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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리반은 음악가들과 함께했다. 두리반이 사라진 지금, 음악가들의 '두리반'은 어디에 있을까? 지난 15일 다큐 <파티51> 개봉 기념 특별 공연 뒤 '밤섬해적단'의 드럼 권용만씨와 '단편선과 선원들'의 보컬 단편선씨를 만나 음악가들의 '지금'에 대해 물었다. - 기자의 말

2010년, 자립음악가들이 두리반 옥상에 모여 51+ 공연을 기획하고 있다.
 2010년, 자립음악가들이 두리반 옥상에 모여 51+ 공연을 기획하고 있다.
ⓒ 박김형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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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리반은 성장의 공간이다. 단순히 빼앗긴 권리를 찾기 위한 투쟁을 넘어선다. 음악가들은 이 공간에서 특별한 경험을 했다. 그들은 사용료를 요구하지 않는 두리반에서 매일 음악을 했다. 음악가 공동체 속에서 그들의 예술적 성취는 날이 갈수록 늘어만 갔다. 음악가들은 경제적으로 자유로우면서, 같은 꿈을 공유할 수 있는 '공간'이 필요했던 터였다.

2010년 6월 두리반의 일부 음악가들은 조합 준비모임을 결성했고 2011년 4월 발기인대회와 8월 첫 총회 이후 '자립음악생산조합'(아래 조합)의 공식적인 활동을 시작했다. 조합원은 총 250여명. 조합은 조합원의 음반제작을 지원하고 공연이 가능한 공간을 제공하며, 음악 교육 및 네트워크 구축에 도움을 주기 위해 만들어졌다. 하지만 이 과정은 순탄치 않았다. 우선 그들은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고민을 시작해야 했다.

음악가들은 예술과 정치 사이에서 고민을 했다. 두리반의 투쟁이 전국적으로 알려지자, 두리반에서 활동하던 음악가들도 덩달아 유명세를 타 진보적 색채를 띤 행사에 자주 불러 다녔다.

"저희가 모르는 집회 장소에 조합 이름이 걸려 있었더라고요."

현재는 조합을 떠난 밤섬해적단 드럼 권용만의 말이다.

"사람들에게 조합이 운동권 밴드 모임으로 보였어요. 저희 쪽에서는 억울했던 게 운동권 밴드 집합이 아니라 밴드들이 모여서 운동을 한 번 했던 것인데, 운동권 밴드 모임이 되어버린 거죠"라며 "그래서 그 뒤론 기준을 세웠어요. <파티51>에서 제가 가장 좋아하는 장면인데, '그래도 우리가 괜찮다고 생각하는 것은 직접 하자'라고."

이렇게 정체성을 확립하는 과정에서 조합은 정치적 참여의 활동범위를 정했다. 그리고 권씨와 마찬가지로 조합원의 구성에도 변화가 생겼다. 초기에 같은 입장에서 조합을 시작했지만, 생각의 차이가 생겼던 것이다.

"애초 멤버가 같을 순 없어요. 그걸 이제 알았어요. 지금도 친구로 지내고 있지만 일을 같이 하지는 않아요. 걔는 걔의 삶, 저는 저의 삶이 있는 건데. 조합이라는 이름아래 같이 하다 보니 자기와 맞지 않는 일을 한 셈이죠."

단편선은 초기와 바뀐 조합의 정체성과 구성원을 두고 이렇게 말했다. 조합은 정체성에 대해 고민하며 많은 변화를 겪었다. 실제로 <파티51>의 축하공연에 나온 음악가 중 하헌진과 밤섬해적단은 현재는 조합원이 아니다.

새로운 장소를 찾아 떠난 자립음악생산조합

2010년 3월 6일, 두리반에서 공연을 하는 중인 단편선의 모습.
 2010년 3월 6일, 두리반에서 공연을 하는 중인 단편선의 모습.
ⓒ 구보라, 이진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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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리반 이후, 조합이 활동할 장소를 구하는 것도 버거운 일이었다. 조합은 더 적합한 장소를 찾아 계속 이동했다. 대공분실, 로라이즈, 꽃땅, 조광사진관까지…. 이때부터 고단한 이동이 시작됐다.

