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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무위도>
 소설 <무위도>
ⓒ 황인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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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개의 신영(身影)이 굵직한 전나무 뒤에서 나타났다. 하나는 키가 컸고 다른 하나는 보통 키인데 둘 다 머리에 당건(唐巾)을 쓰고 얼굴은 천으로 가려 복면을 했다. 

"으흥, 도적들의 일행이 있었구먼."
땅딸보승이 짧게 뇌까렸다.

"일행이라니? 지나가던 과객이오만 저들의 처지가 궁한 것 같아 잠시 도와주려는 것뿐이오. 대자대비한 부처님의 뜻에 비추어 저기 선남선녀들을 그만 보내주심이 어떻소. 대사?"
보통 키의 복면인이 말했다. 목소리로 보아 조금 전에도 그가 말한 것 같았다.

"일행이 아니라면 상관하지 마시기 바라오. 저들은 본사를 내침(來侵)하여 금구의 율을 범한 자들이오. 그대들이 의로움 때문에 나선 것이라면 얼굴을 가린 것은 또 무슨 수작이란 말인가. 물러서지 않으면 본사를 내침한 자들과 같이 취급할 것이오."

땅딸보승이 노기가 밴 목소리로 내뱉었다. 말로는 그렇게 했지만 땅딸보승 공빈(空彬)은 복면인들이 눈앞의 남녀와 한통속이라고 보았다. 그들 말대로 지나가던 과객이라면 출입이 통제된 소림의 뒤뜰에 있을 리가 없고 게다가 이 시각에는 나타난다는 건 더욱 말이 안 되었다. 그저 말장난을 통해 시간을 벌거나 기회를 노리는 것으로 볼 수밖에 없었다.

"허허허, 강호에서 노부의 부탁을 외면할 사람이 다섯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인데. 귀승의 베짱이 두둑하니 내 오늘 장난이 심하다는 말을 들을지언정 매를 좀 들어야겠소이다."
복면인이 정체를 밝히지도 않고 노부 운운하며 스스로 고수인 양 하자 땅딸보승의 곁에 있던 젊은 승려가 앞으로 튀어나왔다.

"귀협께서 소림의 조롱이 심하십니다. 소승은 소림의 말제(末弟) 도홍(度弘)이라 합니다. 귀협의 존호부터 밝히심이 예가 아닐까요?"
도홍이 한손 합장을 하며 예를 갖췄다. 이번에는 키가 큰 복면인이 한 발자국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본관의 명호를 듣는 자는 살아있을 수가 없으므로 생략하는 것으로 하겠다. 굳이 들어서 황천길에 남의 명호나 곱씹어서야 쓰겠느냐."
키 큰 복면인의 목소리는 얼음장같이 차가웠다.    

"보아하니 무공에 자신이 있으신 모양인데 먼저 소림 호법제자의 뜨거운 맛부터 보기 바라오."

분기탱천한 도홍이 역발산의 기세로 봉을 휘두르며 짓쳐들어 갔다. 그러나 손속을 주고받기도 전에 헉, 하는 소리와 함께 땅바닥에 엎어졌다. 키 큰 복면인은 봉이 코앞에 들어올 때까지 꼼짝 않고 있다가 갑자기 오른발을 뒤로 틀며 상체를 옆으로 비끼며 어느새 도홍의 등을 점하고는, 검지로 풍문혈(風門)穴)을 전광석화처럼 찍어내리자 도홍은 영문도 모른 채 엎어져버린 것이다. 살수(殺手)가 아니었는지 도홍은 머쓱한 표정으로 손을 털고 일어나 원래 위치로 돌아갔다. 이 한 수로 호법원 제자 각각 한 명의 무예로는 복면인의 상대가 안 된다는 게 증명되었다.

땅딸보 승 공빈이 왼손을 들어 주먹을 쥐더니 검지만 폈다. 그러자 나머지 일곱 명의 승려가 관조운과 혁련지의 포위를 풀고 복면인들을 에워쌌다. 승려들은 좌로 이보씩 움직이면 진의 위치를 바꿨다. 원진의 지름이 관조운과 혁련지를 에워쌀 때보다 좁아졌다. 바야흐로 진법에 따라 연수합격(練修合擊)할 준비를 하는 것이다.

