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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4년(고종31) 동학농민운동 당시 농민군과 조선-일본 연합군이 공주 우금치에서 벌인 전투 기록화.
 1894년(고종31) 동학농민운동 당시 농민군과 조선-일본 연합군이 공주 우금치에서 벌인 전투 기록화.
ⓒ 한국문화재재단 월간 문화재 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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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동완은 1885년 12월 27일 경기도 포천시 신읍리(일명 호병굴)에서 아버지 박형순(朴馨淳)의 둘째아들로 태어났다. 함양박씨 지평공파(持平公派) 중 판서공파(判書公派) 26세손이다.

대대로 양반관료 가문이었고 아버지는 통훈감목관(通訓監牧官)을 역임하였다. (주석 1)
통훈벼슬은 정3품 당하관의 품계로 문관ㆍ종친ㆍ의빈을 맡는 벼슬이다. 형 박동원(朴東元)은 1894년 식년생원시(式年生員試)에 합격하였고, 할아버지 박사규(朴思圭)는 광양현감을 지냈다. 어릴적 이름은 고봉(高峯)이고 민족의식이 움트면서 자호를 근곡이라 지었다.

사람은 누구라도 자신의 출생을 선택할 수는 없다. 왕자와 거지, 흙수저와 금수저도 다르지 않다. 시대와 공간을 선택할 수 없는 것도 마찬가지다. 어쩌다가 비오는 날에 태어난 하루살이도 있다.

그가 태어난 시기는 격동기였다.

내적으로는 조선왕조의 봉건체제가 동요하고 외적으로는 제국주의세력이 침투하는 가운데, 위로부터 근대적 부르주아 변혁운동이, 아래로부터 반봉건ㆍ반제국주의 변혁운동이 일어났다. 조선왕조 말기 파행적인 세도정치가 이어지면서 상부층은 수구세력과 위정척사세력 그리고 근대적 개화세력으로 갈리고, 하층부 민중들은 천주교전래와 동학사상의 전파로 점차 각성하기 시작했다.

전국 곳곳에서 민란이 계속되었다
 
왼쪽부터 박영효, 서광범, 서재필, 김옥균. 이들은 친일 의존적인 급진적 개화 운동을 펼쳤다. 이들은 이동인의 사상적 제자였다.
▲ 1884년 갑신정변의 주역들 왼쪽부터 박영효, 서광범, 서재필, 김옥균. 이들은 친일 의존적인 급진적 개화 운동을 펼쳤다. 이들은 이동인의 사상적 제자였다.
ⓒ 이병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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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 곳곳에서 민란이 계속되었다. 박동완이 태어나기 1년 전 갑신정변이 일어났다. 임오군란을 계기로 청나라의 내정간섭이 심해지자 김옥균ㆍ박영효ㆍ홍영식 등 개화당은 1884년 10월 청국에 의존하려는 척족중심의 수구당을 몰아내고 실질적인 독립과 개혁 정치를 이룩하기 위해 일본공사 다케조에와 밀의한 끝에 일본의 주둔병력을 빌려 정변을 일으키고 혁신정부 세우기를 시도하였다.

김옥균 등은 고종을 경운궁으로 옮기고 문벌폐지ㆍ인민평등ㆍ관제개혁 등 혁신정강 14개 항목을 마련했으나 미처 공포도 하기 전에 원세개의 청국군이 출동하여 창덕궁을 공격하면서 집권은 3일천하로 끝나고 말았다. 

같은 해 11월 한성조약이 체결되었다. 갑신정변 와중에 민중이 서울에 있는 일본공사관을 불태우고 일본 거류민을 죽인 것을 빌미삼아 이노우에 카오루 전권 대사가 2개대대 병력을 이끌고 한성에 들어와 조약을 강박했다. 조선 측의 사과와 손해배상, 범인처벌, 일본공사관 신축부지 제공과 신축비 지불 등이 담긴 조약이 맺어졌다. 이 조약의 결과로 일본은 조선침략의 기초를 다지게 되었다. 

그가 태어나던 해(1885년) 2월 여주민란, 3월 원주민란이 일어나고, 영국극동함대 군함 3척이 거문도를 점령했으며(3월 1일), 황해도 장연에 최초의 교회인 소래교회가 창립되었다. 나중에 박동완이 근대교육을 접하게 된 배재학당은 미국인 선교사 아펜젤러에 의해 그가 태어나던 해 8월에 서울에 세워졌다. 

박동완이 성장하던 시절 국내에서는 각종 민란과 특히 1892년 11월 동학교도의 삼례집회에 이어 복합상소(1893년 2월), 보은집회(3월) 그리고 1894년 동학혁명이 발발하면서 일본군이 들어와 동학교도 등 20~30만 명을 학살하는 만행이 자행되었다.

조정에서는 뒤늦게 1894년 6월부터 1896년 1월까지 갑오개혁을 추진하여 연좌제 폐지, 노비제도 및 인신매매 금지, 과부재혼 허용, 남녀조혼 금지ㆍ과거제 폐지 등이 단행되었다. 그나마 이같은 개혁조치는 동학혁명 진압을 핑계로 조선에 들어온 일본군이 전주화약 이후 더 이상 주둔의 구실이 없어지자 조선의 내정개혁을 요구하면서 추진됨으로써 민중의 저항에 부딪혔다. 동학혁명에서 제기했던 항목이 대부분이었고, 그나마 토지분배 등 가장 크게 제시된 이슈는 빠졌다. 

박동완은 장래 자신은 물론 국가의 운명을 크게 뒤바뀌게 되는 나라 안팎의 크고 작은 사태ㆍ사건이 연속되는 시기에 태어나 비교적 유복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다섯 살 때부터 집안에 독선생을 모셔 한문을 배울 수 있었다. 

일찍 개명했던 박동완의 부모는 그가 아홉 살이 되기 이전에 경기도 포천에서 서울로 이사하였다. 형 박동원은 1894년에 과거에 급제하였으나 갑오개혁으로 과거제가 폐지됨으로써 영특한 막내아들에게 신식교육을 시키고자 했던 것 같다. 옮긴 서울 주소는 한성부 북방 누각동(현 종로구 누하동) 214번지였다. 

1897년 박동완은 12세의 아직 어린 나이에 부모가 맺어준, 포천의 명문 집안인 현석운(玄昔運)의 차녀 현미리암과 서울에서 결혼하였다. 장인은 종일품 중추원 찬의(贊議)를 지낸 분이다. 중추원 찬의는 구한국 때 온갖 신문ㆍ잡지 등의 보관을 맡아보던 관청인 박문원(博文院)의 벼슬로서 칙임대우였다. 박동완이 사회에 진출하면서 주로 신문ㆍ잡지에서 활동하게 된 것은 장인의 직업에서 영향을 받았을 것 같다.

갑오개혁에서 조혼제 폐지가 선포되었지만 오랜 관습처럼 되었던 조혼제는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정치적 혼란기여서 부모들은 후대를 잇고자 하는 바람에서 자제들을 일찍 혼인시켰던 것이다. 


주석
1> <함양박씨 지평공사 세보>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인물열전 / 민족대표 33인 박동완 평전]는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태그:#박동완, #민족대표_33인, #박동완평전, #근곡_박동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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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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