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6년 시작돼 70년이 넘는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프랑스의 칸 영화제는 이탈리아의 베니스 영화제, 독일의 베를린 영화제와 함께 세계 3대 영화제로 꼽히는 권위 있는 영화 시상식이다. 하지만 1960년대부터 꾸준히 작품을 진출시킨 베를린 영화제, 베니스 영화제와는 달리 칸 영화제는 유난히 한국영화에 인색했다. 2000년 임권택 감독의 <춘향뎐>이 칸 영화제 사상 첫 경쟁 부문 진출작이었을 정도.

하지만 한국영화는 2002년 임권택 감독이 <취화선>으로 감독상을 받은 것을 시작으로 2004년 박찬욱 감독의 <올드보이>가 심사위원 대상을 수상하며 세계적 권위의 영화제에서 위상을 떨쳤다. 그리고 2007년에는 <밀양>의 전도연이 여우주연상을 수상하는 기염을 토했다. 한국 관객들이 세계적인 배우들을 보며 감탄하던 시절을 지나 이제는 세계의 관객들이 우리 배우를 보며 감탄하는 시대가 된 것이다.

전도연이 처음부터 우아하게 '여왕의 품격'을 뽐냈던 것은 아니다. 데뷔 초기 각종 드라마에서 주로 귀여운 캐릭터를 도맡아 오던 전도연은 1997년 스크린 데뷔와 함께 영화배우로 크게 성공하며 반전의 계기를 맞았다. 그리고 전도연이 한창 다작을 하던 1990년대 후반, 그녀의 필모그래피에는 20대 후반의 나이에 17세 소녀를 연기했던 동화 같은 멜로 영화 <내 마음의 풍금>이 보물처럼 자리하고 있다.
 
 <내 마음의 풍금>은 서울관객 15만에 그쳤지만 관객들에게 높은 평가를 받은 작품이다.

<내 마음의 풍금>은 서울관객 15만에 그쳤지만 관객들에게 높은 평가를 받은 작품이다. ⓒ 아트힐(주)

 
충무로 '여성배우 원톱시대'를 열었던 전도연

'유느님' 유재석과 서울예대 방송연예과 동기이기도 한 전도연은 1992년 김찬우, 장동건 주연의 청춘드라마 <우리들의 천국> 시즌2를 통해 본격적인 연기 활동을 시작했다. 지금은 고인이 된 최진영과 풋풋한 러브 라인을 형성하던 전도연은 1994년 드라마 <종합병원>의 간호사 역을 통해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이후 <젊은이의 양지>와 <사랑은 블루> 등에 출연한 전도연은 1997년 장윤현 감독의 <접속>을 통해 영화에 데뷔했다.

<접속>에서의 절제된 멜로 연기로 1997년 대종상과 청룡영화제 신인상을 휩쓴 전도연은 1998년 박신양과 함께 출연한 영화 <약속>으로 서울에서만 70만 관객을 동원했다. 그리고 전도연은 1999년 <내 마음의 풍금>으로 대종상과 청룡 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휩쓸었다. 바야흐로 대한민국 영화계에 '전도연 원톱시대'가 열린 것이다. 

<내 마음의 풍금>에서 순수함의 정점을 연기한 전도연은 차기작 <해피엔드>를 통해 관객들을 경악시켰다. 류승완 감독의 장편 데뷔작 <피도 눈물도 없이>, 배용준의 영화 데뷔작 <스캔들-조선남녀상열지사>, 황정민의 잠재력을 폭발시킨 <너는 내 운명>에 잇따라 출연한 전도연은 2007년 <밀양>으로 드디어 '칸의 여왕'에 등극했다. 2002년과 2005년에는 TV로 눈을 돌려 드라마 <별을 쏘다>와 <프라하의 연인>을 히트시키기도 했다.

2007년 결혼 후에도 2010년 임상수 감독의 <하녀>를 통해 건재를 과시한 전도연은 2010년대 들어 <카운트다운>, <무뢰한>, <집으로 가는 길> 등이 연속으로 손익분기점을 넘지 못했다. 2015년에도 <협녀, 칼의 기억>, 그리고 <남과 여>가 연속으로 흥행에 성공하지 못했다. 하지만 전도연은 2016년 11년 만에 출연한 드라마 <굿 와이프>에서 명불허전의 연기를 선보이며 '역시 전도연'이라는 찬사를 받았다.

누구보다 많은 작품에 출연하며 '다작'을 하던 1990년대 중·후반과는 비교할 수 없지만 전도연은 2019년 <생일>과 작년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짐승들>에 출연하며 꾸준한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2019년 연말 800만 관객을 동원한 영화 <백두산>에서 이병헌의 아내로 특별출연한 전도연은 올해도 한재림 감독의 항공 재난영화 <비상선언>과 하반기에 방영될 JTBC 드라마 <인간실격>을 통해 관객, 그리고 시청자들을 만날 예정이다. 

담임 선생님을 짝사랑하는 시골 마을의 17세 초등학생
 
 전도연은 당시 실제 나이보다 11살이나 어린 17세 소녀 역할을 완벽하게 소화했다.

전도연은 당시 실제 나이보다 11살이나 어린 17세 소녀 역할을 완벽하게 소화했다. ⓒ 아트힐(주)

 
1960년대 강원도 산골 마을에서 어머니와 어린 세 동생을 돌보며 사는 홍연(전도연 분)은 고등학교에 다녀야 할 나이(17세)에 초등학교 5학년에 다니는 늦깎이 학생이다(현재를 기준으로 생각하면 상상할 수 없는 일이지만 1950~1960년대 시골에서는 집안 사정에 따라 학교를 늦게 보내거나 아예 안 보내는 가정이 다반사였다). 그리고 홍연이 다니는 초등학교에 사범대학교를 막 졸업한 21세의 미남 선생님 강수하(이병헌 분)가 부임한다.

