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소설 <무위도>
 소설 <무위도>
ⓒ 황인규

관련사진보기


모자는 채비를 한 후 암자의 일주문을 나서려는 데 호법부의 수좌 범일(凡溢)이 합장을 하며 앞에 섰다.

"시주님들은 오늘도 흥법회에 가시려는지요?"
"네에 스님, 사시에 장문스님의 법회를 참견하고 오후에 사하촌 구경을 하려고 합니다."
필진진이 상체를 숙이며 답했다.

"본 수좌가 동행을 해드리겠습니다."
"아니, 그럴 필요 없습니다. 본사에 가는 것일 뿐만 아니라 어제도 보다시피 난장엔 사람이 많아 외부인에 의한 겁박이나 피납의 위험이 그다지 없으리라고 봅니다."

"그럼, 암자에서 본사까지 가는 길이라도 소승이 호위를 해드리겠습니다. 저의 본분이니 만큼 부인께서 이 정도는 사양치 않으셨으면 합니다." 
"스님의 성의가 그러하신데 어찌 사양만 하겠습니까."

진진이 합장을 하며 범일 수좌의 호위를 수락했다.

범일은 안으로 들어가더니 제 키만한 봉을 들고 나왔다. 문수암에서 소림사까지는 사하촌으로 해서 일주문으로 이어지는 큰 길로 가면 십오 리이지만 샛길로 가면 십여리로 짧아진다. 길이 좁고 경사가 있지만 거리가 단축되니 암자에서 본사로 갈 땐 모두가 이 길을 이용한다. 

범일이 앞장서고 진진과 섭월이 뒤따라 두 식경 정도 갔을 때였다. 계곡을 사이에 두고 너른 평지가 나오는데 키가 큰 장한이 팔짱을 낀 채 길 한 가운데를 막고 서 있다. 앞장 선 범일이 한손 합장을 하며 나직하지만 힘이 들어간 목소리로 말했다.

"시주님께서는 길을 비켜주었으면 합니다."
사내는 말없이 서 있기만 했다.
범일의 뒤에서 사내의 얼굴을 쳐다본 필진진이 흠칫 놀라며 낮은 소리로 냈다.

"아니? 저 분은……"
"부인 오랜만이오. 뛰어봤자 부처님 손바닥 안이라더니, 이렇게 소림의 품안에서 다시 만날 줄이야 누가 생각이나 했겠소. 크하하하."
조복이 허탕하게 웃자 진진은 온몸에 소름이 끼쳤다. 진진은 섭월의 손을 꼭 잡았다.

"뉘신데, 불제자의 길을 가로막고 아녀자를 희롱하는 것이오."
범일이 노기가 밴 음성으로 조복을 향해 말했다.
"나는 금의위 관원으로 저 모자에게 볼 일이 있으니 스님은 관여치 말고 길을 떠나시오."
조복이 능글맞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렇게는 아니 됩니다. 소승은 이 모자를 호위할 책임이 있습니다."

범일은 아미타불, 하고 염불을 읊조렸다. 이어 봉을 양손으로 잡은 다음 고사평세(高四平勢)를 취하고 상대를 노려보았다. 조복의 허리에 찬 검을 보고는 강호인으로 여기고 대결의 자세를 취한 것이다.

"흐흐흐, 스님께서 본관에게 양보를 하지 않겠다면 할 수 없구려. 자고로 소림의 권과 봉은 강호 제일이라 했으니 오늘 그 맛이나 한번 봅시다. 내가 누군가와 약조하기를 각술(脚術)만으로 그대를 제압하기로 했으니 그리 아시라."
조복은 기마자세를 취하더니 이어 오른쪽 다리를 뒤로 물리며 왼 다리를 발끝으로만 살짝 딛는 안시세(鴈翅勢)의 변형 자세를 취했다.

조복의 방자한 말에 분기가 치솟은 범일은 봉의 가운데를 양손으로 잡고 회전을 했다. 처음엔 슥슥하고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나더니 이어서 붕붕하는 소리가 나며 봉이 눈에 보이지 않았다. 범일이 회전을 멈추며 봉의 한쪽 끝을 겨드랑이에 끼우고 한쪽 발로 선 학 자세를 취하며 말했다.

