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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무위도>
 소설 <무위도>
ⓒ 황인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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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장>

일천여 명의 승려가 거주하는 소림사는 항간에 3원(院)5전(殿)8각(閣)24당(堂)이 있다고 전해진다. 주막에서 곡주 한 잔 걸치다가 24당(堂)이 맞다 아니다 36당(堂)이 틀림없다, 하며 대거리하다 종내에는 서로의 상투를 잡고 흔드는 잡배들이 가끔 있긴 하지만 대부분의 장삼이사들은 그저 소림사의 규모가 매우 크다고만 알고 있지 건물의 정확한 숫자나 위치를 파악하려고 있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장경각(藏經閣)은 달마원(達磨院)과 더불어 소림의 자랑이다. 장경각은 경서(經書)과 무서(武書) 및 장적(帳籍) 등을 보관한 서고이다. 초조 달마대사가 저술한 역근경을 비롯한 각종 경전과 역대 고승들의 강연집들이 편찬되어 있고 무엇보다 무학의 진수를 기록한 비급들이 보관되어 있다. 따라서 단순한 서고라기보다 귀한 자료를 비장해놓은 심처(深處)이자 무림인들의 정신적 지주 같은 곳이다. 장경각이 대웅전을 기점으로 동쪽에 있다면 서쪽엔 달마원이 있다. 달마원은 일종의 연구기관으로 외공의 기(技)와 술(術)을 발전시키고, 내공의 연단과 운용을 개선시키는 곳이다.

장경각은 오랜 세월 동안 증축되고 개축되어 서른여섯개의 기둥이 세워진 우람한 건물로 우뚝 서있다. 달마원 역시 소림의 연원이 말해주듯이 그 규모가 작지 않지만 수행하고 연구하는 장소인지라 경내 가장 깊숙한 곳에 위치해 있다. 달마원은 숭산의 기세가 바야흐로 일어서려는 경계면에 위치해 있고 그 뒤로는 아직은 낮게 드리운 너른 터가 펼쳐져 있다. 그 터가 바로 탑림이 조성된 곳이다. 세간에서는 탑림을 가리켜 천불천탑이라 칭하지만 실제로 천개가 되는 건 아니고 천년 세월 동안 삼백여 기 내외가 조성되었으니 대략 삼사년에 하나씩 건립되었다고 보면 된다.

흥법회는 새로운 장문인이 추대된 해 단오가 지난 첫 달 보름에 개최하는 것이 소림의 전통이다. 올해도 보름날에 개최되었지만 낮의 화창함과 달리 저녁 무렵부터 구름이 몰려와 보름달은 과부 쌈지 열 듯 구름 사이에서 잠깐씩 비출 뿐이다.

인시 초 검은 인영(人影) 하나가 어둠을 뚫고 장경각의 지붕을 미끄러져갔다. 검은 인영은 지붕 가장자리에서 멈춰 자세를 낮추고는 양팔로 처마끝을 잡고 한바퀴 빙그르 돌아 공포(栱包)를 잡았다. 이어 들보 위 봉창의 문틀에 착 붙었다. 마치 도마뱀이 벽에 달라붙는 것 같았다. 흑의인이 공포의 장식인 양 꼼짝하지 않은 지 일각도 되지 않아 소림승 하나가 손에 봉을 쥐고 좌우를 살피며 천천히 지나갔다. 순찰을 도는 번승이다. 승려가 지나가자 흑의인은 품속에서 천과 단도를 꺼냈다. 천은 물을 머금어 축축했다. 그가 봉창의 돌쩌귀에 천을 대고 쥐어짜자 물기가 스며들었다. 이어 단도로 문틀의 홈을 파냈다. 불과 차 반잔 마실 틈도 안 되어 문틀이 끄으윽하는 신음을 내며 온몸을 뒤틀었다. 흑의인은 벌어진 문틀을 잡고 조심스럽게 떼어내고는 안으로 들어갔다.