첫 장소는 석관동 한국예술종합학교(아래 한예종) 학생회실 지하 대공분실이었다. 조합은 한예종 학생회 및 동아리 연합회와 교내 비어있는 대공분실(구 안기부 건물)을 2011년부터 사용하기로 했다. 대공분실의 입지는 좋지 않았지만 이를 감수할 만큼 월세부담도 전혀 없었다. 하지만 공동운영주체인 한예종 학생들의 군대, 취업, 졸업문제로 대공분실 활동을 더 이상 지속할 수 없었다.

다음은 문래동 클럽 로라이즈였다. 이는 소음 민원 때문에 오래 지속하지 못했다. 방음공사를 위해 소셜 크라우드 펀딩으로 약 600만 원가량 유치했지만, 민원을 막기 위한 방음을 하는 데는 턱없이 부족한 액수였다.

이태원 복합문화공간 꽃땅은 애초에 단기 프로젝트였다. 꽃땅의 부지는 이미 재계발이 예정되어있었다. 결국 조합은 또 다른 장소를 찾았고, 현재 자리 잡은 조광사진관이 조합의 보금자리이다.

충무로에 자리 잡은 이곳은 실제로 '사진관'이다. 낮에는 사진관으로 운영하고 저녁 이후에는 조합의 공간으로 사용된다. 이는 조합의 일원이며 조광사진관의 주인인 박정근과의 인연 덕분이다. 박정근은 '김정일 가슴 만지고 싶다'는 트위터 농담으로 북한 찬양, 고무 행위로 기소되었다가 무죄판결을 받은 주인공이다. 그러나 이곳에서의 생활 역시 몇 가지 제약을 받는다.

"민원에 대처할 노하우를 익혔어요. 보통 충무로 사진관은 8시면 문을 닫거든요. 저희 합주는 8시 이후에 해요."

단편선은 제약에 대해 별 문제가 없다고 여유롭게 말했다.

다시는 없을지도 모르는 특수한 공간 두리반

2010년 "두리반에 칼국수를 허하라"라는 피켓을 들고 51+ 공연을 홍보하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
 2010년 "두리반에 칼국수를 허하라"라는 피켓을 들고 51+ 공연을 홍보하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
ⓒ 박김형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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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조합의 이동을 보면 '고난의 행군'에 가깝다. 내부 인력문제, 민원, 재계약 등 다양한 이유로 오래 머물 공간을 얻지 못했다. 결국 자본에 밀려 밖으로 밀려가는 것은 아닌지 의문이 들었다. 그래서 직접 자본에 밀려났는지 물었다. "쫓겨난 것으로 느끼지 않느냐?"고 묻자 단편선은 이내 "'쫓겨났다'라는 표현은 어울리지 않는다"라고 말했다.

"만약에 저희가 하고 싶어서 못하면 '쫓겨났다'라는 표현이 어울릴지도 모르겠는데, 저희는 우선 '홍대'같은 곳에 자리를 잡을 생각도 없었어요. 저희는 조합이 활동할 수 있는 한적한 곳을 찾았고, 내부 조직문제나 외부의 상황에 의해 '선택'했다고 할 수 있어요. 월세 같은 금전적인 문제도 이 선택의 고려사항인 것도 사실이죠."

조합은 버티고 서있다. 정체성의 확립에서도, 보금자리를 마련하는데도 그 어느 것 하나 만만한 것은 없다. 단편선 역시 이러한 역경 속에 자신이 조합을 하는 이유에 대해 말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가 두리반과 함께하면서, 많은 것을 배우고 받은 것 같아요. 사실 제가 조합에 포함되지 않으면 친구들에게 (배운 것을)공유하는 방법을 찾으면서 까진 하지 않을 거 같아요. 책임이 있기 때문에 도움을 주고받을 수 있겠죠. 이런 포맷이 없으면 기회조차 없을 것 같네요."

두리반은 다시는 없을지도 모르는 특수한 공간일지 모른다. 자립음악생산조합 역시 이러한 사실은 잘 알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그곳을 더 이상 그리워하고만 있지 않는다. 두리반이란 공간은 뮤지션들에게 자신의 정치성과 지속가능한 예술에 눈을 뜨게 해줬다. 그들은 원하는 것은 좀 더 지속가능한 다른 공간을 자신들이 만들어가는 것이다. 우리는 지금 그들이 이 풍파 속에서 '버티고' 있다는 사실마저 그저 고마울 뿐이다.

덧붙이는 글 | 20대 청춘! 기자상 응모글



태그:#두리반, #단편선, #파티51, #자립음악생산조합, #밤섬해적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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