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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 다르지 않은 전시 방식에서 생명에 대한 우리의 시각을 엿볼 수 있다.
▲ 판매용으로 진열된 강아지와 케이크 서로 다르지 않은 전시 방식에서 생명에 대한 우리의 시각을 엿볼 수 있다.
ⓒ 조세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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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은 동물에 관심이 많다. 나 역시 그랬다. 내 어린 시절 기억에는 꽤 많은 동물이 등장한다. 하지만 거의 다 떠올리기 싫은 기억이다. 기억 속에서 나는 항상 가해자, 동물은 피해자였기 때문이다. 

새끼 오리 한 마리에 대한 기억이 있다. 일곱 살 때쯤 엄마를 따라 시장에 갔다가 호기심에 사왔다. 따로 환경을 꾸며주지 않고 방에서 길렀는데도 꽤 잘 자랐다. 대야에 물을 떠놓으면 곧잘 헤엄도 쳤다.

어느 날 나는 오리가 책상 서랍에 들어갈 수 있는지 궁금해졌다. 그런 것이 왜 궁금했는지 이해할 수 없지만, 궁금증을 풀기로 했다. 오리를 서랍에 넣어 보았다. 하지만 오리는 머리를 내밀며 필사적으로 빠져 나왔다. 자신을 비좁고 어두운 공간에 밀어 넣는 무자비한 행동에 대한 자연스러운 반응이었다. 

몇 번의 시도 끝에 나는 짜증이 났고, 오리를 밀어 넣고는 재빨리 서랍을 닫아 버렸다. 그 순간 오리가 머리를 내밀었다. 그리고 축 늘어진 채 다시는 일어나지 못했다.

도대체 왜 그랬을까? 나는 동물에 대한 공감능력이 부족했다. 물론 어렸기 때문이라고 변명할 수도 있겠지만, 내게 오리는 '살아 움직이는 장난감'이었다. 나와 마찬가지로 고통을 느끼는 생명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새끼 오리에서 시작된 나의 동물편력은 그 후 여러 동물로 이어졌다. 오리처럼 어이없이 죽이는 짓은 하지 않았지만, 동물에 대한 나의 개념은 거의 변하지 않았다. 병아리에 대한 기초 상식조차 없이 학교 앞에서 병아리를 팔면 꼭 한 마리씩 사가지고 왔다.

병아리가 시름시름 앓다가 죽어버리면 "왜 병든 것만 파는 건지 모르겠다"며 병아리 장수를 원망했다. 이런 식으로 각종 동물을 무책임하게 길렀다. 다 클 때까지 살아남아도 싫증이 나면 다른 집에 보냈다. 미안한 마음은 없었다. '동물이니까' 괜찮다고 믿었다.  

"알면 사랑한다!"

누군가에겐 치느님(치킨), 누군가에겐 고통스러운 삶과 죽음
 누군가에겐 치느님(치킨), 누군가에겐 고통스러운 삶과 죽음
ⓒ (상) 조세형, (하) JTBC 뉴스화면 캡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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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 AI발생 이후 지금까지 살처분된 가금류는 2500만 마리에 달하지만, 감염이 확인된 가금류는 고작 121마리에 불과하다고 한다. 인간으로서 부끄러워 고개를 들 수가 없다. '생명존중' '정의' '평화'의 외침이 무색해지는 현실이다. 이런 말들은 그저 교훈으로 액자에 걸어두고 감상하기 위한 실체 없는 개념에 지나지 않는 걸까?

우리 사회에서 동물의 고통은 그것에 대한 문제를 제기하는 것조차 '감성 팔이'라는 비아냥거림에 부딪히곤 한다. 불필요한 고통이라도 없애자는 주장은 세상의 고통을 전부 없앨 수 없을 바에야 무슨 소용이냐며 '비논리적'이라는 반박에 부딪힌다. 가능한 고통이라도 줄여주자는 주장은 큰 희생을 강요하는 '극단주의'로 오해받는다.

