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청준의 『벌레 이야기』 서문에는 아래와 같은 말이 적혀있다.

"하지만 그 주체적 존엄성이 짓밟힐 때 한갓 벌레처럼 무력하고 하찮은 존재로 전락할 수밖에 없는 인간은 그 절대자 앞에 무엇을 할 수 있고 주장할 수 있는가."

영화 <곡성>의 엔딩 크레디트가 올라갈 때쯤 한 무리의 학생들이 아우성을 쳤다. 찝찝하다는 평이 주를 이뤘다. 그럴 수밖에. 이 영화는 영영 헤아리지 못할 세상과 그걸 이해해보려는 종교, 믿음에 매달리는 벌레 같은 인간들을 지독하게 쫓으니까. 영화 <밀양>과 원작인 『벌레 이야기』를 떠올린 것도 같은 이유 때문이었다.

 영화 <곡성>의 한 장면

영화 <곡성>의 한 장면 ⓒ 신남영


<곡성>은 나홍진 감독 특유의 끈질긴 화면으로 믿음의 거울상과 같은 인간의 의심에 천착한다. 영화의 절정에서까지 흐린 경계선 위에서 인물들은 '현혹되지 말라'는 요청을 되풀이 한다. 더불어 무속신앙과 기독교적 상징들이 한데 어우러져 (귀)신은 무엇인지, 신앙은 무엇인지, 그 앞에 인간은 무엇인지 묻게 된다. 종교적 색채에 인색한 한국 관객들에게 적절한 플롯으로 짜증나는데 끝까지 보게 만드는 저력을 가진 영화가 <곡성>이다.

'당연히 버섯 때문이 아니면 뭔디?' 근대 문명을 살아가는 우리는 어떤 현상과 문제가 생겼을 때 그로부터 쉬이 과학적 인과관계가 성립하리라 믿는다. 영화 초반에 주인공인 중구(곽도원)도, 왠지 으스스한 괴담들을 듣지만 괘념치 않는다. 점처럼 흩어져있던 현상들이 반복되고 그것이 중구 본인의 일이 된 그제야 그에게 깊은 물음이 든다. '하필 내 딸에게 왜 이런 일이 생긴 겁니까?'

흔히 종교는 불가해한 세상을 이해하려는 인간들의 해석 체계라 불린다. 도저히 이유를 알 수 없는 재해, 갑자기 닥쳐든 불행, 한치 앞을 모를 내일 일에 대해 인간은 '의미'가 있기를 바란다. 혹은 설령 과학적인 이유가 없더라도 납득할 이유를 만들어 어떻게든 살아보려 애쓴다. 물과 빵으로만 살 수 없는 동물은 어느 순간 자기 앞에 위기가 닥쳤을 때 그에 대한 설명을 필요로 한다. <곡성>은 집요하게 '설명'을 찾아나서는 중구의 모습을 시종일관 포착한다.

물론 그 자체를 멀찍이서 제3자가 볼 땐 고개를 갸우뚱할 때가 생긴다. 마을의 병이, 딸이 미쳐 돌아가는 게 이방인(쿠니무라 준) 때문이라고 중구가 되뇔수록 관객들은 정말 그럴까, 혹시 막 다른 원인이 있는 건 아닐까 의심한다. 허나 당장 자기 삶의 문제에 부닥친 중구에게 설령 비합리적이더라도 믿음은 구원이다. 극이 흐를수록 너무나 논리적인 모양으로 이미 믿음은 자라간다. 잦은 의심은 오히려 신앙을 공고히 해 피차 깨지지 않는 재생산의 고리를 완성한다.

그건 관객도 마찬가지다. 아마 무명(천우희)과 이방인 중 누가 원흉이냐를 두고 갑론을박이 많을 것이다. 또한 기독교적 요소들로 미뤄볼 때 이방인이 악마인 건지, 그럼 무명은 예수인 건지, 그렇다면 그를 두고 떠난 중구는 베드로와 같은 건지 궁금해진다. 하지만 짜임새 있는 관계 지도를 그리기에 카메라는 의도적이었다. 편파적인 정보들만 두고 각자의 해석 체계는 뭉그러지거나 두터워진다. <곡성>을 보는 모두가 선명한 결과, 명쾌한 리뷰를 갈망한다는 데서 이 영화의 종교적 효과를 엿볼 수 있다.

개인적으로 이 영화는 (귀)신 사이에 흐르는 힘의 논리를 다룬다고 읽혔다. 여기서 굳이 (귀)신이라고 쓰는 이유는 '신' 개념이 주로 기독교에서 쓰이는 유일신 하느님과 일치할까봐 일부러 분리한 것이다. 설령 이 영화가 기독교적 상징체계를 갖췄다 해도 그건 현대의 것이 아닌 고대 기독교에 가까워 보인다. 페르시아의 포로가 된 이스라엘은 조로아스터교의 영향을 받아 착한 신-악한 신이라는 개념을 받아들인다. 이때부터 등장한 사탄이라는 존재는 유대교에서 이스라엘 민족의 (귀)신이었던 하느님과 같은 선상에 놓인 신으로 여겨졌던 셈이다. 만약 무명과 이방인을 (귀)신으로 둔다면 고대 기독교에서 거론한 존재들로 이해해볼 수 있다.

두 (귀)신을 본격적으로 다루는 이원론(dualism)에서 메시아는 사탄을 물리치기 위해 천상으로 내려와 세상을 만든 조물주 괴물인 데미우르고스(얄다바오쓰)와 싸운다. 영화 종국에서 무명과 이방인은 효진(김환희)을 사이에 두고 종구를 유혹하며 대결한다. 마치 무속신앙에서 여러 귀신과 보살이 있듯이 기독교적 상징으로서도 두 (귀)신은 대등하게 묘사된다. 그들이 엎치락뒤치락 하며 힘을 겨루는 사이에서 나약한 인간은 제발 살려달라는 기도와 발악으로 연명한다.

