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힐링은 격리와 유폐가 아니다. 참된 힐링은 상처 있는 것들끼리의 위로와 공존이다. 1004개의 섬으로 이뤄진 전남 신안군. 그곳엔 수려한 자연풍광과 노동하는 사람의 땀과 눈물이 잔파도처럼 함께 넘실대는 많은 섬길이 있다. <오마이뉴스>는 '천사의 섬, 신안군'에 보석처럼 나 있는 '힐링 섬길'을 독자 여러분께 소개해드리고자 한다. 오늘은 그 세 번째로 도초도 힐링 섬길이다. [편집자말]
도초도 고란리 담장은 황토와 돌로 만든 토담이다. 바로 옆 섬인 비금도 내촌은 돌담이다.
 도초도 고란리 담장은 황토와 돌로 만든 토담이다. 바로 옆 섬인 비금도 내촌은 돌담이다.
ⓒ 이주빈

관련사진보기


비금도에서 다리 하나 건너면 도초도, 두 섬을 잇는 연도교(連島橋)의 이름은 서남문대교다. 왕복 2차선에 총 길이는 937m에 불과한 이 연도교가 완공된 1996년. 신문들은 "한국 연도교 중 가장 긴 다리가 개통됐다"고 소식을 전했다.

서남문대교가 개통되기 전엔 두 섬 사람들은 배를 타고 왕래했다. 비금·도초 주민만 3만 명을 웃돌던 시절, 도초도 물양장(物揚場)엔 두 섬의 물산과 사람과 사연이 북적거렸다. 물양장은 수심 4.5m 이하의 소형부두다. 주로 1천톤 미만의 어선과 부선(바지선) 등이 접안한다.  

고기 잡으러 나갔다 돌아오는 아버지를 처음으로 맞이하는 곳이 물양장이었다. 아버지의 작업복에선 짠내와 생선 비린내가 물씬거렸지만 섬 소년이 한달음에 파묻히기엔 넉넉했다. 각종 해산물의 첫 흥정이 벌어지는 곳도 물양장이었다. 육지의 실거래가보다는 정으로 금(가격)이 매겨졌다. 물론 흥정은 술판으로 이어지기 일쑤였다.

여느 섬이나 마찬가지로 다리 하나 건넜을 뿐인데 풍속이 달라진다. 이를 가장 쉽게 확인할 수 있는 것이 담장이다. 비금도 내촌의 담장은 돌담이다. 순전히 돌로만 담장을 쌓은 것이다. 하지만 이곳 도초도 고란리엔 돌담 대신 토담이 있다. 돌과 황토를 버무려 담장을 쌓은 것이다.

돌담과 토담을 가른 것은 '바람'이었다

고란리 토담에 핀 장미꽃.
 고란리 토담에 핀 장미꽃.
ⓒ 이주빈

관련사진보기


돌담과 토담을 가른 것은 역시 '바람'이었다. 해안에서 바로 넘어오는 바람이 거칠었던 비금도 내촌에선 돌담을 쌓아 바람구멍을 냈다. 거친 바람에 담장이 넘어지는 것을 막기 위해서다. 하지만 해풍이 바로 들이닥치지 않는 도초도 고란리에선 담장에 바람구멍을 따로 낼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더불어 고란리는 고란평야를 끼고 있는 마을이다. 어촌의 풍속보다는 농촌의 풍속이 짙다는 얘기다. 고란평야는 고란리에서 수다리까지 직경으로만 약 6km 이어진 신안군에서 가장 넓은 평야다.

'도초도'라 불리게 된 연유에 대한 여러 가지 설이 있다. 주변 섬 가운데 가장 큰 섬이라 '도치도'로 불리다가 도초도가 되었다는 설도 있고, 섬 모양이 고슴도치를 닮았다 해서 도초도라는 설도 있는데 이는 너무 억지스럽다.

가장 유력한 설은 신라시대 때 들어온 당나라 상인들이 자신들의 수도와 지형이 닮고 초목이 무성하다며 '도초(都草)'라고 불렀다는 것이다. 도초도가 흑산도와 중국을 잇는 해상무역의 중간통로 역할을 했던 점을 감안하면 나름 설득력 있는 설이다.

도초도 고란평야는 신안군에서 가장 넓은 평야다.
 도초도 고란평야는 신안군에서 가장 넓은 평야다.
ⓒ 이주빈

관련사진보기


고란평야를 끼고 있는 고란리 입구에 서있는 석장승. 모양이 제주 돌하르방을 닮았다.
 고란평야를 끼고 있는 고란리 입구에 서있는 석장승. 모양이 제주 돌하르방을 닮았다.
ⓒ 이주빈

관련사진보기


그렇게 초목 무성한 섬의 한가운데 고란평야가 자리잡고 있다. 이 땅 모든 평야가 수탈과 항쟁의 역사를 품고 있다. 고란평야도 예외가 아니다. 1925년 10월 7일 '도초 소작인회'를 결성한 농민들은 친일 지주들의 수탈에 맞서 34일간 치열한 투쟁을 벌였다. 하의3도(하의·신의·장산), 암태도 소작인들과 함께 벌인 빛나는 항일 소작투쟁이었다.

