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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링은 격리와 유폐가 아니다. 참된 힐링은 상처 있는 것들끼리의 위로와 공존이다. 1004개의 섬으로 이뤄진 전남 신안군에는 수려한 자연풍광과 노동하는 사람의 땀과 눈물이 잔파도처럼 함께 넘실대는 많은 섬길이 있다. <오마이뉴스>는 '천사의 섬, 신안군'에 보석처럼 나 있는 '힐링 섬길'을 독자 여러분께 소개해드리고자 한다. 오늘은 그 일곱 번째로 자은도 힐링 섬길이다. [편집자말]
자은도 둔장해수욕장의 노을. 모래밭, 펄밭, 바다가 구분이 안될 정도로 황홀하다.
 자은도 둔장해수욕장의 노을. 모래밭, 펄밭, 바다가 구분이 안될 정도로 황홀하다.
ⓒ 이주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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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은도 둔장해수욕장에 시나브로 노을이 내린다. 모래와 펄이 섞여있는 3.5km 백사장은 부드러우면서 단단해 발이 빠지지 않는다. 적막해져가는 바닷가에 푸릇한 탄성이 연이어 터진다. 가족과 함께 온 어린 아이들이 백사장에서 백합을 캐며 지르는 환호다.

면적이 100ha가 넘는 둔장해수욕장은 말 그대로 백합밭이다. 백합 종패를 뿌리면 해마다 2㎝씩 클 만큼 바다 토양이 좋다고 마을주민들은 자랑한다. 마을에서는 '둔장 어촌 체험 프로그램'을 만들어 방문객들이 백합 캐기 등을 즐길 수 있게 하고 있다.

백합은 익히 알려진 대로 조개 중의 으뜸으로 치는 고급 패류다. 그래서 상합(上蛤)으로 불린다. 조개 크기가 크다고 대합(大蛤)이라 부르기도 하고, 오래 사는 조개라며 생합(生蛤)이라고도 한다.

아무튼 백합은 조개 속껍데기와 살이 하얘서 백합(白蛤)이라 부른다지만 다른 설도 있다. 조개 겉껍데기 모양이 백이면 백 같은 것이 하나도 없이 다 다르다 해서 백합(百蛤)이라는 것이다.

어떤 이름으로 부르든 간에 참으로 멋진 이름 짓기다. 존재하는 실체를 사실적으로 묘사한 이름 짓기에선 꾸밈없는 민중의 진솔한 삶이 묻어난다. 한 무더기로 넘기지 않고 조개 하나하나의 모양에 의미를 부여한 자세에선 존재하는 것 모두가 하나같지 않음을 인정하는 무등(無等)의 세계관이 엿보인다.

자애롭고 은혜로운 섬, 자은도

둔장해수욕장을 비롯한 자은도 해넘이길 12km는 2012년 국토해양부가 선정한 '대한민국 대표 해안누리길 5선' 중 하나. 둔장 해변을 중심으로 이어진 솔 숲길과 해안의 풍광이 잘 어우러진 길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특히 둔장해수욕장의 노을 풍광은 매혹적이다.

홍조 그윽한 해가 할미섬과 두리섬 사이로 자리를 잡기 시작한다. 노을 드는 풍광도 섬 이름을 그대로 닮았다. 자애롭고 은혜로운 섬, 자은도(慈恩島). 

자은도 둔장해수욕장에서 어촌 체험을 하며 백합을 캐러 가는 가족들.
 자은도 둔장해수욕장에서 어촌 체험을 하며 백합을 캐러 가는 가족들.
ⓒ 이주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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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은도 둔장마을 주민이 물때에 맞춰 상강망을 걷고 있다.
 자은도 둔장마을 주민이 물때에 맞춰 상강망을 걷고 있다.
ⓒ 이주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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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때 명나라 장군 이여송(李如松)을 따라 참전했던 두서춘(斗四春)이란 인물이 반역으로 몰려 자은도로 피신하게 되었다고. 와서 보니 지형·지세가 모난 곳이 없고, 사람들 성품이 온후하고 인심이 좋더란다. 목숨을 보전한 두서춘이 훗날 이 섬에서 기억을 회상하며 섬의 이름을 '자은도'라고 했다는 설이 전해진다. 

물론 이 이야기는 그냥 설에 불과하다. 두서춘이 섬 이름을 지었다는 임진왜란 직후보다 훨씬 앞선 시기에 '자은도'라는 지명이 여러 지리지에 등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고려사지리지>에 '자은도'가 수록된 것은 물론이고,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는 "둘레는 40리고, 호적에 편성된 민호는 420호"라고 자은도를 설명하고 있다.