"본 수좌는 호법원 소속 학승 범일이라 하오. 귀하는 명호는 어떻게 되시는지요."
"오호, 명문정파의 제자답게 예의가 있구나. 본관은 금의위 아니 이제 관복을 벗고 야인으로 돌아갔으니 특별히 내세울 게 없구나. 그냥 강호에 떠도는 조모라고 하려무나. 목숨이 왔다갔다 하는 대결을 앞두고 통성명은 무슨 개뼉다구냐. 어서 덤벼라."

조복의 말투가 하대로 바뀌자 범일은 더욱 분기탱천하여 봉을 휘두르며 앞으로 나아갔다. 소림의 봉은 단순히 나무를 깎거나 이어 붙인 게 아니었다. 뿌리에서 곧게 뻗은 박달나무를 몸통 채 소금물에 삼년 이상 절인 후 알맞게 깎아낸 다음 분뇨에 담갔다 뜨거운 재에 말리기를 수십 번. 이후 동백기름을 수도 없이 먹여 단단하기가 차돌 같다. 뿐만 아니라 양끝에 한 치 넓이의 쇠테를 세 개 씩 둘러 검과 부딪치더라도 퉁겨지지 않았다. 여기에다 테에 창날을 끼우면 장창이나 장겸(長鎌)이 되기도 한다. 겉보기완 달리 묵직한 중병기에 속하는 것이다.

본디 긴 장병기는 여럿이서 진(陳)을 이룰 때 진가를 발휘한다. 소림의 무술은 외적의 침입이나 도적의 습격에 대비해 승려들이 집단적으로 자위하기 위해 창안된 것이다. 따라서 개인의 기예를 중시하는 검보다는 진(陳)을 짜기에 유리한 창봉(槍棒)에 치중하고 한편으론 신체의 단련을 겸한 권(拳)을 중시하였다. 

범일의 봉이 조복의 목울대를 향해 내지르는 듯하더니 급히 높이를 낮춰 가슴을 향해 좌, 우, 좌 차삼창(箚三槍)을 했으나 타격의 반향이 없자 급히 왼쪽으로 돌아 피신한 후 홍지세(嗊地勢)를 취했다. 조복은 범일이 진보(進步)를 하자 오른쪽으로 돌아 이미 공격 범위를 벗어나 있었다.

"으흠, 소림의 야차곤보(夜叉棍譜)에서 제이로(第二路)군. 공(攻)의 기세에 치중하다보니 보(步)가 약했어. 상대의 신형부터 차단했어야 했어."
조복이 조롱하듯 말했다. 

"으음……"
범일은 자신의 일격이 상대의 털끝하나 건들이지 못하자 신음을 내뱉으며 복호세(伏虎勢)를 취하고는 얍! 하는 기합과 함께 봉 끝으로 원을 그리다가 느닷없이 낭심을 향해 내지르는 발초심사출(撥草尋蛇出)로 차일창(箚一槍)하고는 이어서 투보(偸步)로 허리께를 비스듬히 내리치는 연속공격을 하였다. 그러나 조복은 봄바람에 꽃잎이 날리듯 오화곤신(五花滾身)으로 살짝 살짝 범일의 봉을 피하고는 제자리에 섰다.

"바람에 날리는 벚꽃을 벤 적이 있는가. 모두를 베려면 하나도 못 베지. 자네의 중심은 단전에 있지 않고 어깨에 있어. 아직 운기(雲氣)가 부족하군. 보아하니 호법원의 제자 같은데 지금이라도 뛰어가서 교두나 장로를 모셔오지?"

두 번의 공격이 무위로 끝남은 물론 조롱의 말까지 더해지자 범일의 안면이 붉으락푸르락 물들었다. 차압! 다시 한번 기합소리와 함께 범일의 몸이 공중으로 치솟았다. 이어서 붕붕 소리가 나며 범일의 봉이 벌떼의 공격처럼 치고 들어왔다. 이름하여 뇌우섬전(雷雨閃電)이라, 공력을 최대한 끌어올려 단숨에 공격하는 초식이다. 조복이 한 발 물러섰다가 범일의 몸이 공중 떠 있는 틈을 타 땅바닥을 한바퀴 구르자 그가 있던 자리에 탕!하고 봉이 내리치는 소리가 들렸다.

