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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무위도>
 소설 <무위도>
ⓒ 황인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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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녀가 생문을 빠져나오자 탑림의 북쪽 가장자리까지는 별 다른 장애가 없이 다다랐다. 관조운은 비교적 나중에 건립돼 보이는 북쪽 끝 열의 탑 기좌부에 적힌 법명을 읽어 나갔다.

"혜명(慧明), 각원(覺元), 도인(度引), 공문(空門), 굉지(宏志), 대현(大賢), 법수(法修)…… 원희(圓熙). 찾았어."

관조운이 찾은 허산의 탑은 높이 여덟 자에 팔각 삼층탑이었다. 기좌에 연화의 문양이 있고 탑신은 벽돌로 쌓았으며 탑찰(塔刹) 역시 일반적인 기준으로 수수하게 장식되었다.

관조운이 혁련지를 바라보았다. 그녀가 추론한 대로 사운첩에 적혀있는 자작시의 면 숫자로 스승님께서 남기신 유품을 찾을 수 있을까. 관조운은 사뭇 궁금하면서도 한편으론 그녀를 믿었다.   

혁련지는 탑신의 이층 서북면을 살피더니 고개를 갸웃하며 입을 열었다. 
"이상해요, 서북면의 44번째 괘 천풍구(天風姤)와 동북면의 53번째 괘 풍산점(風山漸)에서 숫자에 뭔가 의미가 있을 것이라 여겼는데, 막상 탑면을 보니 벽돌이 엇갈려 있어 어디서부터 숫자의 기준을 잡아야할지 모르겠어요. 벽돌의 위치도 가지런하지 않고."

혁련지는 입을 꼭 다물고 생각에 잠겼다. 서산 너머로 떨어지기 직전인 보름달이 마지막 인사를 하듯 구름 사이로 고개를 내밀었다. 사위가 은빛으로 출렁였다. 탑신에 비친 구름의 꼬리가 서서히 지나가고 있다.

혁련지가 손을 들어 손가락으로 벽돌 하나를 밀어보았다. 꼼짝도 하지 않자 그녀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리고는 다시 생각에 잠기었다. 이윽고 다시 한번 손을 들어 세 칸 옆에 있는 벽돌을 밀었다. 그 벽돌 역시 움직이지 않았지만 그녀의 표정은 환해졌다.

"이거예요. 다른 벽돌과 접착의 강도가 달라요. 회반죽으로 붙여놓았긴 하지만 양도 작고 굳은 시기도 달라요."

말을 하자마자 그녀는 심운검을 뽑아 칼끝으로 벽돌의 가장자리를 파냈다. 살짝 살짝 몇 번인가 파내더니 검을 거꾸로 잡고 검경 끝으로 벽돌의 한쪽 끝을 지그시 밀었다. 벽돌의 한쪽이 밀리며 공간이 나타났다. 그녀가 조심스럽게 벽돌을 꺼내자 텅 빈 공간이 드러났다. 그녀는 손을 넣어 길쭉한 나무상자를 꺼냈다. 상자는 길이가 어른 손바닥 두 뼘만 하고 너비는 세치 정도 되었다.

그녀가 관조운을 바라보자 그는 살며시 고개를 끄덕였다. 혁련지가 칼끝으로 접합부분을 벌리자 상자 안은 두터운 한지로 메워져 있다. 한지 뭉치를 꺼내 겹겹을 풀자 융단주머니가 나왔다. 주머니 입구를 열어 안에 있는 물건을 꺼내자 소담스런 접부채가 나왔다. 혁련지가 부채를 건네자 관조운이 펴보았다. 차르륵 소리와 함께 부채가 펼쳐졌다. 자세히 살필 여가는 없었다. 그는 다시 부채를 통 안에 다시 넣고 여몄다.