장경각은 서고인 만큼 책장이 수도 없이 줄지어 서 있다. 길이가 삼십 여장 폭이 오장 정도 크기인데, 한 폭 당 십여 개의 책장이 열지어 있다. 우측에서부터 십여장 정도의 책장이 모두 대장경 목판이고 나머지는 서책으로 채워져 있다. 그는 품에서 조그마한 초를 꺼내고 심지 주위에 깔때기 모양의 종이를 말았다. 불을 붙이자 빛이 넓게 퍼지지 않고 깔때기 입구 부분만 비추었다. 그는 차근차근 서고를 살펴나갔다. 불경과 주해서인 논(論)과 소(疏)를 채운 칸을 지나자 각종 무학서가 꽂혀 있는 책장이 나왔다.

나한진의 구성과 진법 운용을 적은 책이 있고, 봉과 곤과 권을 기록한 그림책들이 열 보도 넘게 이어져 있다. 이윽고 흑의인이 멈춰 섰다. 무학비기가 꽂혀 있는 곳이다. 그는 위에서부터 차례로 칸을 살폈다. 어떤 것은 책의 형태로 되어 있지만 어떤 건 나무상자에 보관돼 있었다. 그는 상자에 든 책은 꺼내어 내용을 살펴보았다. 상자에 넣어 보관할 정도라면 귀한 책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반시진 넘게 일일이 살피던 그는 마침내 허탈한 듯 양손을 가볍게 털더니 촛불을 껐다. 그가 찾던 책이 없는 것이다.

무영객은 지난 이틀 동안 묘적암 주위에서 관조운을 감시했지만 무극진경에 관한 그 어떤 단서도 얻지 못했다. 만약 관조운과 혁련지가 진경을 손에 넣었다면 더 이상 묘적암에 머물 이유가 없을 것이다. 관조운이 그 어떤 행동도 없이 종일 허공에 검을 휘두르는 걸 보고, 그는 혹시 진경이 장경각에 보관돼 있어 관조운이 기회를 노리는 건 아닐까 싶어 먼저 잠입해본 것이다. 적어도 장경각에는 없었다. 그렇다면 남녀가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고 암자에만 머무는 이유는 뭘까. 뭔가를 기다리는 것일까. 그는 더 이상 기다릴 여유가 없었다. 날이 밝으면 남녀를 직접 심문하기로 마음먹고 장경각을 빠져 나왔다.

같은 시각 두 사람의 인영이 달마원의 담장을 돌아 탑림 속으로 스며들었다. 마침 구름이 달을 가려 사위는 캄캄했다. 그들은 일부러 그 순간을 노린 것 같았다. 인영 중 하나는 키가 크고, 다른 하나는 아담한 키에 긴머리를 뒤로 묶었다. 남녀는 손짓으로만 방향을 가리키며 탑림 사이를 달려갔다. 앞서 가던 남자가 갑자기 사방을 두리번거리더니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며 제 자리에 섰다. 뒤에서 따라오던 여인이 앞선 남자의 어깨를 잡고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사형, 왜 그래요?"
"갑자기 방향을 잃어버렸어. 탑들이 겹쳐 보이면서 마치 제자리를 맴도는 것 같아. 우리가 북쪽으로 가는 게 맞을까?" 

관조운이 다소 흥분한 목소리로 답했다.

"제가 앞서 볼게요."

혁련지가 말하고는 앞장섰다. 그녀는 방향을 가늠하며 서두르지 않고 발걸음을 떼었다. 탑림은 구획을 정하고 길을 낸 게 아니라 대밭의 죽순처럼 두서없이 솟았다. 탑과 탑 사이의 간격이 일정치 않고 비슷한 모양의 탑이 사방으로 둘러싸여 있어 시선이 교란되었다. 어린아이가 목각 장난감을 마구 흐트러뜨린 것 같기도 하고 한편으론 정교하게 짠 미로 같기도 하였다. 방금 지나친 탑이 몇 걸음 지나 앞에 다시 보이고 비슷한 탑이 삼중 사중 중첩되어 보였다. 탑 하나를 정해 걸음을 세며 빠져나왔지만 이내 같은 모양의 탑이 눈앞에 마주쳤다. 좀 전의 그 탑인지 같은 모양의 새 탑인지 종잡을 수가 없었다. 방위를 잡을 수가 없고 기점을 세울 수도 없었다. 머릿속이 복잡해지고 마음이 급해졌다. 입안에 바싹 침이 마르고 호흡이 가팔라졌다.