섬의 역사나 문화 등과 관련한 이런저런 '스토리텔링'들이 온라인 공간과 책자에 제법 돌아다니고 있다. 그동안 외면당하고 방치 당했던 섬 이야기들이 세상 속으로 나온다는 것은 좋은 일이다. 인문의 지평이 그만큼 넓어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몇몇 스토리텔링은 최소한의 역사적 사실마저 부정해 버려 공상소설처럼 허무맹랑하다. 섬과 관련한 스토리텔링에서 상상력은 억제하면 억제할수록 좋다. 모든 사실이 기록될 수 없고, 또 모든 사실이 진실일 수는 없다. 하지만 기록된 사실이야말로 진실로 가는 첫걸음이란 것엔 이론의 여지가 없다. 그리고 가장 사실적인 것이 가장 감동적이지 않던가.

꽃게의 장례식을 치르다

자은도 둔장해수욕장은 할미섬과 두리섬 사이로 지는 노을 풍광이 아름답기로 유명하다.
 자은도 둔장해수욕장은 할미섬과 두리섬 사이로 지는 노을 풍광이 아름답기로 유명하다.
ⓒ 이주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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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을은 더욱 짙어졌다. 마을 주민들이 물때에 맞춰 상강망을 걷으러 왔다. 민어와 모치, 망둥어 등이 그물에 걸렸다. 언젠가 서해 어느 마을에선 주민들이 수백미터 길이의 상강망을 수십 개나 마구 설치해 남획과 이들이 버린 폐그물로 해양오염이 심해지고 있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적 있다.

그러나 자은도 둔장마을 주민들은 3.5km, 100헥타르가 넘는 곳에 약 10m길이의 상강망을 단 하나 놓았을 뿐이다. 까닭을 물었다. 얼마 전 다문화가정을 이뤘다는 한 주민은 "나 혼자 묵고 사는 게 아닝께라"한다. 필요한 만큼 바다에서 얻어가고, 이웃이 얻어갈 몫은 반드시 남긴다. 그러고 보니 이 마을, 어촌체험관 시설도 돌아가면서 자주관리를 하고 있다.

사람이 아름다운 것은 함께 어울려 살아갈 줄 알기 때문. 그 앎을 어떤 이는 실천하고 살고, 그 앎을 어떤 이는 세치 혀로 떠들고 산다. 아등바등 살아가지만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아는 까닭에 늘 여전치 못함을 부끄러워한다. 

새신랑은 그물에서 생선을 거둬 돌아갔다. 노을 지는 바다에 다시 놓아진 그물은 물때를 기다린다. 아이들은 제가 캔 백합의 크기를 재며 즐거운 수선이다. 그리고 저어기, 어느 낯선 주검이 누워 있다.

숨이 다한 꽃게는 더 이상 철갑 등 아래로 배를 감추지 않았다. 모래바닥에 숨어 지내며 먹이를 기다리던 너는 모래펄의 은자(隱者).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았을 3년의 수명. 인간의 시간으로 어찌 너의 시간을 잴 수 있을까. 너는 너의 시간을 살다갔을 뿐이고, 나는 나의 시간 속에서 너를 보낼 뿐.

노을이 꽃게의 주검을 따뜻하게 덮고 태양의 끈으로 질끈 묶고 장례를 치른다.
 노을이 꽃게의 주검을 따뜻하게 덮고 태양의 끈으로 질끈 묶고 장례를 치른다.
ⓒ 이주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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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을이 꽃게의 주검을 따뜻하게 덮고 태양의 끈으로 질끈 묶었다. 세상 가장 장엄한 노을의 대렴(大斂)을 받은 꽃게는 입관(入棺)을 준비한다. 평생 은거했던 서해가 그의 관이자 장지가 될 것이다. 꽃게의 혼백이 놀라지 않게 바다는 숨결조차 죽인다. 잔잔한 물결은 상여꽃이 되고 만장이 되어 느리게 흔들린다.

모두 마지막 인사를 고한다. 찰라를 스쳤음으로 더욱 아름다웠던 생. 잘 가시라, 안녕히 계시라.

"...죽음은 연둣빛 흐른 물결로 네 몸 속에서 출렁거리고 있다
썩지 않는다면 슬픔의 방부제 다하지 않는다면
소금 위에 반짝이는 저 노을 보아라

죽음은 때로 섬을 집어삼키려 파도치며 밀려온다
석 자 세 치 물고기들 섬 가까이
배회할 것이다 물밑을
아는 사람은 우리 중 아무도 없다
물 속으로 가라앉는 사자의 어록을 들추려고
더 이상 애쓰지 말자 다만 해안선 가득 부서지는
황홀한 파도의 띠를 두르고

서천 저편으로 옮겨진다는 질펀한
석양으로 깎여서 천천히 비워지는"

- 김명인 <바닷가의 장례> 중에서

자은도 둔장해수욕장 노을.
 자은도 둔장해수욕장 노을.
ⓒ 이주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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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신안군 힐링섬길, #자은도, #스토리텔링, #꽃게, #해수욕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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