그런데 우리가 불우이웃을 이성과 논리를 따지며 도와왔던가? 도움의 손길은 냉철한 이성보다는 따뜻한 감성에서 비롯된다. 마음을 쓰면 행동도 따르게 마련이다. 그러나 유독 동물의 고통 앞에서 인간의 이성과 감성은 전부 마비돼 버린다.

이것은 바로 과거의 내 모습이다. 과거의 나는 지구의 그 어떤 동물도 인간처럼 다른 동물을 학살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눈감고, 그저 자연의 약육강식이라며 2500만의 죽음을 어쩔 수 없는 일로 간주했을 것이다. 그저 먹으라고 주어진 동물이니까 불량품은 폐기해도 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알면 밥맛 떨어진다며 순간의 기분과 입맛에 충실했을 것이다. 나한테 싫은 것은 남한테도 하지 말라는 경구는 오로지 인간을 위한 가르침이라고 믿었을 것이다. 

사랑에는 주변으로 넘치는 속성이 있다. 아이에 관심이 없어도 내 아이가 생기면 달라지는 사람이 많다. 어려운 처지의 아이들을 보면 안타까워하며 조금이라도 돕고 싶어 한다. 동물에 대한 사랑도 다르지 않다. 반려고양이에 대한 사랑은 나를 변화시켰다. 고양이를 가족으로 인식하면서 내가 과거에 저지른 행동이 얼마나 큰 폭력인지 알게 되었다. 삼겹살을 입에 우겨넣으며 죽어도 채식주의자는 못될 거라고 스스로 장담했던 나를 변화시킨 것도 사랑이었다.

생물학자인 최재천 교수는 인간에게 '알면 사랑하는' 속성이 있다고 주장한다. 그는 <통섭의 식탁>(명진출판)에 다음과 같이 썼다.

나는 우리 인간에게 생명을 아름답다고 여기고 보호하려는 심성이 존재한다고 믿는다. 예전에 먹고 살기 어렵던 시절에 우리는 언뜻 참새만 봐도 돌멩이부터 주워들었다. 하지만 그런 행동은 새들에 대해 알게 되면 차츰 사라진다. 우연히 날개를 다친 채 우리 집안으로 들어온 참새를 얼씨구나 하며 구워먹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런 참새의 작고 여린 몸을 한 번이라도 손에 쥐어본 사람은 더 이상 참새를 향해 돌을 던지지 않는다.

알면 사랑하게 된다. 사랑은 진정 원하는 것을 몰랐기에 무엇을 성취하든 공허했던 내게 목표를 알려주었다. 아무리 채워도 만족을 모르는 욕망에서 나를 해방시켰고, 꿈과 희망을 갖게 해주었다. 나는 우울에서 벗어나 행복을 알게 되었다. 

사랑은 실천으로 이어진다. 동물을 사랑하면서 자연히 그들을 위해 행동하게 되었다. 동물을 위한 실천은 큰 희생을 요구하지 않는다. 욕심을 조금만 비워도 많은 고통을 막을 수 있다. 소비를 줄이기만 해도 소비재로 전락한 동물의 고통을 상당히 줄일 수 있다. 이에 대한 보답으로 주어지는 자유와 만족은 그 어떤 소비로도 누릴 수 없는 소중한 것이다.

나는 인간의 선(善)에 대한 의지를 믿는다. 인간은 누구나 다른 이의 고통에 얼굴을 찌푸리는 속성을 지녔다. 우리가 천문학적인 고통과 학살에 무감각해진 이유는 그것을 은폐하고 괜찮다고 세뇌시키는 이데올로기 때문이다.

어린 시절 나는 동물의 고통에 공감하지 못했다. 그러나 알고 나서부터는 사랑하게 되었다. 닫혀진 마음을 열면 된다. 잔인한 존재가 되기로 자처하지 않아도 얼마든지 행복하게 살 수 있다. 앞으로 이어지는 나의 기사가 생명에 대한 감수성의 회복에 작게나마 보탬이 되었으면 한다.


태그:#알면 사랑한다, #오리, #AI, # 대학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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