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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링은 격리와 유폐가 아니다. 참된 힐링은 상처 있는 것들끼리의 위로와 공존이다. 그런 점에서 전남 신안군 섬길은 참된 힐링의 길이라 할 수 있다. 신안군 섬길엔 수려한 자연풍광과 노동하는 사람의 땀과 눈물이 잔파도처럼 함께 넘실댄다. 1004개의 섬으로 이뤄진 전남 신안군. <오마이뉴스>는 '천사의 섬, 신안군'에 보석처럼 나 있는 '힐링 섬길'을 독자 여러분께 소개해드리고자 한다. 오늘은 그 첫 번째로 임자도 힐링 섬길이다. [편집자말]
올해로 여섯번째로 열리는 '신안 튤립 축제'. 대파 파동으로 대체한 튤립이 지금은 임자도의 가장 큰 관광자원이 되었다. 올해 튤립 축제는 오는 28일까지 임자도 대광해수욕장 주변에서 열린다.
 올해로 여섯번째로 열리는 '신안 튤립 축제'. 대파 파동으로 대체한 튤립이 지금은 임자도의 가장 큰 관광자원이 되었다. 올해 튤립 축제는 오는 28일까지 임자도 대광해수욕장 주변에서 열린다.
ⓒ 이주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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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중순 임자도는 '신안 튤립축제' 준비가 한창이었다. 자연산 들깨가 많이 생산되어 임자도(荏子島)라 했다던가. 하지만 현재 임자도를 대표하는 것은 들깨가 아닌 튤립. 땅과 맺어가는 모든 관계는 이렇게 변해간다.

속 모르는 육지 사람들은 신안군이 네덜란드도 아닌데 튤립과 무슨 상관이냐고 의아해 할 것이다. 지금은 튤립이 한껏 멋을 뽐내는 땅에 예전엔 대파가 몽실몽실 자랐다. 하지만 대파 가격은 천당과 지옥을 오가며 해마다 섬사람들을 울렸다. 대파에 기대살기엔 가격 변동이 너무 심했다. 대책이 시급했다.

한 전문가는 임자도의 기후와 토양이 네덜란드와 비슷하다며 튤립 재배를 권했다. 대파보다 판매가격도 세고 안정적이며 관광객은 덤으로 불러들일 수 있다고 했다. 주민들은 반신반의했다. 그리고 시험재배를 해보았다. 전문가의 조언은 틀리지 않았다.

그렇게 시작한 튤립 축제가 올해 6회째를 맞았다. "오는 28일까지 임자도 대광해수욕장 주변은 튤립 천지"라며 주민들은 손님맞이에 분주했다. 80여 품종의 300만 송이의 튤립이 너른 백사장을 끼고 만개한 풍경은 동화 같았다.

바쁜 목소리들을 뒤로한 채 이흑암리로 발걸음을 옮겼다. 마을 이름이 예사롭지 않다. 검은 바위 두 개가 있어 이흑암리란 설과 일찌감치 어두워져서 이흑암리란 설이 서로 살가운 다툼을 하고 있다. 땅의 마음(地心)도 변하는데 하물며 지명(地名)이야 어떻게 해석한들 무슨 상관 있겠는가.

용난굴이 있는 어머리해수욕장 전경.
 용난굴이 있는 어머리해수욕장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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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광해수욕장은 일찍이 국민관광지로 지정돼 많은 관광객들의 사랑을 받아왔다. 이에 반해 '용난굴'이 있는 이흑암리 어머리해수욕장(일명 용난굴해수욕장)은 이웃한 은동해수욕장과 함께 임자도 주민들이나 가족 단위 피서객들이 조용히 찾는 곳이다.

임자도 힐링 섬길은 '용난굴'에서 시작해 1.5Km가 넘는 어머리해수욕장 백사장을 걸어 '조희룡 길'을 타고 해변을 따라 은동해수욕장으로 이어진다. 약 3km가 넘는 길, 해무(海霧)에 쌓인 바다 위로 간간히 봄볕이 들거나 해풍이 불어 길동무를 해준다.

용난굴은 말 그대로 천년 묵은 이무기가 용이 되어 승천했다는 굴이다. 자신이 갇힌 바위 위에 쓰린 인간의 눈물이 떨구어져야 승천할 수 있는 슬픈 운명의 이무기. 그러던 어느 날 난파선의 선장이 죽어버린 선원들과 그리운 가족들을 외치며 그 바위에 올라 절규하며 눈물을 떨구자 마침내 이무기는 용이 되어 하늘로 올라갔다고 한다.

용은 승천할 때 한 손엔 죽은 선원들의 주검을 또 다른 손엔 선원들의 영혼을 쥐고 올라갔다. 거친 바다에 가족과 동무들을 잃은 섬사람들은 장례 치를 주검조차 찾기 쉽지 않았다. 주검과 원혼을 모두 거두어 하늘로 간 용은 어쩌면 하늘에 장례를 위탁하고자 했던 섬마을 민초들의 간절한 기도의 형상이었을 것이다.

우리는 언제고 한번 누구에게 아낌없는 밥이 되어준 적 있었던가

어부가 돈이 될만한 생선을 걷어간 뒤 남은 물고기를 사람과 갈매기와 게들이 나누고 있다.
 어부가 돈이 될만한 생선을 걷어간 뒤 남은 물고기를 사람과 갈매기와 게들이 나누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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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서는 어부에게 돈이 되고 죽어서는 사람과 갈매기와 게들의 밥이 된다.
 살아서는 어부에게 돈이 되고 죽어서는 사람과 갈매기와 게들의 밥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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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로의 어부가 용난굴 옆에서 그물을 걷고 있었다. 그는 어머리해수욕장 두 곳에 그물을 세워놓았다. 물 때 따라 흘러왔던 생선들이 그물에 걸려들었다. 어부는 팔아서 돈이 될 만한 굵직한 산 숭어 등만을 바구니에 담았다. 그가 그물에 남겨둔 물고기들의 임자는 따로 있었다.

