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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3월 1일, 민족대표 33인 중 29인이 모여 독립선언문을 낭독한 태화관이다. 당시 안순환이 만든 궁중요리 전문점 명월관의 지점이었다.
▲ 1919년 3월 1일, 민족대표 33인 중 29인이 모여 독립선언문을 낭독한 태화관이다. 당시 안순환이 만든 궁중요리 전문점 명월관의 지점이었다. 1919년 3월 1일, 민족대표 33인 중 29인이 모여 독립선언문을 낭독한 태화관이다. 당시 안순환이 만든 궁중요리 전문점 명월관의 지점이었다.
ⓒ 권기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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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대표 중 서울에 있던 20여 명은 2월 28일 손병희 집에서 극비리에 회합을 갖고 거사를 최종 점검했다. 이 자리에서 당초 탑골공원에서 하기로 한 독립선언서 발표 대신에 태화관으로 장소를 옮길 것을 결정했다. 흥분한 학생ㆍ시민과 일제 경찰의 충돌로 불상사가 생길 것을 우려한 때문이었다.

거사일을 3월 1일로 결정한 데는 또 다른 까닭이 있었다. 고종의 인산(因山) 일인 3월 3일로 내정했다가, 인산일을 택하는 것은 전 황제에 대한 불경이라는 의견과 2일은 일요일이므로 기독교의 안식일이라 피하자는 의견이 나와 결국 거사일이 3월 1일로 결정되었다.

1919년 3월 1일 오후 2시 민족대표 33인 중 박동완 등 29명이 서울 인사동 태화관에 모였다.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국치 9년만에 한민족이 세계만방에 자주독립을 선언하는 순간이다. 길선주ㆍ유여대ㆍ정춘수 3인은 지방에서 서울에 늦게 도착해서 이날 태화관 모임에는 참석하지 못했다. 그리고 김병조는 상해로 건너가 불참하고 서명자 외에 함태영이 참석했다.

태화관은 중국음식점 명월관의 지점으로, 한때 이완용이 살았던 집을 수리하여 음식점으로 변용한 곳이다. 이곳은 이완용이 이토 히로부미와 을사늑약을 밀의하던 장소이며, 1907년 7월 17일 고종황제를 퇴위시키고 순종을 즉위케 한 음모, 그리고 매국노들의 탄병조약의 준비도 바로 이 집에서 모의되었던 얄궂은 장소이다. 

태화관의 비극적인 운명은 계속되어서 3ㆍ1 독립선언 후인 5월 23일 새벽 원인모를 화재로 모두 불타버렸다. 독립선언서를 인쇄한 보성사가 그해 6월 28일 밤 소실된 것과 함께 3ㆍ1 항쟁과 관련된 두 곳의 역사적인 장소가 일제의 흉계로 회진되고 만 것이다.

바로 이 태화관에서 민족대표들은 3월 1일 오후 2시 조선의 독립을 선언하고 일본경찰에게 통고하여 구속되었다. 태화관 별실에 모인 민족대표들은 이종일이 인쇄하여 가져온 <독립선언서> 1백여 장을 나눠보면서 간략히 행사를 진행했다.

<독립선언서>는 이미 민족대표들이 읽은 바 있으므로 낭독을 생략하기로 하고 한용운이 간단한 인사말을 하도록 했다. 한용운은 이 자리에서 "오늘 우리가 이렇게 모인 것은 조선의 독립을 선언하기 위한 것으로 자못 영광스러운 날이며, 우리는 민족대표로서 이와 같은 선언을 하게 되어 책임이 중하니, 금후 공동협심하여 조선독립을 기도하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라는 요지의 선언식 인사말을 하고, '독립만세'를 삼창했다.

뒤이어 태화관 주인에게 경찰에 알리도록 하여 달려온 일본 헌병과 경찰 80여 명에 의해 29인의 민족대표들은 전원 연행되었다. 그들은 군중의 만세소리를 들으면서 자동차에 실려 끌려갔다. (주석 9)
1919년 3월 1일 정오부터 태화관으로 모여들기 시작한 민족 대표 29명은 오후 2시가 막 넘어서면서 독립선언문을 낭독하기 시작한다.
▲ 1919년 3월 1일 정오부터 태화관으로 모여들기 시작한 민족 대표 29명은 오후 2시가 막 넘어서면서 독립선언문을 낭독하기 시작한다. 1919년 3월 1일 정오부터 태화관으로 모여들기 시작한 민족 대표 29명은 오후 2시가 막 넘어서면서 독립선언문을 낭독하기 시작한다.
ⓒ 권기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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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경에 끌려간 민족대표들은 즉시 남산 왜성대의 경무총감부에 구금되었다. 지방에서 뒤늦게 상경한 길선주ㆍ유여대ㆍ정춘수 세 사람도 자진해서 경찰에 출두하여 이들과 합류했다. 33인의 민족대표 중 유일하게 김병조는 독립운동의 경위를 해외에 알리기 위하여 상해로 망명하여 구속자에서 제외되었다.

구속된 민족대표들에게는 이날 밤부터 개별적으로 혹독한 취조가 시작되었다. 32인 이외에 3ㆍ1혁명 준비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관련자들도 속속 구속되어 48인이 주동자로 취조를 받았다. 심한 고문도 가해졌다.

왜성대에서 1차 취조를 받은 민족대표들은 모두 서대문감옥으로 이송되었다. 이들은 악명 높은 서대문감옥에서 문초ㆍ고문ㆍ대질심문의 어려운 고비를 겪으며 4월 4일 경성지방법원의 예심에 회부되었다. 독립지사들에게 일제는 내란죄의 죄목을 걸어 국사범으로 몰아갔다.


주석
9> 앞의 책, 21~22쪽.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인물열전 / 민족대표 33인 박동완 평전]는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태그:#박동완, #민족대표_33인, #박동완평전 , #근곡_박동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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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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