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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1년 3월 1일, 3.1절 22주년 기념식. 김구 선생과 조소앙 선생, 신익희 선생, 김원봉 장군이 함께 선 사진이다. 매우 귀한 자료다.
▲ 함께 선 김구 선생과 김원봉 장군 1941년 3월 1일, 3.1절 22주년 기념식. 김구 선생과 조소앙 선생, 신익희 선생, 김원봉 장군이 함께 선 사진이다. 매우 귀한 자료다.
ⓒ 대한민국임시정부 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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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일학생운동→3·1혁명 참여→대한민국임시정부 의정원 의원→임시정부 내무차장→임시정부 내무총장 대리→국무원 비서장→법무총장·문교부장·외교부장→중국군 육군중장→(중국) 남경정부 심계원장→한국혁명당 조직→민족혁명당 참여→김원봉 등과 조선의용대 결성→한중문화 상무이사→중경임시정부 내무부장(겸 국무위원)→환국 후 반탁위원회 결성→(대북)정치공작대와 행정연구반 조직→국민대학창립(학장)→자유신문사 사장→남조선과도입법원 민선대의원→대한체육회장→남조선과도입법원 의장→제헌국회의원 무투표 당선→제헌국회와 2대국회 의장→대한국민당 결성(위원장)→민주국민당 결성(위원장)→3선의원 당선→호헌동지회 결성주도→재야정치연합전선으로 민주당 창당(대표최고의원)→민주당 대통령후보→40만인파 한강백사장에서 대통령후보 연설→호남지방유세차 호남선 열차 안에서 뇌일혈로 사망.

해공(海公) 신익희(申翼熙) 선생의 약술한 경력이다.

조선말기 사회적 모순이 복합적으로 폭발하던 1894년에 태어났다. 동학혁명이 일어나고, 김옥균이 상하이에서 홍종우에게 암살되었으며, 일본군이 경복궁을 침범하고, 청일전쟁의 발발, 갑오개혁의 시작, 순창에서 전봉준이 체포되는 등 그야말로 격동과 격변의 해이다. 

수평적인 정권교체 앞두고 급서
 
해공(海公) 신익희
 해공(海公) 신익희
ⓒ 나무위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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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동기에 태어난 해공 선생은 조국독립과 민주화를 위해 헌신하다가 1956년 대통령선거 도중에 62세를 일기로 숨졌다. 생애의 전반기 대부분을 독립전장에서 후반기는 이승만의 폭정에 맞서 민주전선에서 싸웠다. 쉴 틈이 없는 생애이고 폭풍우 같은 삶이었다. 

독립운동가 출신 중에 신생 대한민국 정부에 참여한 분이 적지 않지만, 임시정부의 요인으로서 두 차례의 국회의장과 민주세력의 뿌리라고 할 수 있는 민주당을 창당하고 대통령후보까지 이른 분은 그가 유일하다.

그것도 국민의 절대적인 지지 아래 수평적인 정권교체를 목전에 두고 급서함으로써 국민의 애통함과 민주주의가 굴절되는 아픔을 불러왔다. 사후에 실시된 선거에서 추모표가 무려 200만 표가 넘었다. 

1956년 당시, 서울 인구가 150만 정도일 때 교통이 불편했던 서울 한강변 모래밭에 40만 인파가 참여할만큼 그에 대한 국민의 기대와 신뢰는 높았다. 민주당이 "못살겠다 갈아보자"는 선거구호를 내걸자 자유당은 이에 대해 "갈아봤자 더 못 산다"는 어처구니 없는 구호로 맞섰다.
 
신익희 후보를 애도하는 인파(1956년5월)
 신익희 후보를 애도하는 인파(1956년5월)
ⓒ 한국사진기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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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공 선생의 서거로 정치는 다시 이승만의 독무대가 되고 부정부패는 더욱 심해졌다. 민주주의는 형해화되고 주요 외신은 "한국에서 민주주의를 바라기는 쓰레기통에서 장미가 피기를 바라는 것과 다르지 않다"고 조롱하였다. 실제로 이승만 정권의 폭정은 4년 뒤 3·15부정선거를 획책하기에 이르고 마침내 청년·학도들의 봉기로 4·19혁명이 일어나면서 종식되었다. 전국적으로 186명의 사망자와 6026명(당시 통계)의 부상자가 발생했다. 이승만 정권의 경찰과 깡패들에게 희생된 것이다. 