마을 주민 두 명이 오더니 그물에 매달려 있는 물고기들을 주섬주섬 챙겼다. 바로 그때 갈매기들이 그물 주위로 달려들었다. 백사장 바닥에선 게들이 민첩하게 집게발을 놀렸다. 사람과 갈매기와 게들이 그물에 걸려 죽은 물고기를 나누고 있었다.

살아있는 것들이 물고기를 나누는 사이 비어가는 그물에 바람이 스쳤다. 휘이잉 휘이잉... 섬마을 상여소리 같았고, 씻김굿 구음시나위처럼 들렸다. 물고기는 살아 어부에게 돈을 만들어주고, 죽어서는 사람과 갈매기와 게에게 살까지 온전히 내어주고 밥이 되었다. 숭고한 밥, 우리는 언제고 한번 누구에게 아낌없는 밥이 되어준 적 있었던가.

임자도 이흑암리와 은동마을, 어머리해수욕장 가는 길을 알리는 이정표.
 임자도 이흑암리와 은동마을, 어머리해수욕장 가는 길을 알리는 이정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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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흑암리 들 옆에 새참상이 준비되어졌다.
 이흑암리 들 옆에 새참상이 준비되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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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리해수욕장을 걸어나와 '조희룡길'로 접어들었다. 논 사잇길을 지나니 길은 약간 가파라지더니 이내 숨을 골랐다. 저 아래 용난굴과 어머리해수욕장의 긴 백사장 그림이 좋다. 이 해안능선을 타고 돌면 은동마을과 은동해수욕장이 나올 것이다.

조희룡은 추사 김정희와 쌍벽을 이룬 조선 후기 문인화의 대가다. 풍양 조씨 세력은 안동 김씨 세력과 더불어 세도정치의 극점을 이뤘다. 그가 이른바 '예송논쟁'에 휘말려 임자도 이흑암리에 유배를 온 해가 1851년. 그리고 꼬박 3년을 임자도에서 유배살이를 했다.

모든 육지 사람들이 그렇듯 그도 섬마을로 유배를 오자 처음엔 낯섦에 공포까지 느꼈다. 임자도 유배 초기 그가 남긴 그림엔 그의 이런 속내가 잘 드러나 있다. 하지만 섬도 사람이 사는 곳. 그는 유배살이 하던 집을 '만마리 갈매기가 우는 집(萬鷗吟館)'이라 칭하며 후학도 가르치고 작품활동에 매진한다. 추사가 제주도 대정 유배지에서 한 경지 깊어졌듯 조희룡 역시 임자도에서 한층 원숙해져 육지로 돌아갔다.

해송(海松) 사이로 난 흙길을 타박타박 걸어 은동마을에 도착했다. 한때 열네 가구가 살던 부촌(富村)이었던 은동마을에 지금은 네 가구 여덟 명이 살고 있다. 지금은 대둔산이라 불리는 한동산 병풍 바위 아래 볕 잘 드는 마을이 은동마을이다.

'배려'란 티 내지 않는 마음이 담긴 곳

은동마을 초입에 누군가 세워 놓은 바닷가 가는 길 이정표. 고작 네 가구 여덟명 사는 외딴 마을에 누가 찾아든다고 이렇게 세심한 배려를 했을까.
 은동마을 초입에 누군가 세워 놓은 바닷가 가는 길 이정표. 고작 네 가구 여덟명 사는 외딴 마을에 누가 찾아든다고 이렇게 세심한 배려를 했을까.
ⓒ 이주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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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민 누군가 널빤지에 붉은 페인트로 '바닷가 가는 길'이라고 안내표식을 해두었다. 외진 섬마을에 몇이나 찾아들거라고 저 정성을 들였을까. 그러고 보면 '배려'란 티 내지 않는 응대의 다른 말 같다.

정씨(70) 할머니는 은동해수욕장 갓길에서 고사리를 따고 있었다. 은동마을에서 태어나 초등학교까지 다닌 할머니는 10년 전 남편과 함께 돌아왔다고 했다.

"나 사진 안 찍었제? 신문에 사진 나가믄 안 되야. 내가 나름 전국구여. 서울이고 광주고 전부 알아봐부러, 호호. 귀신 나올 것 같은 여그에 왜 돌아왔냐고? 고향잉께. 그라고 여그 있으믄 묵고 살 걱정 안할 것 같응께. 시방 고사리 캐고 있는데 묵잘 것 없으믄 바다 나가 고기 잡고 굴 따고 그라고 살믄 된께."

40년 넘게 육지 생활을 했다는 정씨 할머니가 은동해수욕장 앞 옥섬을 그윽하게 바라보았다. 동백나무가 많아 동백섬이라고 했다는 옥섬에서 할머니는 동무들과 도시락도 까먹고 오자미놀이도 많이 했다고.

할머니는 혼잣말처럼 "다 한 시절"이라고 바다에 대고 중얼거렸다. 시절, 그리고 또 한 시절... 할머니의 시절은 어디로 갔을까. 그리고 지금 여기 서해로 흘러드는 시절은 또 무엇인가. 까치발 높이도 안 되는 잔물결이 사르르 백사장에 누워 잠이 들었다. 

은동해수욕장 앞에 있는 섬 이름은 옥섬. 동백나무가 많다 해서 동백섬이라고도 한다.
 은동해수욕장 앞에 있는 섬 이름은 옥섬. 동백나무가 많다 해서 동백섬이라고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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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신안군 힐링섬길, #임자도, #튤립 축제, #해수욕장, #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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