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731부대
 731부대
ⓒ 서은혜

관련사진보기


지난 8월 9일에서 15일, 흥사단에서 활동하는 대학생 통일아카데미 학생들과 독립유공자 후손, 흥사단 회원들은 북·중·러 탐방을 다녀왔다. 흥사단은 민족의 자주독립과 번영을 위해 도산 안창호 선생이 창립한 민족운동단체다. 해방 후 흥사단은 민족통일운동과 교육운동의 일환으로 독립유공자후손돕기, 대학생 통일아카데미 등 다양한 활동을 하고 있다.

이번 탐방은 흥사단 민족통일운동본부, 흥사단독립유공자후손돕기본부, 흑룡강조선어방송국이 주최했다. 대학생 통일아카데미 학생들이 프로그램 및 자료집 작성 등을 맡았다. 독립유공자 후손들과 함께 20세기 독립운동의 현장을 답사하며, 21세기를 살고 있는 우리가 열사의 뜻을 이어서 어떻게 통일 한반도를 만들어나갈 것인가를 모색하는 자리였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시작된 길고 긴 여정

탐방대의 일정은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시작됐다. 건물도 사람도 개도 모든 게 길쭉길쭉한  이런 이국적인 풍경이 어쩐지 조금 슬프게 느껴진다. 조국을 떠나 머나 먼 타국에서 한인들이 이래저래 고단했을 모습이 떠오르기 때문이다.

1870년대 이후 러시아에 거주하는 한인들이 늘어나자 당국에서는 한인들의 집단 거주 구역을 설정하고 이곳을 '신한촌'이라 명명했다. 신한촌이 있었던 자리는 슈퍼와 아파트들이 대신해 흔적도 찾아 볼 수 없다. 이동휘 선생의 집터와 신한촌 터 근처에 유일하게 세워져있는 연해주 기념비 앞에 국화를 놓고 묵념을 했다.

스탈린의 강제 이주 정책으로 창문도 없는 기차 칸에서 강제 이주되며 한인들이 느꼈을 공포와 절망감을 다 헤아릴 수 없다. 그러나 한인들은 항일의지로 불꽃과 같은 삶을 살았다. 스탈린의 강주 이주 정책에 의해 불모지에 이르렀을 때도, 들꽃과 같이 강인한 생명력으로 땅을 일궈냈다.

탐방대는 이러한 정신의 근간인 대륙까지 뻗어나갔던 발해의 유적지를 살펴보고, 고려 문화 센터에서 한인들의 자취를 찾았다.

답사 3일째, 크라스키노로 이동 후 중국 훈춘에서 비자 수속을 마치고 입국했다. 훈춘·도문·용정까지 오전 3시에 시작한 일정은 오후 10시가 되어서야 끝났다.

탐방대가 새벽부터 달려 도착한 곳은 크라스키노 핫산군에 위치한 안중근 의사의 단지동맹비였다. 1909년 3월 2일, 노브키에프스크에서 12명의 동지가 모여 단지회라는 비밀결사를 조직했다. 이들이 침략의 원흉을 제거하기로 맹세한 것을 기념한 비석이 단지동맹비다. 기념비를 마주하니 이토 히로부미를 암살하고 법정에서 당당한 태도를 잃지 않았을 안중근 의사의 모습이 그려져 숙연해진다.

버스로 국경을 넘고, 중국에 도착한 곳은 일안망삼국. 즉 세 나라가 한 눈에 보인다는 훈춘이다. 이곳에서는 러시아·중국·북한을 한 눈에 볼 수 있을뿐더러 러시아인과 중국인을 모두 만날 수 있다. 단, 북한 사람들은 볼 수 없다. 통일 한국이 되어 굳이 북한 사람, 남한 사람 구분하지 않아도 될 날을 꿈꾸게 되는 대목이다.

조금 더 이동하면 봉오동 전투의 장소 도문이 나타난다. 이곳에서 홍범도 장군은 기지를 발휘해 일본군을 유인, 매복에 성공해 대승을 거둔다. 마지막으로 탐방대는 중국 길림의 이도백하에 도착해 3일째 대장정을 마무리 했다.

교과서가 아니라 탐방에서 얻은 교훈

다음날 탐방대는 백두산을 찾았다. 봉고차 덕분에 비교적 쉽게 천지까지 올라갈 수 있었다. 외국인이 왔다면 백두산이 중국 땅이라 여길 만큼 빨간 외투를 입은 중국인들이 대부분이었다. 봉고차에서 만난 빨간 외투를 입은 조선족 할머니는 "오늘(8월 12일)은 날씨가 좋은 편"이라고 했다.

천지에 다다르자 온도는 급격히 떨어졌지만 맑고 황홀했다. 다음에 백두산에 올 때는 이렇게 중국을 통하지 않고 남에서 북으로 바로 올라왔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름다운 백두산의 흙을 퍼다가 제주도에 가져가 나무를 심을 수 있는 그 날을 그려보았다.

