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명의 시민기자가 개의 기사를 작성하였습니다. 시민기자 전환하기
1953. 11. 18. 정부 요인들이 전방 낙하산부대를 방문한 가운데 신익희 국회의장이 치사를 하고 있다(왼쪽 김병로 대법원장).
 1953. 11. 18. 정부 요인들이 전방 낙하산부대를 방문한 가운데 신익희 국회의장이 치사를 하고 있다(왼쪽 김병로 대법원장).
ⓒ NARA

관련사진보기

 
4개월 여의 해외순방을 마치고 귀국할 즈음 엉뚱한 음해가 기다리고 있었다.

민주국민당 정책위원회 부위원장이며 선전부장인 함상훈이 10월 25일 돌연 장문의 성명서를 통해 그를 용공으로 음해하여 정계에 큰 충격을 주었다.

당대표를 선전부장이 용공으로 몰아붙인 이례적인 일이다. 신익희가 귀로에 인도 뉴델리에서 6ㆍ25 때 납북된 조소앙을 비밀리에 만나 반자본ㆍ비공산의 제3세력, 즉 영세중립화를 논의했다는 내용이었다. 함상훈의 성명이 나오기 전 10월 20일 여당인 자유당계 신문으로 알려진 『국토일보(國都日報)』의 보도와 유사한 내용이었다.

예나 지금이나 정치공작의 시나리오가 그럴듯 하게 꾸며지듯이, 신익희를 잡는데 조소앙을 등장시킨 것은 그럴 듯 했다. 두 사람의 관계가 남달랐기 때문이다. 상하이 임시정부의 헌법기초위원, 충칭임시정부에서 내무부장(신익희)과 외무부장(조소앙) 그리고 정부수립 과정에서 신익희는 이승만에게 조소앙을 국무총리에 적극 추천하는 등 '절친'이었다.

함상훈은 「전민주국민당원에게 고함」이라는 성명에서 "4286년 5월 18일에 출발하여 영국 엘리자베스 여왕의 대관식에 참석한 민주국민당 위원장이며 전 국회의장인 신익희 씨가 돌아오는 도중에 인도의 수도 뉴델리에 들러 6ㆍ25 당시 월북한 조소앙과 밀회하고 소위 비공산ㆍ비자본의 제3세력과 연결되었으며 이러한 세력이 민주국민당 내부에까지 침투되고 있다." (주석 4)는 폭탄선언이었다.

성명은 이어서 "본당은 창당 이후 원세훈ㆍ김약수 씨 등의 탈당사건이 있었고, 노일환ㆍ김옥주 등의 국회프락치사건이 있었지만 지금은 그것보다 더 중대한 사건이 생겼습니다. 그것은 제3세력의 본당 침투입니다." (주석 5) 라는 놀라운 발언이었다. 

정계에 파란을 일으킨 이 폭로는 허구의 '가짜뉴스'였다. 본인은 물론 신익희와 함께 해외 순방을 했던 김동성 의원이 부인했고, '폭로' 이외에 입증할 아무런 자료가 없었다. 그럼에도 함상훈은 끈질기게 음해를 계속했다.

"1954년 3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북한)에서 온 조소앙의 밀사 오경심을 신익희 민국당위원장이 만났다"고 주장했다. 

'제3세력'이 민국당위원장 신익희와 내통하여 김일성과 이승만 정권을 배제한 중립화 정권 수립을 추진하였는데, 그 일환으로 신익희와 조소앙이 뉴델리에서 만났고, 또 조소앙이 보낸 특사를 신익희가 만났다는 내용이었다. (주석 6)
 
해공 신익희 선생 생가에 위치한 동상
 해공 신익희 선생 생가에 위치한 동상
ⓒ 박정훈

관련사진보기

 
민주국민당은 함상훈을 즉각 제명조치하고 사태수습에 나섰다. 그러나 정작 피해 당사자인 신익희는 담담한 모습이었다. 하늘 아래 부끄럼이 없는데, 모략중상이 통하겠느냐는 배포였다. "버러지는 나무가 썩어야 생기지 단단한 나무에는 생기지 않는 법이다. 한자 목후충생(木朽虫生)이라 한다."고 덧붙였다.

해외순방 외교가 크게 성공하고 그의 위상이 날로 높아지면서 정치공작이 나타났다. 1949년 반민특위가 한참 활동할 때 '국회프락치사건'이 날조되고 김구가 암살되었다. 8월 31일 정부에 비판적이던 『연합신문』과 『동양통신』 편집국장 정국은이 정부전복음모 혐의로 사형되고, 9월 12일 자유당은 이기붕을 2인자로 지명했다.

이듬해인 1954년 5월로 예정된 제3대 국회의원 총선거를 앞두고, 이승만 정권은 여러 가지 정치적인 음모를 꾸미고 있었던 시점이었다. 이승만의 3선을 위해서는 헌법을 개정해야 하고, 이를 위해서는 어떤 일이 있어도 국회에서 개헌선을 확보하는 것이 중요한 과제였다.

함상훈의 '뉴델리 밀회사건'은 이같은 배경에서 나타났을 것이다. 이와는 달리 야권의 라이벌 제거 수단으로 제기되었다는 주장도 따른다.

훗날 통합야당으로 출범한 민주당에서 1957년 당내 분규가 일어났을 때 김준연(金俊淵)과 조병옥(趙炳玉)은 서로 상대방을 함상훈 성명의 배후로 비난한 바 있었다. 이를 통해 보았을 때 민주국민당 내 강경보수파였던 김준연이나 조병옥이 유화파였던 신익희를 제거하기 위해 함상훈을 앞세워 소위 '뉴델리 밀회설'을 흘렸다는 추정이 있기도 하다.

또한 당시 개헌을 추진 중이었던 자유당 역시 이 사건을 계기로 야당을 '제3세력'으로 규정하고 이에 대한 공격을 통해 반공안보 분위기를 고조시켜, 개헌안에 유동적이었던 자유당 국회의원들이 야당에 동조하는 것을 견제하였다고 평가되기도 한다. (주석 7)


주석
4> 임규환, 「함상훈과 신ㆍ조 뉴델회담설 사건」, 『흑막』, 194쪽, 실화, 1960.
5> 앞과 같음.
6> 『위키백과』, 「뉴델리 밀회공작사건」.
7> 『한국민족문화 대백과』, 『NAVER 지식백과』, 「뉴델리밀회사건」.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인물열전 / 해공 신익희 평전] 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