문득 혁련지가 제 자리에 서더니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가 길게 내쉬었다. 그리고 천천히 호흡을 가다듬었다. 이윽고 그녀가 말했다.

"혹시 구궁팔괘진(九宮八卦陣)에 갇힌 거 아닐까요?"
"맞아, 그런 거 같아. 그 생각을 미처 못 했어."

관조운이 맞장구쳤다. 그리고 곰곰이 생각했다.

그들이 탐림 안으로 들어올 때 남에서 북으로 관통하면 맨 끝 열에 있는 허산선사의 탑에 도착할 것이라고 보았다. 경신술을 발휘하여 달려가면 늦어도 이 각 이내에 도달할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지금까지 십여 각 이상을 보냈는데도 여전히 탑과 탑 사이에 있는 것이다.  

혁련지 역시 생각에 잠겼다. 무턱대고 돌아다녀 봤자 제자리만 맴돌다 날이 밝을 것이다. 마치 휘도는 물살에 갇힌 나뭇잎 같았다. 이렇게 시간을 보낼 순 없다.

"사형, 기문둔갑(奇門遁甲)이나 오행구궁(五行九宮)에 대해선 아는 바가 없나요?"
"명학(命學)도 주역의 이치에 따르기는 하지만 유학과는 길이 다르지. 사부님이 주역에 심취하셨기에 옆에서 주워들은 풍문이 약간 있긴 한데 과연 여기를 빠져나가는데 쓸모가 있을까. 내가 알기론 진법에도 여러 종류가 있는데 우리가 갇힌 게 무슨 진(陣)인지조차 파악 못하겠어."

관조운이 잠시 멈추었다가 말을 이었다. 

"길 따라 가지 말고 탑신을 타고 넘어서라도 직선으로 돌파해버릴까?"

"그렇게 되면 시간도 많이 걸릴 뿐만 아니라 순라를 도는 번승에게 들킬 거예요. ……혹시 이와 관련해 사부님께서 무언가 남기신 단서는 없을까요?"
"모르겠어. 유품을 허산스님의 탑에 비장(秘藏) 해놓으셨다면 사부님께서도 이 진법과 분명 맞닥뜨렸을 텐데……."
"어쩜 기사숙님은 알고계신 것 아닐까요?"
"기사숙님이 아시고도 우리에게 모른 척 하실 리야 있을까. ……가만!"

관조운이 무언가 떠오른 듯 멈칫했다.

"기사숙께서 나에게 가르침을 주셨던 검술의 명칭이 태을삼식(太乙三)式)이야."
"요즘 사형이 매일 허공에다 긋는 그 검식 말인가요?"
"그래, 태을이라면 기문에서 사용하는 포국법(布局法) 중의 하나이지. 정확히는 태을구성법(太乙九星法)이라고 하는데 이를 기문진법으로 활용한다고 사부님께 들은 적이 있어."
"그래요?"
"사부님께서 주역의 팔괘를 활용해 나무토막으로 진법을 배치하시던 기억이 나는군."
"사형도 같이 만들었나요?"
"아냐, 나는 그저 팔괘와 오행의 효사(爻辭)를 구궁의 원리에 따라 포국하고 이를 표로 정리해 드렸지."

"그게 언제였죠?"
"삼 년 전 쯤, 지금에 와서 보니 그때가 바로 사부님이 이숙님을 데리고 묘적암에 오실 때였군. 사부님께선 허산선사의 탑이 세워진다는 소식을 듣고 나서 금릉으로 돌아와 기문둔갑을 궁구하신 거야. 사부님도 탑림의 진을 뚫어야 했으니까."
"아하, 그래서 이숙께서 사형에게 가르쳐 준 검식이 태을이었군요. 검법이 아니라 탑림에 설치된 팔괘진의 명칭을 암시하는 것이었어요."

"왜 직접적으로 알려주시지 않았을까?"

"어쩜 기사숙께선 검식의 명칭에 담겨 있는 숨은 의미를 모르실 수도 있어요. 사부님께선 진인의 유지를 받들어 진경이 삼십 년 이내에는 공개되어선 안 된다고 생각하셨어요. 본래는 진경의 소재를 알 수 있는 유품을 네 제자가 각각 소지하면 비밀이 유지될 것이라고 생각하셨어요. 그런데 이숙께서 생각지도 않은 변고를 당하자, 당신과 이숙의 유품을 함께 숨겨놓으며 주위에 여러 가지 암시를 해놓은 게 아닌가 싶어요. 그러니까 이숙의 검식 명칭엔 사부님의 의도가 숨어 있다고 봐야겠죠."

