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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를린 동물원은 한 해 260만 명의 관람객이 찾는, 유럽에서 가장 유명한 동물원이다. 2006년 12월 5일에 태어나 2011년 3월 19일 세상을 떠난 북극곰 '크누트'는 전 세계에서 최다 동물 종을 보유한 이곳에서 가장 주목받는 동물이었다.

크누트는 태어나자마자 어미에게 버림 받았다. 동물원 동물들은 야생과 거리가 먼 환경으로 인한 스트레스 때문에 갓 태어난 새끼를 방치하는 경우가 많다. 사육사 토마스는 동물원에서 살다시피 하며 온갖 정성으로 크누트를 살려냈고, 이 아기 곰은 곧 세간의 주목을 끌게 된다.

크누트가 동물원에서 첫 선을 보이던 날, 베를린 동물원에는 무려 3만 여명의 관람객과 400여 명의 기자들이 모여들었다. 같은 날 개최된 유럽연합 기념행사가 가려질 정도로 크누트의 인기는 대단했다. 크누트를 위한 팟캐스트와 웹캠이 운영되었으며, 크누트 인형, 배낭, 기념 접시, 쿠키, 사탕 등 각종 크누트 관련 상품이 불티나게 팔렸다.

당시 베를린에 체류 중이던 미국 작가 조너선 사프란 포어는 이러한 열풍을 지켜보며 '종간 장벽'에 대한 독특한 정의를 내렸다. 사람들은 동물원에 가서 크누트를 만나고, 배가 고파지면 그 옆에 있는 매점에서 '크누트 소시지'를 사먹는다. 소시지가 된 돼지는 크누트 못지않게 영리하며 사람들의 관심을 받을 만한 특징을 지녔지만 한낱 식재료로 취급된다. 채식주의자인 포어는 자신의 책 <동물을 먹는다는 것에 대하여>에서 '스타' 대접을 받는 크누트와 '먹을 것'으로 간주되는 돼지 사이에 존재하는 간극에 '종간 장벽'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동물, 먹을까... 아니면 사랑할까?

인간은 '공감하는 존재'이다. 공감의 대상은 같은 인간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도축장에서 피 흘리는 돼지를 상상하면서 삼겹살을 맛있게 구워 먹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TV에서 소·돼지·닭이 도살되는 장면을 볼 수 없는 것도 같은 이유 때문이다. 사람은 잔인한 장면에 본능적으로 거부감을 느낀다.

세상의 동물은 고통을 느낀다는 점에서 다르지 않다. 그런데 동물을 대하는 사람들의 태도에는 일관성이 결여되어 있다. 개를 먹는 문화를 혐오하는 서구인들도 소·돼지·닭을 비롯한 이른바 '식용' 동물을 먹을 때는 불편을 느끼지 않는다. 우리나라에는 개를 식용으로 간주하는 입장과 그렇지 않은 입장이 모두 존재한다.

멜라니 조이의 <우리는 왜 개는 사랑하고 돼지는 먹고 소는 신을까> (노순옥 옮김·모멘토)
 멜라니 조이의 <우리는 왜 개는 사랑하고 돼지는 먹고 소는 신을까> (노순옥 옮김·모멘토)
ⓒ 모멘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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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적으로 소는 '먹는 동물'로 간주된다. 그러나 누구에게는 '자식 같은 존재'가 되기도 한다. 2012년 6월에 방송된 SBS스페셜 2부작 다큐멘터리 <동물, 행복의 조건 1부 '고기가 아프면 사람도 아프다'>에는 죽어가는 송아지를 살려내어 반려동물처럼 기르는 할아버지가 등장한다. '다행이'라는 이름을 가진 이 송아지는 할아버지의 농장에서 가장 특별한 동물이다. 할아버지는 다행이만은 고기용으로 팔지 않겠다고 말한다. 

미국 매사추세츠대 사회심리학과의 멜라니 조이 교수는 사람들이 동물을 대하는 모순적인 태도를 지적하면서, 이런 모순의 원인으로 '인식의 단절'을 꼽았다. 사람들은 반려동물처럼 '무엇'이 아닌 '누구'로 인식하는 동물을 먹는 것에 대해 거부감을 느낀다. 그러나 일상적으로 먹는 동물의 고기를 마주할 때는 그렇지 않다.

이런 경우, 사람들은 접시 위의 고기와 살아있는 동물을 연결 짓지 않는다. 내가 먹는 고기를 위해 동물이 희생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지만, 그 이상 인식을 확장시키지 않는 것이다. 

