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無爲刀
▲ 무위도 無爲刀
ⓒ 황인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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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빛이 빛나고 맑으니 마침 좋고(水光瀲 晴方好)
비 오는 모습과 어우러진 산색이 또한 기이하네(山色空濠雨亦奇)
서호를 서시에게 비교한다면(浴把西湖比西子)
옅은 화장이나 짙은 화장이나 다 아름답다(淡粧濃抹總相宣)

- 소동파 <음호상일초청후우>(飮湖上一初晴後雨) 중에서

항주(抗州)의 서호(西湖)는 전설속의 미인 서시(西施)의 고향이라고도 하고 혹은 서시에 비할 만큼 아름다운 곳이라서 그런 이름이 지어졌다고 한다. 그 어느 것이든 입방아 찧기 좋아하는 한량들의 한담일 뿐 호수에서 생업을 이어가는 백성들에게는 고단한 삶의 터전일 뿐이다.

서호 중에서도 풍류객들로 흥청대는 외호(外湖)와 달리 악호(岳湖)는 외진 곳으로 고기를 잡아 생계를 이어가는 어부들이 드나드는 곳이다. 외호는 봉긋한 언덕이 막 초경을 치른 과년(瓜年)의 젖가슴처럼 순하지만, 악호는 주위 산들이 삐죽 솟아올라 약관의 팔뚝처럼 불끈거린다. 악호는 언덕이 높아 바람이 잦은 탓에 고기들이 많이 몰려 있어 어부들은 늘 이곳으로 배를 몰고 온다.

서호의 저녁 노을은 세도가 한량들에게는 풍류지만 가난한 어부에게는 하루를 마감하는 독촉장일 뿐이다. 마저 채우지 못한 망태기가 있건만 이제 그만 돌아가라고 매몰찬 청지기처럼 군다. 독촉에 못 이긴 어부들이 하나 둘 뭍으로 노를 저어가고 악호에는 이제 한 척의 조각배만 남았다.

사립 눌러 쓴 노인

배에는 사립(簑笠)을 눌러 쓴 사람이 하나 있다. 그는 사립을 벗어서 노에다 걸어놓고 품에서 무엇인가를 꺼냈다. 사립을 벗고 보니 노인이다. 세파에 찌들어도 시름따위는 없다는 듯 편안한 인상이다. 주름은 깊되 흐르는 물처럼 패여 추하지 않았다. 노인이 품에서 꺼낸 것은 대나무로 만든 퉁소다. 노인은 붉게 물들기 시작하는 서녘하늘을 보며 퉁소를 불었다. 끊어질 듯 이어지고 나는 듯 가라앉고, 퉁소가락이 물결처럼 호수에 퍼져나갔다. 노인은 천천히 일어서더니 한 손으로는 퉁소를 불며 한 손으로는 노를 잡아 배를 저었다. 하루를 마치면 늘 퉁소를 부는 노인을 두고 사람들은 소옹(簫翁)이라고 불렀다.

소옹은 늘 대놓는 기둥에 조각배를 매어놓고 갈대밭 속으로 걸어갔다. 오른쪽 어깨에는 열 척짜리 대나무 낚싯대를 얹고 왼손에는 망태기를 들고 허리춤에는 퉁소를 비스듬히 꽂았다. 팔뚝만한 잉어가 네 마리에 손바닥만한 붕어가 여덟 마리, 그 외 잔챙이 여남은 마리. 적지 않은 수확이다. 늙은 아내는 내일 새벽장에 갈 맛이 날 것이다. 제법 처녀 티를 내는 손녀 같은 딸아이에게, 돼지고기 반 근이라도 끊어올 만큼 후하게 쳐 줄 인심 좋은 손님을 만나면 금상첨화일 텐데. 소옹은 집에 갈 때면 이렇게 늘 좋은 생각만 한다.