대부분의 종교, 특히 유대교 계통 종교들은 둘 중 선한 쪽이 승리한다는 식의 해석이 많다. 그에 비해 <곡성>은 주인공의 불행을 상세히 보여준다. 마치 악마로 그려진 이방인의 승리처럼 비친다. 하지만 그 둘을 선과 악으로 뚜렷이 구분할 수 있을까. 둘은 그저 자기 일을 하는 건지도 모른다. 성경에 나오는 욥기에서 하느님은 욥에게 온갖 불행을 다 내린다. 그리고 마지막에 말한다. "나는 천지를 지은 하느님이다." 어떤 근거나 설명이 필요 없다는 것이다.

무당인 일광이 피로 얼굴을 적시며 희생제물을 바치는 행위도 같은 맥락이다. 그는 더 강한 자에게 기대는 천직을 타고났다. 처음에는 자신이 본래 섬기던 (귀)신에게 기댔지만 종국에 대결에서 이긴 이방인의 신물을 챙기던 그였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라는 구절처럼 선과 악의 구분 없이 더 강한 절대자가 자신에 대한 의심과 믿음을 먹고 몸뚱이를 얻는다.(마지막에 종구는 무명을 의심하는 게 아니라 믿지 않았다. 이삼(김도윤)은 이방인을 의심하면서 믿었다.)

"무엇이 더 중헌디. 무엇이 더 중헌디 씨벌롬아!"

힘을 부리는 귀(신)의 섭리 속에서 인간이 상정했던 삶의 개연성은 우연을 가장한 채 무의미로 수렴한다. 의미를 못 찾고 해석 불가능한 세상에 놓인 종구. 그가 겪어야 했던 우연한 비극과 극이 끝난 후에도 계속될 그의 삶을 떠올리면 자연스레 영화 <밀양>의 신애가 떠오른다. <곡성>이 보다 상징적이고 원초적으로 무자비한 현장 그 자체를 다뤘다면 <밀양>은 보다 현실적으로 그 안에 고통당하는 인간을 포착한다.

아들을 잃은 후 신애는 신음한다. 사라진 자식, 애끓게 기다렸던 시간이 무색하게 싸늘한 주검 앞에 그녀에겐 '이유'가 필요했다. 왜 내 아들은 죽어야 했는가, 왜 하필 내 아들인가, 내가 뭘 잘못했는가, 매일 아침 눈을 뜰 때마다 새로운 통증의 시작이었다. 우연히 병을 얻어 우연히 고통 받고 우연히 불행을 받은 종구 일가처럼 그녀는 무의미하고 무력한 상황에 발버둥 치다가 주저앉고 만다.

소설가 이청준은 이 이야기의 제목을 『벌레 이야기』라고 지었다. 결국 스스로의 믿음으로 구원받은 범인을 보며 신애는 영혼까지 참혹히 부서진다. '누가 나보다 먼저 그를 용서할 수 있나요. 하느님도 그럴 수 없어요.' 범인의 믿음은 자기 자신을 위한 (귀)신을 만들었고 신애가 매달렸던, 자기 아들을 구원해주리라 믿었던 (귀)신은 희미해진다. 그녀를 돌보던 교회 집사는 끝까지 하나님의 섭리와 믿음을 강조한다. 삶을 용서할 기회마저 허락받지 못한 신애는 스스로 목숨을 끊어 더 강한 에너지(믿음)을 요구하는 대결에서 이탈한다.

"아내의 심장은 주님의 섭리와 자기 '인간' 사이에서 두 갈래로 무참히 찢겨 나가고 있었다."

벌레 같은 인간의 본모습을 알고도 인간은 스스로를 견딜 수 있을까. 아비규환 가운데서도 종구의 외마디가 안타깝다. '아부지 경찰이여. 뭐든 다 해결할 수 있으.' 절대적인 힘의 논리로 돌아가는 듯한 생애, 혹은 그런 인과적 설명마저 무색한 세상에서 한 발자국도 예상할 수 없는 것이 인간이란 미물이다. 다만 종구는 마지막까지 자기 '인간'을 붙잡으려 애쓰는 듯하다. 결국 희망을 가장한 초라한 믿음만이 다시금 무력함을 이고서, 삶이라는 실체를 가능케 한다고 볼 수 있다.

또한 원작과 달리 영화 <밀양>에서 신애는 자살을 시도하는 데 그친다. 자기 곁을 맴돌던 종찬(송강호)와 함께 지내며, 그러나 여전히 함부로 세상을 용서하지 않으며 신애는 살아간다. 그래서 종찬과 함께 집에서 머리카락을 자르는 장면은 쓴물마저 없는 담백함의 결정체다. 감독 이창동은 아마도 그나마 실낱같은 관계로 서로 기대며 근근이 삶은 계속된다고 말하고 싶던 게 아닐까.

어쩌면 영화의 비참한 최후를 보고도 여전히 어떤 설명을 해보려는 나 또한 어떤 소망을 믿음으로 빙자해 쫓고 있는지도 모른다. 무참히 짓밟혔을지언정 지는 싸움에도 끝장을 보는, 초라한 믿음과 적극적인 체념으로 한데 살아내는 등장인물들의 모습은 우리가 바라는 실상이자 못 이룰 욕망은 아닐까. 흔들리고 핍박받지만 디딘 땅에 오롯이 서려는 그들에게서 힘겹게 삶을 버티는 나를 발견한 건 결코 우연은 아니리라고 믿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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