승려들은 왼쪽으로 서서히 돌면서 각자에게 주어진 형세를 취했다. 이들은 서로 대칭이 되었는데 변란세(邊攔勢)를 취한자의 맞은편에는 군란세(羣攔勢)를 한 자가 있었고, 정슬세(定膝勢)를 잡은 자의 맞은편에는 잠룡세(潛龍勢)로 움직이는 자가 있었다. 그러나 진의 한 가운데 있는 복면인들은 느긋했다. 각자 허리에 검을 차고 있었지만 뽑을 생각조차 없는 것 같았다.

공빈의 왼주먹이 검지에서 중지와 약지로 변했다가 주먹을 두 번 쥐었다 폈다 했다. 그러자 복면인의 정면에 있던 소림 승려 둘이 야압! 하는 기합과 함께 하나는 기룡주강(羈龍週綱)으로 키 큰 복면인을 찌르고 다른 하나는 백원타창(白猿拖槍)으로 보통 키 복면인의 하체를 공격해 나갔다. 동시에 뒤에 있던 승려가 아무런 소리도 내지 않고 오운조정(烏雲罩頂)으로 반보 뒤에 있는 보통 키 복면인의 정수리를 노렸다. 일합(一合)에 세 개의 격이 세 방향에서 두 개의 목표를 노리고 들어오니 인영이 엉키어 분간을 못하고 챙, 탕, 텅, 텅 하는 병장기끼리 부딪치는 소리만 들렸다. 복면인들이 어느새 발검을 하여 승려들의 공격을 튕겨낸 것이다. 놀라운 것은 뒤에서 공격했던 승려가 바닥에 쓰러져 있다는 것이다. 그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염려 마시오. 배(칼등)로 쳤으니 생명에는 지장이 없을 것이다."
보통 키의 복면인이 덤덤하게 말했다.

공빈은 이를 으드득 갈았다. 호법제자들이 소림의 안마당에서 이토록 무기력하게 당한다는 건 개인의 수치를 떠나 소림 전체의 명성에 누가 된다. 호법원 십팔조라면 소림제자들 가운데서도 낮은 무위가 아니다. 그런데도 이토록 무기력하다니. 그는 다시 한번 진을 가다듬었다. 나중에 비난을 받는 한이 있더라도 살진을 펼쳐 십팔조의 명예를 회복해야 했다.

공빈은 주먹을 쥐었다 엄지만을 펴고 손목을 돌렸다. 나한진의 가장 강력한 공세인 항마봉쇄응익(抗魔鳳刷鷹翼)을 펼쳤다. 항마봉쇄응식은 세 명이 한 조를 이뤄 한 명이 먼저 벽창(闢槍)으로 공격하고 상대가 막거나 피하면 그 틈을 노려 다른 한 명이 깊이 들어가는 합격(合擊)이다. 앞의 공격이 허초이고 뒤의 공격이 실초인데 만약 실패하면 나머지 한 명이 상대의 역습을 방어하는 것으로 일합(一合)을 이룬다. 상대가 일합을 무사히 넘기더라도 나머지 인원이 이합, 삼합을 연속으로 공격하기 때문에 원진 안에 있는 자는 정신을 차릴 수가 없게 된다.