갈대숲에서 휘이익 하는 새소리가 나더니 소옹의 가슴에 무언가 탁하고 박혔다. 소옹은 날짐승이 부딪쳤나 싶었다. 내려다보니 가슴에 박힌 것이 저녁 노을에 반짝 빛을 발한다. 지르르르, 알 수 없는 진동이 가슴에 전해왔다. 비표(飛鏢)다! 꼬리에 천이 없는 것을 보니 광한표(光扞鏢)다. 가슴이 턱 막혔다. 비표의 충격보다는 정신의 충격이 컸다. 그는 석상처럼 굳었다. 도대체 누가, 왜 나를 암습한단 말인가. 십년 세월도 강호의 은원(恩怨)을 삭여버리지 못했단 말인가. 소옹은 가슴이 아렸다.

본격적으로 육체의 고통이 자신의 존재를 알려왔다. 만약 독이 있다면 피가 전신을 한바퀴 도는 시간, 마흔 번의 호흡 이내에 쓰러질 것이다. 다행히 비표는 심장에 정확히 꽂히지는 않았다. 소옹 자신이 움직였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면 조금 더 시간을 벌 수 있다.

"뉘시오?"

소옹이 소리쳤으나 갈대밭에선 아무런 답이 없다. 자신이 가고 있는 방향에서 약간 비스듬한 방향에서 비표가 날아왔으니 동남쪽에 암습자가 있을 것이다. 바람이 불었다. 봄에 서호는 낮엔 동풍이 불지만 저녁부터 밤까지는 서풍이 분다. 지금은 서풍이 불어오는 시간이다. 소옹의 얼굴로 맞바람이 불었다. 앞쪽에선 아무런 기척이 없다. 키 큰 갈대밭이라 시야에 들어오는 건 없지만 냄새나 작은 동물들의 기척이라도 있을 법한데 죽은 듯 고요하다. 적은 이미 앞에 없다. 그렇다면 앞에서 비표를 날리고 언제 뒤로 갔단 말인가.

소옹은 앞으로 가는 척하다가 갑자기 뒤로 방향을 틀면서 낚싯대를 밑에서 위로 쳐올렸다. 팅 하는 소리와 함께 낚싯대가 잘리는 진동이 손목에 전해졌다. 이때닷! 소옹은 휘두르는 동작의 관성을 멈춤과 동시에 바로 찔러들어 갔다. 묵직한 질감이 손에 전해졌다.

성공이다!

상대가 낚싯대를 쳐내는 순간 대나무는 사선으로 잘리고, 그러면서 끝이 뾰족한 죽창이 된다. 소옹은 그걸 노리고 들어갔다. 죽창의 끝이 움직이지 않아 적의 살을 뚫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상대는 죽창의 끝에서 마디 하나쯤 떨어진 곳을 손으로 잡고 있다. 암습자는 석양을 등지고 서 있어 그 윤곽만 드러낼 뿐 정체를 알 수가 없었다. 자신을 숨기고 상대가 드러나는 위치를 선점하라. 자객의 제일 원칙이다. 가만히 보니 상대의 오른쪽 어깨의 옷이 찢어져 바람에 나부낀다. 음, 아주 터무니없진 않았군. 십년 만에 살수를 펼쳤는데.

"원하는 게 뭔가?"

말하면서 그제서야 비로소 상대를 살펴 보았다. 검은 옷을 입고 체격은 크지 않으나 날렵한 몸매를 가졌다. 왼손에는 길고 가느다란 검을 들고 있다. 상대가 왼손잡이라는 걸 미리 알았더라면 죽창이 적어도 그자의 가슴까진 갔었을 텐데. 아깝다. 승패는 무인의 뜻과 상관없는 것.

절정고수를 만나다

상대는 말없이 죽창을 잡은 손을 놓았다. 다시 한 번 공격하라는 의미다. 음, 내 목숨을 원하는군. 하긴 나에게 목숨 말고 원할 게 무엇이 있단 말인가. 가슴에 박힌 비표의 통증이 점점 더 아우성으로 변하고 있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상대는 전혀 흐트러짐이 없다.