'육식주의'라는 신념체계

채식주의는 육식과 완전히 다른 것으로 간주되곤 한다. 일반적으로 채식주의는 동물을 죽이지 않겠다는 신념이나 가치관에 따른 개인의 '선택'으로 여겨진다.

이에 반해 육식은 신념이나 가치관과 무관한, '삶에 반드시 필요하고 자연스러운 행동'으로 간주된다. 그러나 식량의 양적·질적 풍요를 누리는 오늘날의 산업 국가에서 육식은 더 이상 '필수'가 아니다. 동물을 먹지 않고도 건강과 장수를 누리는 사람이 무수히 많다. 즉, 오늘날 대다수의 국가에서 육식은 채식주의와 마찬가지로 '선택'의 문제가 되었다. 

육식이 선택이 되었음에도 여전히 필수적이고 당연한 것으로 간주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멜라니 조이 교수는 육식이 필수라고 믿게 만드는 '보이지 않는 신념체계'가 존재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녀는 저서 <우리는 왜 개는 사랑하고 돼지는 먹고 소는 신을까>에서 이 보이지 않는 신념체계에 '육식주의(carnism)'라는 이름을 붙였다.

멜라니 조이는 책 서두에서 가상의 현실을 제안한다. 당신은 저녁식사 파티에 초대받았다. 집주인이 내온 고기 요리가 너무 맛있어서 당신은 무엇으로 만들었냐고 묻는다. 으쓱해진 주인이 "골든리트리버(개의 한 종류) 고기를 갖은 양념에 재워서 만들었다"고 대답한다. 그 말을 들은 당신은 요리를 계속 먹을 수 있을까? 개고기에 거부감보다 호기심을 느끼는 사람들도 있을 수 있겠지만, 미국에서 일반적으로 개는 먹는 동물로 간주되지 않는다. <우리는 왜 개는 사랑하고 돼지는 먹고 소는 신을까> 영상 트레일러의 한 장면. 출처: www.carnism.org.
 멜라니 조이는 책 서두에서 가상의 현실을 제안한다. 당신은 저녁식사 파티에 초대받았다. 집주인이 내온 고기 요리가 너무 맛있어서 당신은 무엇으로 만들었냐고 묻는다. 으쓱해진 주인이 "골든리트리버(개의 한 종류) 고기를 갖은 양념에 재워서 만들었다"고 대답한다. 그 말을 들은 당신은 요리를 계속 먹을 수 있을까? 개고기에 거부감보다 호기심을 느끼는 사람들도 있을 수 있겠지만, 미국에서 일반적으로 개는 먹는 동물로 간주되지 않는다. <우리는 왜 개는 사랑하고 돼지는 먹고 소는 신을까> 영상 트레일러의 한 장면. 출처: www.carnism.org.
ⓒ Carnism.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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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식주의의 신념체계 덕분에 사람들은 평소 고기를 먹을 때 살아있는 동물을 떠올리지 않는다. 구제역이나 조류독감으로 무수한 가축들이 폐기처분되는 기형적인 현실에서도 대다수의 사람들이 '육식은 정상적이고, 자연스럽고,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것도 이러한 신념체계 때문이다. 육식이 동물과 환경에 미치는 폐해가 심각하다는 사실을 알고 나서도 육식을 선뜻 관두기가 쉽지 않은 것도 인간 사회에 견고하게 뿌리내린 육식주의 시스템 때문이다. 

조이 교수가 육식주의라는 명칭을 만들어낸 것은 동물을 먹는 사람을 전부 '육식주의자'로 매도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신분이나 피부색, 성별에 따른 차별이 그러했듯이, 관습이나 전통으로 옹호되는 신념체계를 문제 삼기는 쉽지 않다. 게다가 겉으로 드러나지 않고, 이름도 없이 존재하는 신념에 도전하기란 더더욱 어렵다. 조이 교수가 동물을 먹는 행위 근저에 있는 신념체계에 굳이 '육식주의'라는 이름을 붙이고 겉으로 드러내 보인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육식주의는 그것에 관계된 자들을 각기 다른 방식으로 희생 시킨다. 최소한의 비용으로 보다 빨리, 보다 많은 고기를 얻기 위해 고안된 현대식 농장과 도살장은 동물들의 지옥이 되었다. 도축장에서 최소한의 안전도 보장받지 못한 채 육체적 위험을 감수하고, 동물을 죽임으로써 정서적 대가를 치르는 노동자들도 육식주의의 희생양이다. 소비자 역시 과도한 육류 섭취로 건강을 해치고, 자신이 먹는 고기가 원래 생명이었음을 망각하는 인식의 단절을 겪는 대가를 치르고 있다. 축산업이 방출하는 오염물질로 황폐해진 지구환경 역시 육식주의의 희생양이다.