"이숙께서 태을삼식을 창안하신 때가 사부님과 재회하고 허산선사에게 치료 받고난 후이니 그럴 가능성이 충분히 있겠구먼."
"그나저나 그 태을구성법의 내용을 아세요?"

"태을구성법은 태을(太乙)·섭제(攝提)·헌원(軒轅)·초요(招搖)·천부(天符)·청룡(靑龍)·함지(咸池)·태음(太陰)·천을(天乙)이 있는데 이는 구궁의 길에 해당하고, 길을 따라가면 휴문(休門)·생문(生門)·상문(傷門)·두문(杜門)·경문(景門)·사문(死門)·경문(驚門)·개문(開門)의 팔문(八門)에 달하는데 이를 팔괘진이라고 하지. 우리가 맴돌고 있다는 것은 구궁에서 오중(五中)에 빠졌다는 것이야. 우리는 생문(生門)을 찾아야 해."

관조운은 무언가를 떠올리는 듯 눈을 감았다. 잠시 후 눈을 뜨며 물었다.

"현재 천간과 지지가 어떻게 되지?"
"경신년 계축일 임인시에요."

혁련지가 엄지로 검지와 중지의 마디를 짚으며 답했다.

"오중(五中)은 구궁(九宮)에서 천부(天符)이니 건궁(乾宮)의 청룡(靑龍)을 따르고, 그리고 헌원(軒轅)에서 진궁(震宮)을 거친 다음 섭제(攝提)인 곤궁(坤宮)에 이른다."

관조운은 혼자서 중얼거리며 걸음을 옮겼다. 두 번째 오른쪽 탑으로 갔다가 서북쪽으로 네 개의 탑에 갔다. 거기서 잠시 멈칫했다가 동북 방향으로 대각선으로 세 번째 탑에 멈췄다. 그는 사방을 두리번거리더니 고개를 흔들고는 오던 방향으로 되돌아 왔다. 

"아니야, 여전히 탑들이 중첩돼 있고 사위가 막혀있는데 안개가 자욱해지고 있어. 두문(杜門)에 도달한 거야."

관조운이 실망스러운 듯 눈을 내리 깔며 말했다. 이곳에 갇히면서 날을 새울 것인가 아니면 탑신을 타고 넘어서라도 돌파할 것인가. 두 사람은 결정을 내려야 했다.

"사형, 지금은 밤이잖아요. 혹시 양둔(陽遁)에서 음둔(陰遁)으로 포국을 변경했나요?"

혁련지가 갑자기 생각난 듯 물었다.

"오, 그건 미처 생각 못했어. 낮과 밤은 음양의 기운이 바뀌니 포국법도 바뀌지."

관조운이 무릎을 탁 치며 혁련지를 바라보았다.

"음둔(陰遁)에서 오중은 함지(咸池)이니 감궁(坎宮)에서 출발하여 이궁(離宮)의 태을(太乙)을 향한 후 손궁(巽宮)의 초요(招搖)를 지나 태궁(兌宮)인 섭제(攝提)에 도착한다."

이번에도 관조운 혼자 읊조리며 걸음을 옮겼다. 먼저 전면에 있는 두 개의 탑을 지난 다음 왼쪽으로 세 개의 탑을 지났다. 그 후 동남쪽으로 다섯 개의 탑에 도착하였다. 그는 사방을 휘휘 둘러보더니 왔던 길을 후다닥 뛰어왔다.

"사매, 성공했어. 음둔의 포국을 밟으니 생문으로 빠져나갈 수 있었어. 바깥쪽으로 나가는 길이 보여."

관조운이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쉬잇. 사형 목소리가 높아요."

혁련지가 입술에 손가락을 대고 관조운의 흥분을 가라앉혔다.

덧붙이는 글 | 월, 수, 금 연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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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디고』, 『마지막 항해』, 『책사냥』, 『사라진 그림자』(장편소설), 르포 『신발산업의 젊은사자들』 등 출간. 2019년 해양문학상 대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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