 서명한 기미년 "3.1독립선언서". 왼쪽 끝에 서명자 33명의 명단이 보인다.
ⓒ 33인유족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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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북간도의 중심지인 용정에서는 3월 13일 1만여 명의 한인이 일본 영사관 옆에서 조선독립축하회를 개최하고 독립선언서와 별도로 제작한 '독립선언포고문'을 발표하였다. 행사를 마친 동포들은 시위에 나섰다가 일경의 무자비한 총격으로 17명이 사망하고 30여 명이 중경상을 당하는 등 피해를 입었다. 

독립을 선언한 민족대표들에게 일제는 내란죄로 엮어 중형을 선고하고자 시도하면서 일체의 가족면회를 금지하는 등 악행을 서슴지 않았다. 독립선언서는 천도교 인쇄소인 보성사에서 책임자 이종일의 주도로 2만 1천매를 인쇄하였다. 인쇄 도중에 총독부의 한인 형사가 들어와 적발될 위기에 처했으나 손병희가 거금을 주어 입을 막았다. 

보성사는 또 <조선독립신문> 제1호 1만부를 찍어 3월 1일 서울시내에 살포하는 등 몇 차례 지하신문을 발행하였다. 이 신문은 곧 가정부(임시정부)가 세워지고 민주공화제로 한다는 내용을 실었다. 지하신문은 이외에도 여러 차례 곳곳에서 제작되어 만세시위와 함께 살포되었다. 태화관과 보성사는 얼마 후 의문의 화재로 전소되었다. 

기미년 만세시위는 어느날 갑자기, 자연발생적으로 일어난 거사가 아니었다. 동학혁명ㆍ독립협회ㆍ만민공동회ㆍ의병투쟁ㆍ신민회 등 국내의 민족운동과 1917년 7월 해외독립운동가 14인의 '대동단결선언', 1919년 초 해외독립운동가 39인의 '대한독립선언', 같은 무렵 상하이에서 조직된 신한청년당의 파리강화회의 대표파견과 국내 파견, 도쿄 유학생들의 2ㆍ8독립선언, 그리고 윌슨 미국대통령의 민족자결주의 등 역사의 맥락과 조직 그리고 국제환경을 포착하여 이루어진 한민족의 위대한 혁명이었다.

민족대표들은 독립만 선언한 것이 아니었다. 임규와 안세훈을 일본에 파견하여 일본 내각 및 의회에 독립선언서를 제출케 하고, 미국 대통령과 파리강화회의 대표들에게 독립원조 청원서 등을 영문으로 번역, 전송키 위해 현순을 상하이로 파견하였다. 

자료에는 나타나 있지 않으나, 민족대표들이 재판정에서 판검사의 심문에 "독립된 나라의 정체는 민주공화"였음을 진술한 것으로 보아, 독립이 되면 민주공화제를 채택하기로 사전에 뜻을 모았던 것 같다. 상하이에 수립된 임시정부가 이를 받아 민주공화제를 채택한 데서도 알 수 있다.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인물열전 / 민족대표 33인 박동완 평전]는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태그:#박동완, #민족대표_33인, #박동완평전, #근곡_박동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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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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