주민들은 도초도를  '인재의 섬'이라 부른다. 이 은근한 자부심의 바탕엔 출세한 명망가를 많이 배출했다는 우월의식이 자리 잡고 있는 것이 아니다. "도초도는 일제하고 싸운 섬"이라는 한 주민의 말 속에서 은근한 자부심의 바탕을 엿볼 수 있다. 역사 속에서 훼절하지 않고 비굴하지 않았던 당당함이야말로 도초도 주민들이 지닌 자부심의 가장 큰 밑천인 것이다.

고란리 초입엔 석장승 하나가 서 있다. 원래 나무로 만든 장승이었는데 1938년에 석장승으로 바꾸었다고 한다. 키가 290cm인 이 석장승은 생김새가 제주 돌하르방과 매우 닮았다. 도초도로 이주해 살고 있던 제주도 사람들이 석장승을 만들었다는 말이 전해지고 있는 까닭도 이 때문이다.

머리엔 갓을 쓰고 도포는 하나 걸쳤는데 단정한 모양새는 아니다. 마을 입구에 세웠으니 수상한 외지인들에게 겁이라도 줘야할 판인데 눈은 그런대로 부라리고 있으나 웃니아랫니를 다 드러내놓고 웃는 통에 절로 웃음만 터진다.

섬마을 사람들에게 석장승은 타자를 향한 위협의 상징물이 아니었다. 석장승은 기댈 곳 없는 섬마을 민초들이 의지하는 마을 수호신 가운데 하나였고, 변함없이 친근한 이웃이었으며, 언제고 돌아갈 거처의 표식이었다.

굳이 빠르게 걸을 이유가 없는 길

시목해수욕장은 콘크리티 담장을 친 다른 해수욕장과는 달리 담을 치지 않아 사구(모래언덕)가 잘 보존돼 있다. 사구서 끊임없이 모래가 유입돼 백사장이 자갈 하나 없이 부드럽기만 하다.
 시목해수욕장은 콘크리티 담장을 친 다른 해수욕장과는 달리 담을 치지 않아 사구(모래언덕)가 잘 보존돼 있다. 사구서 끊임없이 모래가 유입돼 백사장이 자갈 하나 없이 부드럽기만 하다.
ⓒ 이주빈

관련사진보기


시목해수욕장 백사장 뒤로 난 수림대 숲길. 왕복 2.5km의 소나무숲길이다.
 시목해수욕장 백사장 뒤로 난 수림대 숲길. 왕복 2.5km의 소나무숲길이다.
ⓒ 이주빈

관련사진보기


고란평야를 뒤로 한 채 시목해수욕장으로 향한다. 백사장 주변에 감나무가 많아서 시목(柿木)이란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2.5km에 달하는 반달 모양 백사장 뒤를 따라 '수림대 숲길'이 있다. 소나무 숲길인 수림대 숲길은 왕복 약 2.5Km. 숲길엔 언제든 바다로 나갈 수 있게 군데군데 길이 나있다. 숲길과 백사장과 바다가 어우러진 보기 드문 곳이다.

해풍에 숙성된 솔향이 그윽하다. 굳이 빠르게 걸을 이유가 없는 길, 거리와 시간을 셈하여 만든 속도라는 그물이 스스로 녹아내린다. 제주도 올레길에서 그리고 지리산 둘레길에서 마주쳤던 이들이 떠오른다.

그들은 연신 시계를 훔쳐보며 거리와 시간을 재고 있었다. 마치 다음 고지를 점령하기 위해 탱크처럼 진군해가는 병정들 같았다. 숱한 길 걷기로 탄탄해질 만큼 탄탄해진 그들의 하체에 몇 가닥의 근육이 또 늘었을 터.

하지만 그치지 않는 속도전에 찾고자 했던 마음 속 '쉼'의 둥지는 또 다시 '다음 목표'가 되고 말았을 것이다. 제주 올레를 만든 서명숙 이사장은 늘 이야기한다. "놀멍(놀면서) 쉬멍(쉬면서) 걸으라"고. 걷기가 전투는 아니지 않는가.

"열일곱에 시집 와 인자 여든둘이 되아분 밀양 박가"라는 할머니는 숲길 쉼터에 앉아있었다. "어서 왔소? 난 새끼가 여섯인디 다 서울에 있소"하더니 "영감보고 가지 말고 그란대로 살자했드만 그냥 혼자 후딱 가븐 것이 몇십년 됐소"하며 담배를 피웠다.

할머니가 내뿜은 담배연기가 시목해수욕장 사구(砂丘)를 넘어섰다. 스르렁 밀려온 잔파도가 사구에서 흘러내린 모래를 바다로 데려갔다. 세월은 할머니의 주름진 담배연기를 바다로 데려갈 것이다. 그리고 그 바다 어디메 쯤에서 열입곱 할머니는 열아홉의 할아버지를 다시 만나게 될 것이다.     

"여든 둘의 밀양 박가" 할머니가 담배를 한 대 핀 뒤 굴을 따러 바다로 가고 있다.
 "여든 둘의 밀양 박가" 할머니가 담배를 한 대 핀 뒤 굴을 따러 바다로 가고 있다.
ⓒ 이주빈

관련사진보기




태그:#신안군 힐링섬길, #올레길, #해수욕장, #돌하르방, #도초도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