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말'이라는 단어는 어감 자체부터 무게감을 준다. '종말'이라는 단어는 그것이 어떻게 이루어지든 '죽음'의 한 부류거나 그 연장선으로 쓰이며 우리에게 공포감을 조성한다. 그런데도 다양한 예술을 이해하는 데 있어 '종말'이라는 단어를 제쳐놓을 수 없다. 많은 예술이 고대에서부터 종말을 다뤄왔으며 언제나 종말은 사회를 이해하는 키워드로 언급되어왔다. 근래 할리우드는 물론이며 한국영화나 제3세계 영화까지 '종말'을 다루는 영화들이 등장함으로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종말'이라는 말을 마주 해야 한다.

스크린을 점령한 '종말'

 영화 <부산행>의 한 장면.

종말 영화가 지금 시점에서 스크린을 점령한 이유는 무엇일까. ⓒ NEW


근래 한국영화에서 흥행기록을 세운 <부산행>이라든가 <터널>도 종말을 다루고 있다. 이 같은 영화에 영감을 준 작품들도 종말을 다루고 있으므로 우리는 영화를 보기 이 세계의 종말을 다루는 '묵시록 서사'의 특징을 알고 볼 필요가 있다. 21세기야말로 묵시록 서사의 전성기라 볼 수 있다. 영화뿐만 아니라 소설이나 웹툰에서도 묵시록 서사의 영향력은 커지고 있기에 이 키워드를 알아두기만 한다면 종말영화가 어떻게 지금 이 순간을 그려내는지 알 수 있다. 우선 묵시록 서사를 다루기 위해서 이 분야를 탁월하게 다뤄놓은 복도훈 평론가의 평론집인 <묵시록의 네 기사>에 나온 논지들을 참고할 것이다.

죽음은 부재다. 사람은 언제나 죽음을 의식해왔으며 죽음이 곧 끝이라는 생각에 죽음 후를 상상해왔다. 문명이 발달하기 전부터 있는 장례의식이나 종교들은 죽은 뒤를 상상함으로 파생된 결과라 볼 수 있다. 우습게도 인간이 경험할 수 있는 죽음은 자신을 둘러싼 것들의 죽음이 전부다. 죽는 순간 우리가 경험이라 지각할 수 있는 근거들이 사라지기에 우린 자신이 죽는다는 사실을 느끼지 못한다. 묵시록 서사는 이 두려움에서 나타난다. 카뮈가 우리에게 진지한 철학적 물음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자살"이라 답변했을 때, 우리는 묵시록 서사로 진지한 철학적 물음을 대신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것이 우리에게 삶의 의미를 되돌려주기 때문이다.

"묵시록 서사는 인간이 단 한 번 자신의 종말을 맞이한다는 위기의식에서 촉발되어 시작과 끝을 재구성하려는 욕망 때문에 플롯이 만들어지는 과정"이라 볼 수 있다. 우리는 죽는다는 사실을 알기에 세계의 종말을 예감할 수 있는 유일한 동물이다. 자기 죽음을 볼 수 없으므로 타인들의 죽음을 대리 경험하는 투사로도 해석할 수 있으며, 이 세계가 재앙과 다르지 않다는 현실 인식으로도 보일 수 있다. 극단적으로 세계가 멸망해버리기를 바라는 염세주의의 시선일 수도 있다. 어떤 경우든 우리는 세계가 어떻게 멸망하는지를 사유함으로 세계를 멸망케 하는 원인과 그 멸망에서 인간이 어떻게 행동하는지를 통해 자신을 엿볼 수 있다.

우리는 수많은 종말영화를 봐왔다. <설국열차>처럼 시스템을 재구축하는 경우라든가 <나는 전설이다>처럼 혼자 남아 문명이 복원되기를 꿈꿀 수도 있다. 고전이라 할 수 있는 <지구가 멈추는 날>이나 <혹성탈출>처럼 인류에게 메시지를 주려는 종말도 있다. 이처럼 묵시록 서사가 대두한 것은 세계 2차 대전 이후라 볼 수 있다.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이 터졌을 때, 우리는 몇 발의 미사일만으로 그 반경이 멸망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 결과 과학 문명이 우리를 멸망시킬 수 있음을 깨달았다.