백두산에서 내려와 작은 슈퍼에 들렀다. 그런데 백두산을 장백산이라 표기한 생수 광고에 한국의 유명 연예인이 등장했다. 중국 현지에서 역사가 왜 과거가 아니인지, 왜 현재이자 미래인지 깨닫는다. 역사를 그저 과거로만 여기고 무관심했던 나부터 반성하게 된다. 

중국의 동북공정 작업은 다음날 발해 박물관에서도 여실히 보여주었다. 발해왕들의 역대 초상화는 문왕을 제외하고 모두 황제의 복장이 아니고 신하의 복장이다. 즉 발해가 국가가 아닌 중국의 지방정권에 불과하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발해를 설명하는 안내문에도 중화민족이라는 말이 들어가 있었다.

윤동주는 항일시인으로 유명하다. 그의 사촌 송몽규도 윤동주에 못지않게 활약했다. 두 사람은 같은 해에 태어나 독립운동을 하고, 같은 해에 감옥에서 생을 마감한다. 두 사람은 또한 명동학교에 같이 다닌 것으로도 유명하다. 윤동주의 절친한 친구이자 민주화 운동과 통일 운동에 투신했던 문익환도 명동학교가 배출한 인재다.

김약연 선생이 명동서숙을 명동학교로 만들고 초대 교장이 됐다. 당시 작문시간에는 '애국'과 '독립'이라는 말이 들어가야만 점수를 받을 수 있었다고 한다.

명동학교에서 머지않아 윤동주 생가가 자리잡고 있다. 시인의 생가답게 곳곳에는 그의 시를 새긴 비석들로 가득하다. 시를 보고 있노라면 영롱한 영혼의 윤동주 시인이 느껴지는 것만 같다. 그는 항일운동을 더 적극적으로 하지 못하는 자신에게서 죄책감을 느꼈다고 한다. 괜스레 마음이 아프다.

세월호를 기억하는 조선족학교... 감사하다

목단강 조별 미션 프로그램은 대학생 통일 아카데미의 기획 아래에 진행됐다. 탐방대를 시작할 때 4개의 조로 나눠졌던 대학생 통일 아카데미 학생들과 독립 유공자 학생들은 각자 조별로 미션을 해결했다.

내가 소속됐던 4조는 팔녀투강비를 찾아 인증샷찍기, 목단강 시내의 시장 다녀오기, 마지막으로 조선족 학교에 도착하기가 과제였다. 비교적 미션이 쉬워서 앞의 두 가지는 어찌어찌해낼 수 있었다. 하지만 마지막 미션은 중국인 택시 기사분과 의사소통이 되지 않아 조선족 경비아저씨를 만나서야 겨우 해결 할 수 있었다.

우리가 어렵사리 도착한 목단강조선족학교는 흑룡강 조선중학교 가운데 가장 큰 민족중학교다. 이 날은 '동북아 청소년 백일장 대회 시상식'이 있는 날이었다. 흥사단에서 준비해 온 선물을 전달하고, 목단강조선족학교와의 인연을 짧게 소개한 뒤 곧 학생들의 공연이 시작됐다.

학생들은 춤, 노래, 글로 각자의 재능을 뽐냈다. 이들은 K-POP 춤을 출 수 있고 지난 4월에 있었던 세월호 참사에 대해 알고 있었다. 백일장에서 1등을 차지한 학생의 글에는 세월호 사건에 대한 슬픔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몸은 중국에 있는데도 한국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이 신기했다. 또 놀랍고 감사한 일이었다.

얼마 전 MBC 창사특집으로 방영한 다큐멘터리 <카레이스키 150년 만의 귀향>을 관심 있게 지켜본 것도 이번 탐방대 활동을 통한 나의 변화다. 그들의 애환에 마음이 쓰이고, 그들의 삶이 궁금해졌다.

광복절은 우리 탐방 일정의 마지막 날이었다.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했던 장소를 방문했다. 하얼빈의 안중근의사기념관에서는 안 의사가 뤼순 감옥에서 순국할 때까지의 일대기를 조명한 사료와 사진을 볼 수 있었다. 특히 이날 관람을 위해 들어오는 한국의 여·야 의원들과 마주쳤다. 국회에서도 안중근 의사의 정신을 이어갈 수 있기를 소망해본다.

이번 마지막 일정으로 도착한 곳은 731부대였다. 마침 사진전을 열고 있었는데 전쟁 중 일제가 저지른 참혹한 만행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었다. 일본은 다른 이의 고통에 눈 감고, 잘못을 가리기 급급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하지만 이같은 태도는 결코 일본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

목적을 위해 수단과 과정은 가리지 않고 사람을 도구로 이용하는 것. 이것은 어쩌면 현대에도 다른 형태로 똑같이 반복되고 있는지 모르겠다. 어느새 우리도 무감각해져 누군가에게 폭력을 휘두르고 있지 않은지 돌아보고 또 돌아보아야 한다.

덧붙이는 글 | 20대! 청춘 기자상 응모작



태그:#북중러 탐방대 자료집 참조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