혁련지는 이어서 탑신의 이층 동북면으로 갔다. 이번에는 주저없이 벽돌의 가장자리를 파냈다. 잠시 후 벽돌을 뽑아내자 그곳에서도 공간이 나타났다. 그녀가 손을 넣어 나무상자를 꺼낸 다음 뚜껑을 열자 길쭉한 원통이 보였다. 이 상자 역시 습기와 부패를 방지하기 위해 약품이 섞인 한지를 나무상자 안에 채워놓았다.

그녀가 겹겹이 싼 종이를 풀자 한 자 길이의 대나무통이 나왔다. 마개가 있는 한쪽 끝을 열고 들여다보니 둘둘 만 종이가 보였다. 확인하지 않아도 그림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관조운은 부채가 들어 있는 나무상자를 허리춤에 묶고 혁련지는 그림이 들어 있는 대나무통을 품에 넣었다. 혁련지는 꺼낸 벽돌을 조심스럽게 제자리에 끼어놓았다.

"사매, 어떻게 찾았어?"
관조운이 궁금함을 못참고 물었다.

"의외로 간단했어요. 숫자는 바로 좌표였으니까요. 53은 오른쪽에서 다섯 번째와 위에서 세 번째를 가리키는 것이었어요. 너무 깊이 생각했다간 허를 찔리기 십상이었어요."
"빨리 나가지. 다시 팔괘진에 갇힐 수도 있으니 북쪽 숲으로 가서 소실봉을 우회하여 향적암으로 가는 게 나을 것 같아."

"그렇게 해요. 여기는 진이 설치되어 있지 않은 게 왠지 불안해요. 저쪽 숲에서 보면 이곳이 훤히 노출돼 있어 탐지되기 쉬운 위치예요."
혁련지가 낮은 소리로 말했다. 남녀는 탑림을 나와 숲으로 향하는데 어둠 속에서 누군가 불쑥 나왔다.

"시주님들은 뉘시기에 야심한 밤에 본사의 금구(禁句)에 계신지요."
나타난 사람은 한쪽 손에 봉을 쥔 호법원의 순찰승이다.

관조운과 혁련지는 순식간에 눈빛을 교환했다. 그리고는 순찰승이 나온 반대 방향 숲으로 쏜살같이 뛰었다. 휘이익 하는 휘파람소리가 밤하늘을 찢었다. 순찰승이 동료들을 부르는 신호다. 남녀가 다급하게 경공을 펼치며 숲으로 진입하려는데 일단의 승려들이 오히려 숲에서 튀어나왔다. 모두 일곱 명으로 각각 봉을 쥐고 일렬로 서서 남녀를 막았다.

"양상군자나 서생원이 아니신 바에야 본사의 금구에 들르셨다면 그 이유를 밝혀야 하지 않겠습니까?"
가운데 있는 땅딸막하고 단단해 보이는 승려가 한손 합장을 하며 한 발짝 앞서 나오며 말했다. 관조운과 혁련지는 서로 쳐다보았다. 무어라 할 말이 있겠는가. 탑림에서 뭔가를 훔쳐왔다고 할 수도 없고, 산책이나 구경 나왔다고 하기엔 밤이 너무 깊었다.

"다시 한번 묻겠소이다. 시주님들의 정체가 무엇이고, 무엇 때문에 야심한 시각에 본사의 금단 구역에 계셨는지요? 말씀이 없으시다면 천상 불력의 힘이라도 빌려야겠소이다."
땅딸막한 승려가 봉을 땅에다 쿵하고 찍었다.
관조운이 어깨에 멘 요운검을 뽑자 혁련지도 허리에 찬 심운검을 뽑았다. 남녀는 정면 돌파 밖에 없다고 결론을 내린 것이다.

"어허, 그렇게 나오신다면 우리도 사양할 바가 아니오. 빈승의 손때가 불제자답지 않다고 탓하지 말기 바라오."
땅딸막한 승려가 야차탐해세(夜叉探海勢)(주)로 서서 말하는 사이 나머지 승려들이 관조운과 혁련지를 빙 둘러싸기 시작했다. 진(陣)으로 합공(合攻)을 할 모양이었다.