홍연은 잘 생기고 친절한 담임 선생님 수하를 보고 첫 눈에 반하지만 수줍음이 많아 눈도 제대로 마주치지 못한다. 하지만 수하는 그런 홍연의 맘도 모른 채 4살 연상의 동료교사 양은희 선생님(이미연 분)에게 관심을 갖는다(물론 실제로는 이병헌이 이미연보다 한 살 연상이다). 그런 사실을 알 리가 없는 홍연은 청소 시간에 장난으로 팔꿈치를 꼬집는 장난을 친 강수하의 행동에 필요 이상으로 의미를 부여하며 혼자 상상의 나래를 펼친다.

수하와 은희가 교실에서 함께 풍금을 치며 야릇한 분위기를 만드는 걸 목격한 아이들은 학교 내에 수하와 은희의 스캔들을 퍼트리고 홍연은 그 사실에 분개한다. 홍연이 일기장에 양은희 선생님을 욕하며 25세이던 그녀의 나이를 멋대로 30세까지 올려 버리는 귀여운 질투심은 <내 마음의 풍금>에서 가장 유쾌한 장면이다.

1년 동안 5학년 담임을 맡으면서 학생들과 정이 많이 들었지만 수하는 결국 학교를 떠나 서울로 돌아가기로 결심한다. 그리고 수하가 떠나는 날 아이들이 모여 배웅하는 것으로 영화는 슬프게 막을 내리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에필로그 형식으로 보여지는 진짜 마지막 장면에서 홍연과 수하의 멜로가 어떤 식으로 결말이 났는지 살짝 보여준다. 조금은 슬프게 마무리된 영화의 끝자락에서 관객들이 흐뭇한 미소를 지을 수 있는 이유다.  

<내 마음의 풍금>을 보는 또 하나의 재미는 바로 1960년대 시골 마을의 초등학교를 옮겨놓은 듯한 소품과 디테일이다. 특히 장학사가 방문하기 전날에 대청소를 하는 학생들이나 신체검사 때 유독 부끄러워하는 여학생을 따로 불러 검사해주는 여선생님의 배려는 그 때 그 시절의 향수가 떠오른다(장학사가 군대 사단장처럼 높은 권력(?)을 가졌던 것과 남녀 학생이 강당에 모여 함께 신체검사를 받던 문화는 1980년대까지 이어졌다).

연하남 흔들어 놓고 훌쩍 유학 떠난 나쁜 누나
 
 이병헌은 전도연의 마음도 모른 채 이미연에게 마음을 빼앗겨 전도연의 마음을 아프게 한다.

이병헌은 전도연의 마음도 모른 채 이미연에게 마음을 빼앗겨 전도연의 마음을 아프게 한다. ⓒ 아트힐(주)

 
최근엔 <도둑들>(김윤석, 김혜수, 이정재, 전지현, 김수현)이나 <신세계>(최민식, 황정민, 이정재)처럼 스타 배우들이 한 작품에 대거 출연하는 경우를 심심찮게 볼 수 있다. 하지만 90년대까지만 해도 이름 있는 배우들이 한 작품에 몰아서 출연하는 것은 결코 흔한 일이 아니었다. 일단 제작비 문제가 가장 큰 걸림돌이었고 주연을 고집하는 배우들(혹은 소속사)의 자존심 또한 쉽게 극복하기 어려운 문제였다.

그런 점에서 보면 <접속>과 <약속>을 연속으로 히트시키며 최고의 주가를 올리던 신예스타 전도연과 <넘버3>와 <여고괴담>을 통해 슬럼프 탈출에 성공한 '1980년대 책받침 여신' 이미연이 스케일이 크지 않은 영화 <내 마음의 풍금>에서 뭉친 것은 꽤나 의미 있는 일이었다. 특히 상대적으로 비중이 작은 양은희 선생님을 연기한 이미연의 결단과 희생이 없었더라면 <내 마음의 풍금>은 재미와 균형을 유지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사랑이 꽃피는 나무>의 미영이 그대로 자라 교사가 된 듯한 양은희는 아이들을 인간적으로 교육하려고 애쓰는 착한 선생님이다. 하지만 특유의 청순한 미소를 가진 죄(?)로 연하남인 수하의 마음을 흔들었다. 하모니카 연주와 풍금 합주로 수하의 마음을 설레게 한 은희는 수하가 고백하기로 결심한 그날, 애인과 함께 샌프란시스코로 떠나 버린다(수하는 찌질하게 고백도 못해 보고 술에 취해 방구석에서 음악을 틀어 놓고 울음을 터트린다).

이미연은 <내 마음의 풍금>으로 청룡영화제에서 여우조연상을 수상했고 2001년 본인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드라마 <명성황후>를 만났다(비록 완주는 못했지만). 이미연은 2002년 영화 <중독>에서 시동생과 형수님 사이로 이병헌과 재회했고 2013년 예능 프로그램 <꽃보다 누나>에서는 털털한 성격으로 '책받침 여신'을 기억하던 남성팬들을 충격에 빠트렸다. 2015년에는 <응답하라 1988>에서 성덕선(혜리)의 40대를 연기하기도 했다.
그 시절, 우리가 좋아했던 영화 내 마음의 풍금 전도연 이병헌 이미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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