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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언어가 가리키는 대로 생각한다

사피어와 워프는 무지개가 몇 가지 빛깔인가를 물었더니 부족마다 쓰는 말에 따라 대답이 달랐다. 거기서 영감을 받은 사피어와 워프는 세계나 생각에 앞서 말이 먼저 있었다는 '언어결정론'을 내놓는다. 그럴 듯하다.

워프는 자기 말이 옳다는 것을 증명할 요량으로 이누이트에게는 눈(영어 snow)을 가리키는 말이 400개나 된다고 한다. 그런데 이누이트 사람들이 쓰는 말을 톺아보니 내리는 눈, 쌓인 눈, 날리는 눈, 바람에 한곳에 쌓인 눈, 이렇게 네 개였다고. 상식의 잣대로 보면 어떤 대상을 가리키는 말이 많으면 많을수록 이런 눈 저런 눈을 섬세하게 가릴 수 있는 힘이 있다고 할 수 있겠다.

그렇지만 모국어에 마른 눈, 젖은 눈, 흩날리는 눈, 쌓인 눈, 비와 섞인 눈을 구별하는 말이 없다손 쳐도 우리 눈이 그것을 분간하지 못하는 건 아니다. 뒷날 이누이트에게 눈을 뜻하는 말이 400개라고 했던 워프의 말은 거짓말로 드러난다. 이 가설을 깨뜨린 사람이 스티븐핑커다. 그는 우리는 한국어나 영어나 일본어나 중국어로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생각의 언어'로 생각한다고 주장하면서 이 생각의 언어를 '멘탈리즈(mentalese)'라고 했다.

우리 말에도 눈을 가리키는 말이 많다
 
눈사람
 눈사람
ⓒ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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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긴 해도 어떤 대상을 가리키는 말이 있는 것과 없는 것은 분명히 다르다. 사피어나 워프가 우리 말을 알았다고 하면 눈을 가리키는 말이 어쩌면 이렇게 많을까 하고 깜짝 놀랐겠다. 어쩌면 자신들 주장의 근거로 삼았을 수도 있겠다.

우리 눈에는 하늘에서 내리는 눈이라고 해서 다 똑같은 눈이 아니다. 싸잡아 눈이라고 말하기도 하지만 때에 따라 눈 상태에 따라 다른 이름을 쓴다. 이를테면, 가랑눈, 가루눈, 길눈, 도둑눈, 숫눈, 솜눈, 떡눈, 쇠눈, 마른눈, 밤눈, 봄눈, 사태눈, 설눈, 소낙눈, 싸락눈, 자국눈, 잣눈, 첫눈, 포슬눈, 풋눈, 함박눈, 진눈깨비 같은 눈 이름을 보라.

여기에 눈 이름 하나를 더 보탠다. 허깨비눈. 우리말샘에서는 "'함박눈'의 방언(강원)"이라고 실없이 풀어놨다. 함박눈은 눈송이가 굵고 탐스러운데다 솜 모양의 눈이 마치 함박꽃 같다 하여 붙은 이름이다. 허깨비눈도 눈송이가 굵다는 점에서는 같지만 솜처럼 잘 뭉쳐지지 않는 눈을 말한다.

뭉치면 푸슬푸슬 으스러진다. 눈사람을 만들어보면 금방 알 수 있다. 굴리기만 해도 굴굴굴 뭉쳐지는 눈이 있는가 하면 이리 굴려도 저리 굴려도 뭉쳐지지 않는 눈이 있다. 함박눈처럼 내리는데 잘 뭉쳐지지 않는 눈을 '허깨비눈'이라고 한다.   허깨비눈, 함박눈 같지만 함박눈이 아닌
 
우리말샘에서 찾아본 '허깨비눈'
 우리말샘에서 찾아본 "허깨비눈"
ⓒ 국립국어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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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말에 '­깨비'가 붙어서 된 말을 보자. 도깨비, 방아깨비, 지아깨비, 지저깨비, 진눈깨비, 허깨비다. 도깨비는 너나없이 아는 그것이다. 우리 지역말로는 '톳제비'라고도 한다. 방아깨비는 메뚜깃과 곤충이다.

19세기 <물명고>에는 '방하아비'로 나온다. 그뒤 '방아까비'로 바뀌었다가 '방아깨비'가 되었다. 이때 '­깨비'는 본래 '아비(아버지·父)'의 뜻으로 쓴 뒷가지로 보인다. 지아깨비는 본디 깨진 기왓장 조각인데 하찮은 물건이나 사람을 가리키는 말로도 쓴다. '기와개비'가 '지와깨비'로 되었다가 '지아깨비'로 달라진 듯하다.

진눈깨비는 눈과 비가 섞여 내리는 것을 말한다. '진+눈+개비'가 아닐까. 물기가 많은(진) 눈 알갱이라는 뜻으로 만든 말이지 싶다. 성냥개비에서 보듯 가늘게 쪼갠 나무토막이나 기름한 토막의 낱개를 '개비'라고 하지 않나. 나무를 깎거나 다듬을 때 나오는 부스러기를 '지저깨비'라고 하는데, '개비'가 '깨비'가 된 것으로 보인다.

허깨비는 기가 허해 착각을 일으켜 없는데 있는 것처럼 보이는 물체를 말하거나 생각보다 아주 가벼운 물건을 허깨비라고 한다. 허깨비는 말 그대로 헛것이다. 겉보기와 다르게 내실이 없다. 말이 길어졌지만 허깨비눈은 함박눈처럼 눈송이가 큰데 보기와 다르게 잘 뭉쳐지지 않는, 마른 함박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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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말과 글쓰기 교육, 어린이문학에 관심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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