이때 혁련지가 오른쪽에 있는 승려를 향해 심운검으로 급작스레 찔러 들어갔다. 상대는 기습에 당황하며 한 걸음 물러났다. 혁련지는 기세를 타고 청학십삽식 중의 하나인 도설간운(度雪干雲)으로 연속 공격하였다. 미처 자세를 갖추지 못한 승려는 옆으로 몇 걸음 더 물러섰다. 그 사이 혁련지는 사형! 하고 외쳤다. 관조운은 혁련지가 외친 의미를 알아차리고 그녀가 확보해 놓은 공간 사이로 빠져나가 숲으로 뛰어갔다. 이어 혁련지도 검을 거두고 따라갔다. 다급한 소림승들이 남녀의 뒤를 쫓았다.

숲은 전나무가 주종인 침엽수림이었다. 숲으로 오 장 정도 들어간 간 뒤 혁련지가 경신술을 거두었다. 관조운도 따라 멈춰 섰다.

"어차피 도망만 갈 순 없어요. 평지보다는 이곳이 나을 거예요."
혁련지가 짧게 말했다. 소림승들이 펼치려는 진법은 주로 평지에서 위력을 발휘하는 집단 공격술이다. 게다가 그들은 모두 길이가 일곱 자 세치인 장봉을 들고 있기에 나무들이 촘촘히 서 있는 숲에선 동작이 제한되거나 원활하지 못하게 된다. 

숨 한번 고르지도 전에 승려들이 도착해 남녀를 다시 에워쌌다.  
"허허, 여시주께서 형세의 득실을 잘 파악하는구려. 하오나 소림 제자들은 지형의 유무를 개의치 않고 진을 펼친다오. 혹시 소림 나한진이라고 들어보셨는지요?"
"흥, 불제자들이라는 사람들이 어찌 이리 중생을 핍박하는 거요. 불가의 도에선 자비(慈悲)가 으뜸이라 들었는데, 아녀자를 궁지에 몰아넣고 겁박하는 게 소림의 자비인가요?"
혁련지가 차가운 말투로 내뱉었다.     

"여시주의 말이 지나치오. 우리는 그저 시주님들이 무슨 이유로 본사의 율(律)을 어겼는가만 밝히고자 할 뿐이오. 우리가 아무런 이유 없이 중생을 핍박한다니 가당치 않소이다."
땅딸보 승려가 비위가 상한 듯 어투는 정중하되 목소리는 높아졌다. 그는 더 이상 말다툼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는지 장봉을 허공에다 두어 번 휘둘렀다. 부웅 붕, 하는 소리가 어둠을 찢었다. 본래 소림승은 선공(先攻)을 하지 않는 게 관례였지만, 기습에 진이 무너지고 혁련지의 따지는 말에 분기가 솟았는지 땅딸보승이 먼저 공세를 취했다. 

땅딸보승은 선인좌동세(仙人坐洞勢)로 봉 끝을 남녀 사이의 가슴 높이 두더니 얍, 하는 기합과 함께 공중에 튀어올랐다. 그는 공중에서 반바퀴 몸을 돌려 관조운을 향해 도타형극(倒拖荊棘)으로 공격했다. 도타형극은 역국(逆局: 거꾸로 된 형국)으로서 앞을 치는 척 하다가 뒤로 재빨리 움직여 좌우를 찔러나는 것으로 마치 혁련지를 공격하는 척 하면서 공중에서 몸을 바꿔 관조운을 향한 것이다. 