호법윈 제자들의 보법이 민활해졌다. 그들의 원진이 좁아졌다 넓어졌다를 반복하면서 각각의 자세가 바뀌기도 하고 서로의 위치를 교환하기도 했다. 복면인들도 소림승들의 진법이 심상치 않음을 느꼈는지 서로의 등을 맞대고 방어자세를 취했다. 공빈은 공격 개시를 섣불리 지시하지 않았다. 쿵 쿵 쿠구궁 진을 밟는 승려들의 발걸음 소리가 일정한 박자를 이루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공빈이 봉으로 땅바닥을 탕, 하고 내리쳤다. 파공음이 숲 사이에 길게 퍼짐과 동시에 승려들의 봉이 복면인들을 향해 일제히 짓쳐들어 갔다. 탁탁, 챙챙, 텅텅, 병장기 부딪는 소리가 콩볶는 소리처럼 숲을 때렸다. 이윽고 승려들이 쏴아 하고 일제히 물러나더니 다시 원진을 구성하고 돌기 시작했다. 쓰러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때 혁련지가 관조운의 소매를 지긋이 잡아당겼다. 관조운이 바라보자 그녀는 눈짓으로 따라오라며 뒷걸음질 쳤다. 호법원 승려들의 이차 공격이 시작되자 또 다시 병장기 부딪치는 소리가 들렸다. 혁련지가 등을 돌려 뛰려는 순간 관조운이 그녀의 팔을 잡았다.

"사매, 우리를 위해 싸우는 분들이 계신데 어찌 그냥 가겠는가, ……도와드려야지."
관조운이 나직하게 말했다.
"사형, 지금 이럴 때가 아녜요. 내 말만 믿고 따라오세요."

혁련지가 눈을 살짝 흘기더니 등을 휙 돌려 전속력으로 숲을 벗어났다. 관조운도 더 이상 깊이 생각하지 않고 그녀의 뒤를 따랐다. 숲을 벗어나기 직전 관조운이 힐끗 돌아보니 복면인과 소림승은 여전히 드잡이질 중이다. 관조운이 잠시 멈췄다. 

"사형, 그쪽 걱정은 마시고 빨리 날 따라 오세요."
혁련지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렸다. 관조운은 여전히 드잡이질 현장에서 눈길을 거두지 못했다. 그때 소림승과 복면인들 간의 동작이 일순 멈췄다. 대결 중 공백이 생긴 것이다. 공빈이 고개를 돌려 남녀가 있던 곳을 보더니 뭐라 소릴 질렀다.

그러자 두 명의 승려가 관조운과 혁련지를 향해 뛰어왔다. 사형! 하는 짧은 외침과 함께 혁련지가 탑림 속으로 들어갔다. 관조운이 그녀를 따라가려다 잠시 멈칫했다. 그러나 그들을 쫓아오는 승려와의 거리가 일장 이내로 좁혀지자 관조운도 더 이상 망설이지 않고 탑림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남녀가 탑림 안으로 사라지자 뒤쫓던 승려들은 걸음을 멈추고 그들끼리 무슨 말인가 주고받더니 다시 드잡이질 현장으로 되돌아갔다.

소림승이 추격을 포기하자 관조운과 혁련지는 한숨을 돌렸다. 
"사매, 우리가 아무래도 도의를 저버린 것 아닌가 싶어."
"걱정 말아요. 복면고수들은 소림 땡중들한테 당하지 않아요. 그들이 공격은 하지 않고 방어만 하고 있는 게 안보였어요? 아마 맘먹고 공격했다면 지금쯤 땡중 몇이 바닥에 나뒹굴어 있을 걸요?"
"그렇긴헌데, 그래도 우리만 빠져나온 건 아무리 생각해도 도리가 아닌 거 같아."

"흥, 사형은 이 상황에서도 도리를 찾아요? 복면인들이 방어만 하는 건 우리 보고 시간을 끌어줄 테니 도망치라는 신호였어요. 우리만 무사하다면 그들의 무공으로 볼 때 포위망을 뚫는 건 식은 줄 먹기일 걸요?."
"그럼, 그들이 왜 우리를 도와준 거지?"
"거야 나도 모르죠. 이유야 어떻든 우리는 기회를 잡아야 해요. 나중에 어떻게 되든 부채와 그림을 손에 넣은 지금 최대한 빨리 벗어나는 게 급선무잖아요."
"지나가던 과객이라던데, 타인의 곤궁함을 참지 못하고 도와주다니 진정 의인들이로군."