카뮈는 <페스트>에서 그 은유로 질병을 가져왔으며 B급 영화에서는 부두교에 전설처럼 떠돌던 좀비들을 가져왔다. 어느 방향이든 묵시록 서사가 대두한다는 사실은 우리 사회가 위기에 처해있음을 암시하는 경고다. 헬조선이라는 신조어가 말해주듯이 우리는 지옥을 방불케 하는 묵시록 사회에 살아가고 있기에 이에 자연스러울 수밖에 없다.

묵시록이 각광받는 시대

 영화 <터널> 중 한 장면. 주인공 정수(하정우)는 귀가하던 중 터널이 무너져 차 안에 갇힌다.

묵시록 영화의 성패를 좌우하는 관건은 작가 특유의 독창성이다. ⓒ (주)쇼박스


'나는 알파이자 오메가이다' 성경의 여호와는 자신을 이렇게 언급했다. 묵시록은 그 자체로 절망의 상징이자 희망의 상징이라 볼 수 있다. 게다가 "묵시록의 원어인 Apocalypse가 파국적인 사건뿐만 아니라 은폐된 것을 폭로하는 계시의 의미"를 동시에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카뮈는 시시포스 신화에서 우리가 죽음을 사고함으로 세계가 부조리하다는 사실을 알아차릴 수 있다는 논지를 펼쳤다. 이는 부조리를 인식함으로 우리가 기존 세계에 저항하는 단계로 더 나아가 서로를 사랑함으로 진정한 희망을 이룩해내는 단계로 나아가야 한다는 주장이다.

이를 위해서 기존 세계와 자신을 단절시켜야 한다. 우리가 흔히 미래 예측이라 부르는 행위들은 현재 데이터를 기반으로 미래를 분석한 결과이기에 결국 지금 이데올로기의 아래에 놓일 수밖에 없다. 묵시록 서사는 이러한 기대를 배반하는 서사다. 타인들이 중요시하던 가치들이 망가져 있으며 우리가 느낄 수 있는 가치만 남아있다. 묵시록 서사는 훼손된 세계에서 가치를 회복하는 행위다. 그만큼 묵시록 서사는 작가의 세계관을 여과 없이 살펴볼 수 있는 장르다. 카뮈가 사랑이라 봤던 가치를 얘기할 수도 피에르 불의 <혹성탈출>처럼 인간이 무의미하다 볼 수도 있다.

그 깨달음은 <부산행>이 비판받고 있는 지점인 한국형 신파(로 불리는 가족애와 휴머니티)라 볼 수도 있으며 인류는 부질없는 생명체라는 냉혹한 시선일 수도 있다. 비속어로까지 불리는 한국형 신파는 이미 묵시록 서사들이 강조해온 가치들을 낡게 반복함으로, 그 방식 또한 진부하므로 비판받고 있다. 묵시록 서사가 나아가야 하는 방향은 현실을 재인식시키는 방향이든, 인간의 본질을 찾는 작업이든 수행해야 한다. 부성애로 끝나버리는 엔딩은 <더 로드>(2010)라는 커다란 그림자에 가려져 버린다.

묵시록 서사는 작가의 개성이 투명하게 드러나는 만큼 독창적인 주제의식을 지녀야 한다. 우리가 탁월한 묵시록 서사를 보기 위해선 감상자들도 이 개념을 알고 그를 비판해야 한다. 이 글은 이 장르가 발달하여 더 탁월한 영화나 소설이 나오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쓰였다.


덧붙이는 글 "묵시록 서사는 인간이 단 한 번 자신의 종말을 맞이한다는 위기의식에서 촉발되어 시작과 끝을 재구성하려는 욕망에 의해 플롯이 만들어지는 과정." - <묵시록의 네 기사>(복도훈 지음 / 자음과모음 펴냄 / 2012.02 / 9000원) 7쪽 중에서

"묵시록의 원어인 Apocalypse가 파국적인 사건뿐만 아니라 은폐된 것을 폭로하는 계시의 의미." - <묵시록의 네 기사>(복도훈 지음 / 자음과모음 펴냄 / 2012.02 / 9000원) 11쪽 중에서
종말 묵시록 부산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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