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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비교적 젊은 나이에, 기독교계의 주류도 아닌 처지에서 민족대표로 선임되어 서명한 것은 기독교 언론인으로서의 위상때문이었다. 언론인의 신분으로 독립선언에 서명한 유일한 분이다. '샘 해지지 않는' 독립운동가, '기타', '등'으로 배제되고 망각된 33인 민족대표의 일원인 근곡 박동완 지사의 발자취를 지금부터 찬찬히 뒤따라가보려 한다.[편집자말]
민족대표 박동완
 민족대표 박동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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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제리아 출생의 프랑스 8대학 교수 자크 랑시에르는 "샘 해지지 않는 사람들"에 대해 주목하였다. 우리말의 '기타'는 "그것 밖의 또 다른 것"을 의미한다. '등(等)'도 마찬가지다. '등'은 "같은 종류의 사실들이 앞에 열거되어 있음을 나타내는 말"로 풀이된다. '샘 해지지 않는 조연'이나 '기타' 또는 '등'으로 배제된 엑스트라는 슬픈 존재들이다. 
 
존재하지만 실존하지 않는 인물들, 주연 못지 않게 많은 역할을 하고도 묻히거나 잊혀진 분들이 우리 독립운동사에도 적지 않았다. '민족대표 33인'의 경우도 그러하다. 
 
노자의 도덕경 58장 마지막 단락에 '광이불요(光而不耀)'란 대목이 전한다. "빛나되 번쩍이지 않는다"는 뜻이다. 학자나 언론인들은 빛나는 것보다 번쩍이는 사람을 더 찾는다. 

일인 검사 "앞으로도 또 독립운동을 할 것인가?"라는 심문에 "물론 그렇다" 단언
 
민족대표 공판 장면(동아일보, 1920.7.13)
 민족대표 공판 장면(동아일보, 1920.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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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곡(槿谷) 박동완(朴東完, 1885~1941) 선생은 33세에 자진해서 민족대표 33인으로 독립선언에 서명한 민족대표 중 한 분이다. '민족대표 33인'과 관련, 일부 인사들의 변절과, 독립선언 행사를 탑골공원이 아닌 태화관으로 옮긴 것과 관련 폄훼가 따르지만, 일제의 무단통치가 극점에 이르던 시기(1919년)에 독립선언은 생명을 담보하는 결의가 없이는 가능하지 않았던 선택이었다.

구한말의 조정대신 등 사회 명사들이 '독립청원'이면 몰라도 '독립선언'에는 참여하지 못하겠다고 발을 뺀 데서도 알 수 있다. 그렇다고 '민족대표'에 아무나 참여하거나 시킬 수는 없는 일이었다. 
 
'무궁화 피는 동산'이라는 근곡(槿谷)의 아호에서 선생의 민족혼이 묻어난다. 일제가 대한제국을 병탄하면서 '대한'이라는 국호와 '무궁화'라는 국화를 사갈시하고 그냥 두지 않았다. 선생은 저들이 가장 싫어하는 무궁화를 아호로 삼을만큼 강기와 결기가 있었다. 선생은 3.1혁명 후 우리가 쓰는 시간은 일본의 표준시각이기 때문에 그들의 시간에 맞추어 살지 않겠다는 각오로 자신의 시계를 항상 30분 늦추어 놓았다고 한다.
 
기미년 3ㆍ1독립선언 후 총독부에 구치되어 재판을 받을 때 일인 검사가 "앞으로도 또 독립운동을 할 것인가?"라는 심문에 "물론 그렇다"고 결연히 말하였다. 생과 사, 투옥과 석방의 갈림길에서 강고한 의지를 밝힌 지사였다. 그리고 그대로 행하였다.
 
선생은 2년의 옥고를 치르고 만기 출감된 뒤 일제의 감시와 협박, 회유를 견디면서 1927년 '민족반일당 민족협동전선'의 기치 아래 발족한 신간회 창립과 초창기 운영에 중추적 역할을 하였다. 신간회는 일제강점기 국내에서는 최대 민족운동의 대표적 단체로 강령에서 "우리는 조선민족의 정치적ㆍ경제적 해방의 실현을 기함"이라고 내세울 만큼 국내에서 공공연히 항일투쟁을 표방한 단체였다.