"세상에……, 사형은 그 말을 액면 그대로 믿으세요? 이곳은 저자거리가 아니고 외인의 출입이 금지된 소림사란 말이에요. 소림에서도 가장 깊숙한 곳인 데다 묘시가 다된 새벽이라구요. 어찌 지나가는 과객이겠어요. 뭔가 꿍속이 있는데 우리가 소림 승려에게 체포되면 안 되겠기에 나선 것일지도 몰라요. 그 경우라면 딱히 고마워 할 것도 없어요."
"듣고 보니 사매의 말에도 일리가 있구먼. 그렇게 따지면 저들이 우리의 행동을 죽 지켜봤다는 결론인데?"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어요. 사정이야 어떻든 우리는 일단 소림사를 빨리 벗어나는 게 최선에요. 나중 일은 나중에 고민해요."

혁련지의 어조가 높아지며 면박을 주었다.

"그런데 사매는 겨우 빠져나온 탑림 안으로 왜 다시 들어온 거야?"
"땡중을 따돌리려고 그런 거죠. 그들도 탑림이 팔괘진으로 설계되어 있다는 걸 알면 쉽게 못 들어올 것이라 생각했어요."
"우리도 풀었는데 그들이라고 왜 팔괘진을 못 뚫겠어?"
"오행이니 팔괘니 하는 건 불가의 가르침과 다른 것이에요. 그러니 일부러 팔괘진을 궁구(窮究)한 몇몇 승려 외에는 모를 것이라 생각했어요. 안 그러면 그들이 이 깊은 밤에 번(番)을 설리 없잖아요."

관조운은 혁련지의 기민함에 혀를 차며 낮게 뇌까렸다.

"그나저나 겨우 빠져나온 팔괘진을 어떻게 또 벗어나지."
"한번 해독했는데 두 번 못하겠어요?"
"일단 아까 빠져나온 길을 역순으로 가보지."

관조운은 탑림의 구궁팔괘진을 역순으로 밟아갔다. 차 한 잔 마실 시간이 흐르자 앞서 가던 관조운이 멈추며 돌아섰다.

"사매, 다시 오중에 빠지고 말았어. 우리가 맴돌고 있는 게 확실해."
"당연하죠, 사형"하더니 혁련지가 동쪽 하늘을 가리켰다. 동녘하늘은 얇게 한 겹 벗겨낸 것처럼 어둠이 엷어졌다. 태실봉의 자태가 보일 듯 말 듯하다. 

"시간이 인시에서 묘시로 바뀌고 있잖아요. 천지의 기운이 음둔에서 양둔으로 바뀌고요."
혁련지가 빙긋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관조운이 그렇지, 하는 탄성과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그나저나 탑림을 빠져나가 달마원을 우회하면 다시 소림사 한 가운데로 들어가는 꼴인데 괜찮을까?"
"흥법회를 최대한 활용해야죠. 소림 경내가 개방되는 동안 축원(祝願) 드리러 오는 대중들이 많아요. 마침 새벽 예불에 참여한 신도들이 법당을 나올 시간이니 그들 속에 섞여 산문을 빠져나가는 게 오히려 안전할 거예요."
"맞아, 아들 하나 점지해달라고 축원하러 온 부부 행색을 하면 되겠군."
"흥, 이럴 땐 아주 명석하군요."

혁련지가 곱게 눈을 흘겼다. 관조운은 그녀의 눈길을 모른 척하고 태을구성법의 요결을 읊으며 탑과 탑 사이를 빠져나갔다.

태실봉의 가파른 봉우리를 목책처럼 두른 동녘하늘이 한결 부연해지자 새벽 예불을 끝낸 신도들이 대웅보전을 우르르 나왔다. 족히 수백 명은 됨직한 신도들은 지객당을 거쳐 산문 쪽으로 줄지어 나갔다. 그중에 신혼인 듯 젊은 부부가 서로 손을 잡고 무리들에 섞여 산문 밖을 벗어나고 있다. 습기를 머금은 바람이 사람들의 이마를 시원스레 스쳤다. 비가 오려나? 젊은 아낙이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덧붙이는 글 | 월, 수, 금 연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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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디고』, 『마지막 항해』, 『책사냥』, 『사라진 그림자』(장편소설), 르포 『신발산업의 젊은사자들』 등 출간. 2019년 해양문학상 대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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