그때 해공 선생이 급서하지 않고 집권했으면 그의 해박한 정책과 경륜으로 우리나라는 일찍 근대화를 이루고 한국의 민주주의는 더욱 빨리 개화되었을 것이다. 불행하게도 그는 너무 일찍 눈을 감았고, 이승만의 퇴출 이후에는 박정희·전두환·노태우 등 군사독재자들의 정권탈취로 30년이 넘는 군부독재를 겪어야 했다. 
 
제3대 정부통령 민주당 신익희와 장면 후보 벽보(1956. 5.).
 제3대 정부통령 민주당 신익희와 장면 후보 벽보(1956. 5.).
ⓒ 국가기록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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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공 선생은 일본 유학시절 때부터 남다른 애국심을 보였다.

안재홍·송진우·문일평 등과 학우회를 조직하여 회장을 맡으며 기관지 <학지광(學之光)>을 발행하여 유학생들의 민족의식을 고취시키고, 백남훈 등과 비밀결사 조선학회를 조직하여 2·8독립운동의 주도세력을 형성하였다.

중국에 망명해서는 임시정부 참여는 물론 사회주의 계열의 단체·정당에도 참여하여 통합을 추진하는 등 폭넓게 활동하였다. 그리고 태평양전쟁을 전후하여 임시정부의 좌우합작으로 다시 내무부장의 중책을 맡았다. 환국 후에는 임시정부 내무부장의 명의로 '국자(國字) 제1호'와 제2호를 잇따라 발령하고 "현재 전국 군정청 소속 경찰과 한인 직원은 전부 본 임시정부 지휘하에 예속된다"고 선포, 미군정과 맞섰다.

임시정부 지도부의 단독정부 불참노선에도 불구... 현실정치 참여
 
1919년 9월 17일 제6차 임시의정원 폐원식을 기념해 찍은 사진으로, 앞줄 왼쪽부터 이유필과 신익희, 윤현진, 안창호, 손정도, 정인과 한 사람 건너 황진남, 둘째 줄 오른쪽 김구, 다섯째 줄 왼쪽 첫 번째 여운형 등이 보인다.
▲ 1919년 9월 17일 제6차 임시의정원 폐원식을 기념해 찍은 사진으로, 앞줄 왼쪽부터 이유필과 신익희, 윤현진, 안창호, 손정도, 정인과 한 사람 건너 황진남, 둘째 줄 오른쪽 김구, 다섯째 줄 왼쪽 첫 번째 여운형 등이 보인다. 1919년 9월 17일 제6차 임시의정원 폐원식을 기념해 찍은 사진으로, 앞줄 왼쪽부터 이유필과 신익희, 윤현진, 안창호, 손정도, 정인과 한 사람 건너 황진남, 둘째 줄 오른쪽 김구, 다섯째 줄 왼쪽 첫 번째 여운형 등이 보인다.
ⓒ 역사학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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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구 주석과 김규식 부주석 등 임시정부 지도부의 단독정부 불참노선에도 불구하고 그는 현실정치에 참여한다. 남북협상과 관련해서 '여호모피론(與狐謀皮論)' 즉 "여우와 더불어 값진 모피를 얻을 의논을 한다는 것은 의미가 없다"는 주장을 폈다. 

신익희는 전통적 소양과 근대적 소양을 균형 있게 접목시키고 외교·법률·내무에 능통한 문인적 풍모이면서도 군사·무력의 중요성을 아는 지도자, 풍찬노숙의 민족운동가와 합리적 선택에 능한 현실정치인의 면모가 적절히 배합된 드문 인물로 꼽힌다. (주석 1)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원 성립 당시의 도산. 앞열 왼쪽에 신익희 선생이 보인다.
▲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원 성립 당시의 도산. 앞열 왼쪽에 신익희 선생이 보인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원 성립 당시의 도산. 앞열 왼쪽에 신익희 선생이 보인다.
ⓒ 이영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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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과 민주화운동에 초석을 놓은 해공 신익희 선생의 파란많은 삶을 추적한다. 그의 생애는 독립운동사이고 해방전후사이며, 1950년대 정당사·민주투쟁사이다. 


주석
1> 도진순, 「해방전후 신익희의 노선과 활동」, 『한국현대사인물 연구(2)』, 94쪽, 백산서당, 1999.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인물열전 / 해공 신익희 평전] 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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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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