육식주의는 동물이라는 '약자'를 맘대로 지배해도 좋다는 억압의 이데올로기다. 또한 '힘이 곧 정의'라는 믿음을 추종한다는 점에서 약자의 고통을 담보로 하는 여느 폭력적인 이데올로기들과 다르지 않다.

조이 교수는 우리가 육식주의에 대해 알아야 하는 이유는 바로 이 때문이라고 말한다. 부조리한 이데올로기에 공통적으로 존재하는 요소를 알아내지 못하면, 우리는 언젠가 또 다른 부조리를 용인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녀는 동물을 먹는 문제는 단순히 개인의 윤리 차원을 넘어선 사회 정의의 문제라고 말한다.

이 책은 인간이 누구나 평등한 것처럼 모든 동물은 평등하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그리고 '개는 쓰다듬고 돼지에게는 고통을 주는' 의식구조에 도전함으로써, 동물 간에 차등을 두는 우리의 모순을 돌아보는 한편, 약자에 대한 공감을 회복하자고 주장한다.

상향평준화와 하향평준화... 우리가 나아갈 길은?

<인도주의행동연합> 회원들이 지난 7월 26일 서울 홍대거리에서 개식용 반대 캠페인을 벌이고 있다. <인도주의행동연합> 캠페인의 목표 중 하나는 '소·돼지·닭을 먹고 있으니 개도 먹어야 한다'는 하향적 평등의 프레임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인도주의행동연합> 회원들이 지난 7월 26일 서울 홍대거리에서 개식용 반대 캠페인을 벌이고 있다. <인도주의행동연합> 캠페인의 목표 중 하나는 '소·돼지·닭을 먹고 있으니 개도 먹어야 한다'는 하향적 평등의 프레임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 조세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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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구인들이 조이 교수의 의견에 따른다면, 그들은 지금껏 개·고양이에게 베풀어온 인도주의를 소·돼지·닭에게까지 확장 시켜야 할 것이다. 한편 우리나라에서는 개는 보신에 좋고(보신탕), 고양이는 관절에 좋다(나비탕)는 믿음 때문에 두 동물이 모두 식용으로 거래된다. 그래서 여러 단체들이 개·고양이 식용에 반대하는 캠페인을 벌인다.

이에 대해 '소·돼지·닭도 먹으면서 개·고양이만 먹지 말라는 것은 또 다른 차별'이라는 반론이 존재한다. 분명 틀린 주장이 아니다. 이미 먹고 있는 동물 가운데 특정 동물만 먹지 말자는 주장은 평등의 원리에 어긋나기 때문이다.

관건은 평등의 기준으로 상향평준화와 하향평준화 중 무엇을 삼을 것인가이다. 동물을 인간의 이익을 위한 '수단'으로 간주하는 입장에서는 개·고양이만 식용에서 제외시킬 이유가 없다. 이에 반해 동물을 먹을 때 고통을 주지 않기란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동물의 생명권을 존중하는 입장에서는 식용으로 희생되는 동물의 가짓수를 줄여나가는 것이 온당하다.

따라서 어떤 동물의 식용에 반대하는 캠페인은 육식 전반에 대한 반성과 성찰을 바탕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육식 전반에 대해 문제의식을 갖고 있는 사람에게도 개·고양이 식용 반대만을 외치는 것은 또 다른 차별로 여겨지게 된다.

우리 사회는 상향평준화와 하향평준화 중 어느 방향으로 나아가게 될까? 나는 약자를 해방시켜온 인간의 이성에 기대를 건다. 인류는 약자의 고통에 직면했을 때 이미 존재하는 고통을 근거로 그것을 합리화하기보다는, 고통은 누구의 것이든 옳지 않다는 입장을 취하면서 점진적으로 진보해왔다.

물론 유독 자연과 동물만은 이익을 위한 수단으로 간주하기를 포기하지 않는 입장이 존재한다. 이런 현실을 생각하면 마음이 우울해진다. 그럼에도 나는 희망을 걸겠다. 꽃 위에 앉아있는 섬세한 나비처럼, 작고 미약한 생명에도 경외심을 느낄 줄 아는 인간의 따뜻한 심성에. 그리고 나 자신부터 변화를 위해 노력하겠다.


태그:#멜라니 조이, #육식주의, #개식용반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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