언론인의 신분으로 독립선언에 서명한 유일한 분
 
박동완 심문기사(매일신보, 1920.9.25.)
 박동완 심문기사(매일신보, 1920.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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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은 3ㆍ1혁명에 참여하기 전, 그러니까 국치 이후 10여 년 동안 한글신문 <기독신문>의 편집위원과 서기로서 많은 논설과 사설을 썼다. 실질적 주필의 역할을 맡아 수행하였다.
 
병탄과 함께 민족지 <대한매일신보>를 강탈한 일제가 '대한'을 삭제하고 <매일신보>로 개칭하여 신문을 발행할 때 <기독신문>은 유일한 우리말(글) 신문이었다. 그리고 <신생명>, <한인기독교보>, <청년>, <별건곤> 등 총독부의 간섭이 극심한 매체에 많은 글을 썼다.

그가 비교적 젊은 나이에, 기독교계의 주류도 아닌 처지에서 민족대표로 선임되어 서명한 것은 기독교 언론인으로서의 위상 때문이었다. 언론인의 신분으로 독립선언에 서명한 유일한 분이다. 

선생이 혹독한 탄압과 감시 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민족운동을 계속할 수 있었던 것은 어려서부터 접한 기독교정신에 근거하였다. "박동완은 기독교와 민족사의 맞물림과 엇물림의 역사 전환기에 민족운동에 헌신"(박재상ㆍ임미선, <근곡 박동완의 생애와 기독교 민족주의 연구>)할 수 있었던 것이다. 
 
선생은 굴곡진 시대 참담한 조국의 현실 앞에서 돈독한 신앙심과 옹골찬 역사의식으로 주어진 사명을 다하였다. 재만 동포들이 만주군벌과 일제의 2중탄압으로 어려움에 빠지자 유지들과 '재만동포옹호동맹'을 결설하여 현장을 찾아 동포들을 위로하고, 귀국하여서는 야만적인 탄압상을 언론에 공개하였다.
 
신간회 활동이 총독부의 탄압과 내부갈등으로 분열상을 보이고 언론활동ㆍ신앙운동 역시 극심한 압제의 대상이 되자 선생은 1928년 미국으로 망명한다. 40이 넘은 나이에 망명을 택한 것은 복합적인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시국이 갈수록 어렵게 되면서 '민족대표'의 위상을 유지하며 지내기가 쉽지 않았다. 유혹과 압박도 그만큼 많았을 것이다. 
 
또한 <독립선언서>를 썼던 육당 최남선이 자치운동을 주장하면서 일제와 타협하기 시작하고, 1925년에는 총독부 어용단체인 조선사편수회 편수위원이 되어 식민주의 역사학의 한국사 왜곡에 동참하는 것이 견디기 어려웠을 것이다. 자신과는 동서간이었다. 
 
하와이에서 와히아와 한인기독교회 담임목사로서 목회활동과 <한인기독교보>를 발행하는 한편 교회 안에 별도의 한글학교를 세우고 우리말 교육을 통해 교포 1세와 2세의 민족의식 고취에 열정을 쏟았다. 하와이는 만주ㆍ해삼위에 이어 제3의 독립운동 전진기지가 되었다.

어디이던 '민족의 십자가'를 내려놓지 않은 실천적 기독인
 
박동완 부음기사(신한민보, 1941.3.27.)
 박동완 부음기사(신한민보, 1941.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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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곡은 활동공간이 어디이던 '민족의 십자가'를 내려놓지 않은 실천적 기독인이었다. 앎과 삶을 일치시키고 늠염한 기상과 고절한 인품으로 힘겨운 골고다를 쉼 없이 걸었다. 
 
그가 활동하던 시기 미주지역의 독립운동가들은 크게 분열되어 있었다. '동지회'와 '국민회'로 나뉘어 분열상이 심화되자 이를 통합하고 치유하는 데 정성을 아끼지 않았다. 그리고 미처 해방을 맞기 전 1941년에 이역에서 56세에 소천한다. 
 
이런 연고로 선생은 업적에 비해 제대로 평가받지 못한 채 '샘 해지지 않는' 독립운동가, '기타', '등'으로 배제되고 망각된 33인 민족대표의 일원이다. 근곡 박동완 지사의 이름 앞에 하나의 수식어가 필요하다면 무엇이라 할 것인가를 찾고자 평전을 쓰게 되었다.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인물열전 / 민족대표 33인 박동완 평전]는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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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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