조복은 구른 자세를 펴지 않고 그대로 오른쪽 발을 길게 뻗어 원을 그리며 범일의 발목을 쳤다. 범일은 조복이 일어설 것을 예상하고 봉 끝으로 중단을 찔렀는데 허공을 갈랐다. 아차, 싶었는데 발목에 묵직한 충격이 오며 몸이 휘청거렸다. 범일은 넘어지지 않으려 뒷걸음질 치며 겨우 서자마자 얼굴에 쇠덩이가 부딪치는 것 같은 충격이 가해졌다. 조복이 범일이 중심을 잡기 전에 현각창량(懸脚猖踉)으로 그의 턱을 강타한 것이다. 범일의 몸이 반장 정도 날아가 커다란 바위에 부딪쳤다가 털썩하고 땅바닥에 널브러졌다.

조복은 쓰러진 범일을 향해 말했다.
"경내에서 봉으로 연습만 했지, 실전의 경험이 부족하군, 상대의 말에 동(動)하다니."

그는 손을 탈탈 털고 돌아서서 필진진을 향해 말했다.
"부인, 나와 함께 가야할 곳이 있소. 굳이 인상 쓸 일이 없기를 바라오."

"귀하는 관복도 입지 아니하고 관가의 비첩(秘帖)도 없이 나와 아들을 데려가려 하니 어찌 이런 무례가 있단 말이오. 관부의 명이라면 합당한 절차를 밟을 거니와, 만약 그렇지 않고 우리 모자를 겁박하여 끌고 간다면 내 혀를 깨물지언정 귀하의 말에 따르지 않을 것이오."

진진의 서릿발 같은 기세에 조복은 주춤하다가 말을 이었다.

"부인의 기상은 여전하구려. 허나 지금은 부인이 큰소리 칠 형세가 아니오. 내 입에서 더욱 거친 말이 나오기 전에 순순히 따르는 게 좋을 거요. 그리고 나는 며칠 새 관복을 벗었으니 더 이상 관가의 나부랭이로 취급하지 않아도 된다오. 흐흐흐."
"만약 나를 조금이라도 욕보인다면 그 자리에서 자결할 거니와 이 아이의 털끝 하나라도 건드린다면 귀하는 그 뒤를 감당치 못할 것이오."

"알겠소. 부인이 염려하는 욕된 일은 없을 것이오. 내가 가자는 곳으로만 얌전히 따라와 준다면 별일은 없을 것이오. 부디 험악한 일이 벌어지지 않길 바라오. 부인."
"어디로 가는 것이오."
"그다지 멀지 않소. 여기서 봉우리 두 개를 넘어야 하지만 산중 길로 간다면 반나절이면 간다오. 대감댁 규수에게 거친 흙길을 밟게 해 미안하지만 사정이 그러니 어쩌겠소. 흐흐흐"

조복의 새어나오는 웃음에 진진은 진저리를 치며 생각했다. 어차피 조복의 무공으로 볼 때 자신이 섭월을 보호하기는 터무니없는 일이었다. 자신 한 몸이라면 저 야차 같은 놈에게 끌려가느니 차라리 혀를 끊어 자진하고 말겠지만 아들의 안위를 생각해 볼 때 저자의 말을 따르며 추이를 지켜보는 게 나을 것 같았다. 우리 모자를 어디로 데려가는 것일까. 아들을 위해선 어떠한 굴욕이라도 받아들여야 한다. 냉철히 마음을 가다듬은 후 기회를 노려야 한다. 진진은 입술을 깨물며 조복을 노려보았다.

"앞장서시죠, 부인."
조복이 한쪽으로 비켜나며 길을 열었다.
진진은 섭월의 손을 꼬옥 잡고 앞장섰다. 그녀의 입술엔 피가 엷게 맺혔다.
첨부파일
크기 줄임 400.jpg

덧붙이는 글 | 월, 수 금, 연재합니다.



태그:#무위도 88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소설가. 『디고』, 『마지막 항해』, 『책사냥』, 『사라진 그림자』(장편소설), 르포 『신발산업의 젊은사자들』 등 출간. 2019년 해양문학상 대상.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