관조운이 비록 문(文)으로 방향을 바꿨다지만 한때 강호제일 비천문의 가르침을 접했던 터라 검으로 좌중단으로 찔러오는 봉을 튕겨내고는 비영문의 독문절기 우화도룡(羽化屠龍)으로 검을 비스듬히 베면서 반격을 했다. 그러자 상대 땅딸보승은 상체를 뒤로 젖히면서 검세를 피하자마자 상체가 되돌아오는 탄력으로 오른손으로 장(掌)을 만든 다음 관조운의 가슴을 향해 쭉 뻗었다. 관조운은 자신의 공격이 허공을 갈랐음을 느끼고 뒤로 물러서는데 상대의 장이 가슴으로 꽂히는 것을 보고 급히 몸을 돌렸다.

그러나 상대 장의 속도 또한 빨라 관조운이 완벽하게 피하지 못하고 왼어깨를 내주고 말았다. 퍽! 하는 소리와 함께 관조운은 서너 걸음 비틀거리며 물러갔다. 땅달보승이 연이어 공격을 하려는 순간 혁련지가 땅달보승을 향해 상하좌우의 요혈을 노리고 초식을 펼쳤다. 치명적인 살수에 가까웠다. 이에 땅달보승은 화급히 자신의 공세를 거두고 대여섯 걸음 물러났다. 

"여시주의 독기가 가을철 독사 같으니, 내 어찌 손속에 정을 두리오."
땅달보승은 이번에는 오룡번강세(烏龍飜江勢)를 취하며 혁련지를 노려보았다.

사실 이번 한 수의 교환으로 서로의 무위(武位)는 파악이 되었다. 우두머리 땅딸보승 혼자만으로도 관조운이나 혁련지를 동시에 상대해도 밀리지 않을 것이다. 하물며 일곱이나 더 있고, 그들이 진(陣)으로써 합격(合擊)을 한다면 결과는 뻔한 것이다. 그렇다고 순순히 항복을 하고 유품을 내 줄 순 없다.

혁련지는 땅달보승을 차갑게 노려보다가 느닷없이 뒤쪽의 승려를 향해 돌진했다. 활로를 열어 탈출을 시도해 보려는 것이다. 원진(圓陣)의 지름이 열 보(步) 가량인데 혁련지가 다섯 보를 순식간에 좁히자 뒤에 있던 승려는 봉을 일제금세(一提金勢)로 잡고 혁련지의 공격을 받아냈다. 탕, 탕, 탕. 검과 봉이 부딪치는 소리가 울렸다. 승려는 한보 반을 물러섰지만 길을 내주진 않았다. 아까의 실수를 염두에 둔 모양이었다.

관조운과 혁련지는 여전히 진에 갇혔다. 그들은 웬일인지 먼저 공격하진 않았다. 그렇다고 진법을 풀지도 않았다. 풀기는커녕 조금씩 조여오고 있었다. 사아악, 사아악 숨소리만이 숲의 정적을 조금씩 잘라냈다. 관조운은 초조해졌다. 땀방울 하나가 등줄기를 타고 내려갔다. 이때였다.

"예로부터 소림승은 생명(生命)을 근본으로 삼고 활인(活人)을 제일로 한다더니, 강호에 떠도는 헛소문에 불과했구먼. 스스로 무공의 높음만 믿고 아녀자가 있는 일행을, 그것도 다수가 둘러싸다니 손바닥만 한 허명이라도 있는 문파라면 차마 이러지는 않을 것이네."

걸걸한 목소리가 숲의 적막을 깼다. 저음이면서도 귓속을 파고드는 것 같은 힘이 느껴져 목소리만으로도 내공이 깊은 자임을 알 수 있었다. 말의 내용이 사뭇 공격적인지라 땅딸보승은 이맛살을 찌푸리며 소리가 나는 쪽을 보았다.

(주) 창(봉)을 잡은 채로 걷고 서고 살펴서 수비하는 방법. 상대를 만나면 세를 바꾸고, 상황에 따라 응용함-무비지(武備志)에서

덧붙이는 글 | 월, 수, 금 연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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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디고』, 『마지막 항해』, 『책사냥』, 『사라진 그림자』(장편소설), 르포 『신발산업의 젊은사자들』 등 출간. 2019년 해양문학상 대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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