죽창의 끝을 바라보았다. 가슴이 철렁했다. 죽창은 예각이 아닌 둔각으로 잘려나갔다. 대나무의 특성을 아는 그로선 그 순간에 대나무를 이런 각도를 벤다는 게 이해가 가지 않았다. 이자는 절정고수다. 은퇴하기 전의 그였더라도 지금의 이자와 대결한다면 장담하지 못할 것이다. 하물며 십년 동안 낚시질이나 한 지금에야. 그렇다고 포기할 순 없다. 늙은 아내가 저녁을 지어놓고 기다리고 있다. 늘그막에 과부를 만나 남 사는 것 같이 살아보려고 했더니 진짜로 살라고 손녀 같은 딸아이도 생겼다. 망태기의 잉어도 빨리 가져가 항아리에 풀어놓아야 한다.

소옹은 마지막 공격을 시도했다. 비천팔식(飛天八式) 중 제육식 추창망월(推窗望月)로 죽창을 찔러들어갔다. 육식의 제일초는 허초(虛招)이고 제이초는 반허반실초(半虛半實招)이고 제삼초가 제대로 된 실초(實招)다. 일초에 상대는 비스듬히 비껴나갔고 이초에 상대는 반보 뒤로 밀렸다. 걸렸다! 삼초에 소옹은 허리춤의 퉁소를 뽑아 상대의 머리를 가격했다. 예상치 못한 공격으로 적의 허를 찔렀다.

휘웅, 퉁소에서 나는 소리가 허공에서 여운을 남겼다.
번쩍, 붉은 햇살이 그의 가슴 근처에서 반사됐다.
푸드드득, 갈대 속에서 청둥오리 대여섯 마리가 날아갔다.
이 모든 것이 동시에 일어났다.

소옹은 컥, 하고 짧은 숨을 토해내며 앞으로 쓰러졌다. 그의 가슴에는 길고 가느다란 칼이 꽂혀 있었다. 칼끝이 폐를 파고들어 소옹은 비명다운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이승을 하직했다.

흑의인은 소옹의 손에서 퉁소를 빼앗아 품에 넣더니 시체를 어깨에 메고 조각배로 갔다. 잠시 후 악호 한가운데를 향해 조각배 하나가 서서히 밀려들어왔다. 문득 이물 쪽에서 붉은 화염이 날름거렸다. 마치 굶주린 이리가 송곳니를 드러내며 으르렁거리는 것 같았다. 이리는 게걸스럽게 조각배를 먹어치우더니 물속으로 사라졌다. 사위는 캄캄해졌다.

그날 저녁 늙은 아내는 소옹이 좋아하는 잉어탕을 끓여 놓았다. 과년 12세, 손녀 같은 딸은 부엌을 들락거리며 약한 불에 탕을 몇 번이나 다시 데우며 아비를 기다렸다. 소옹은 끝내 집에 오지 않았다.

입춘이 지났건만 서호의 바람은 아직 차가웠다.

덧붙이는 글 | 사람 사는 곳엔 은원(恩怨)이 있기 마련이고,
은원이 얽히고설킨 곳을 강호라 일컫는다.
강호란 그런 곳이다.
한 줌 의(義)를 위해 바람에 나부끼는 버들잎처럼 자신의 배를 가르기도 하지만,
술잔을 깨뜨리며 금석의 맹(盟)을 언약했다가도 돌아서면 칼을 꽂는 곳이 또 강호이다.
그래서 진정한 무인(武人)은 함부로 움직이지 않는다.
끝까지 남아서
돌아서는 자의 등을 측은히 바라보거나, 칼을 꽂거나.
결코 먼저 등을 보이지 않는 고수를 찾아,
무림동도와 더불어 먼 길을 떠나고 싶다.
강호란
그런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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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디고』, 『마지막 항해』, 『책사냥』, 『사라진 그림자』(장편소설), 르포 『신발산업의 젊은사자들』 등 출간. 2019년 해양문학상 대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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