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그우먼 김미화

개그우먼 김미화 ⓒ 이영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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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로 데뷔 30년을 맞이한 개그우먼 김미화는 개그가 무엇인지 묻자 주저 없이 "내 인생이고 모든 것"이라고 답했다. 그는 "코미디언이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다가갈 수 있었던 반면, 또 코미디언이라 (대중들이) 자신만의 잣대로 가위질을 하면서 본 부분도 있을 것이다"라며 "알아주던 못 알아주던 코미디언 김미화의 길은 김미화가 가는 거다"라고 30년 맞은 소감을 담백하게 말했다.

지난 3월 라디오에서 하차한 김미화는 "용인에서 감자, 고구마, 고추. 옥수수와 벼농사를 지으며 바쁘게 살고 있다"고 요즘 근황을 밝혔다. "'순악질 프로젝트'라는 이름으로 컨테이너 4개를 붙여서 카페를 만들고 있다"는 그는 "80% 진행되었는데 그 카페 앞마당에서 농부들과 건강한 먹을거리를 추구하는 사람들과 함께 건강한 농산물 직거래도 할 예정"이라고 전했다.

김미화는 올해 3월 논문 표절로 논란에 휩싸였다. 이에 대해 그는 "친노좌파 운운하며 문제를 제기했다"면서 "지금은 학교에서 심사를 하는 중이라 결과를 기다리는 중"이라면서 조심스러운 입장을 보였다.

이어 라디오 하차에 대해서는 "나는 처음 시사 프로그램을 시작할 때 10년을 계획 했었고 올 4월이 10년째 되는 해였다"라며 "한 달 정도 일찍 했지만 원래 계획대로 했을 뿐 논문표절 논란으로 하차한 것 아니다"라고 밝혔다. 데뷔 30년 되는 해에 논문 표절 문제가 불거진 것에 관해 김미화는 "안 좋은 일은 늘 좋은 일과 함께 터지고 또 쉴 수 있는 시간이 되어 꼭 안 좋은 일이라고 단정할 수 없다"면서 긍정적으로 바라보았다.

한 분야에서 30년을 넘게 일을 한다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니다. 더구나 대중의 인기로 먹고 사는 연예인은 더욱 그럴 것이다. 김미화는 지난 30년을 두고 "살고 싶은 대로 사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만, 나는 생각했던 대로 살아온 것 같아 감사하다"고 되돌아보았다.

"앞으로도 웃기다가 죽는 것이 소망"이라는 김미화는 30년 동안 사랑해준 팬들에게 "언론의 소식은 왜곡되고 굴절된 부분이 많다. 그렇게 단면만 보지 마시고 더 관심 가져 주셔서 앞으로 더 많은 사랑 부탁드린다"고 관심과 응원 그리고 사랑을 당부했다. 다음은 지난 10일 서울의 한 커피숍에서 개그우먼 김미화와 나눈 일문일답을 정리한 것이다.

"농사와 예술이 있는 카페, 순악질 프로젝트 진행"

- 벌써 라디오(CBS <김미화의 여러분>)에서 하차한지 2달이 지났습니다. 하차 후 어떻게 지내시는지 궁금합니다.
"요즘은 '농부 김미화'로 바쁘죠, 용인에서 감자, 고구마, 고추, 옥수수와 벼농사를 짓고 있어요. 동네 농부들이 도와줘서 함께 짓고 있는데 도심에 사는 사람들이 농촌이라고 하니까 여기가 엄청 먼 곳인 줄 아시더라고요. 여기서 저는 방송을 하루도 안 빠지고 9년 동안 진행했거든요. 서울서 한 시간 반이면 충분하고요, 자연을 즐길 수 있는 우리 동네에 앞으로 많은 사람들이 내려와서 온전하게 쉬다갔으면 좋겠어요.

논밭이 엄청 많고 자연이 80% 정도 살아있고요, 그 자연 한가운데 '농사와 예술이 있는 카페' 컨테이너 4개를 붙어서 만들었습니다. 이 카페는 거의 재활용품으로 완성된 공간이고요, '순악질 프로젝트'라 이름 붙였는데, 여기서 저는 많은 사람들을 만날 거고, 자연의 소중함에 대해 이야기 나눌 거예요. 그런 쉼터를 만들고 있는데 정말 설레고 기대가 되요. 요즘 개구리도 엄청 울고 밤하늘에 별을 볼 수 있고 공기 좋고, 물 좋고, 한 80%정도 마무리 됐고 그 준비로 바쁘죠. 그리고 그 카페 앞마당에서 농부들과 건강한 먹을거리를 추구하는 사람들과 함께 건강한 농산물 직거래도 할 예정이에요."

-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하셨어요?
"농촌에서 오래 살다보니까, 여기 정직하고 착한 농부가 있더라고요. 제가 볼 땐 농부가 가장 착한 거 같아요. 왜냐면 그 사람들은 씨를 뿌리고 바로 싹이 나는 게 아니잖아요. 정직하게 세월을 기다려야 싹이 나고 그 싹이 꽃을 피우고 열매 맺거든요, 그 과정들을 농부들은 참 겸손하게 기다릴 줄 알고, 인생을 달달 볶거나 서두르지 않고 즐길 줄 알더라고요. 농부들이 농사짓는걸 보면서 '아, 농사가 예술이로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어요.

제가 30년 동안 화려한 무대 위에서 조명을 받으며 예술 했잖아요. 그것도 화려한 예술이지만, 화려한 것만이 예술이냐? 흙속에서도 예술이 나오더라는 거죠. 한 알의 씨앗을 흙에 심으면 거기서 놀라울 정도의 예술이 만들어 지는 거죠. 싹이 나고 잎이 커지고 열매 맺고 하는 과정을 매일 보면서 이게 예술이 아니면 뭐란 말인가 싶더라고요(웃음). 제가 가지고 있는 재능은 사람들과 함께 이야기 나누고 웃기고 웃고 하는 거잖아요. 논밭 한가운데서 우리가 함께 모여 이야기하고 건강한 먹을거리를 나눌 수 있다면 그게 바로 행복한 일 아니겠어요? 그야말로 제대로 힐링 좀 해보자 이거죠.

저희동네 자랑 겸 함께 이야기도 나눌 수 있고 하는 공간이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구상을 하게 되었어요. 계획은 오랫동안 세웠고 시작은 한 1년 전부터 했는데 제가 하나 하나 칠하고 못질하고 직접 벽에 달고 하다보니까 시간이 너무 짧아서 하루가 후딱 가 버리더라고요. 의자도 테이블도 직접 갈고 닦고 칠하고 한 거라 초보 티는 확 나는데 더 정이가요. 막상 계획은 세웠어도 실천하기가 어려운 거잖아요, 엄두가 안 났었는데 용기 있게 실천하고 나니까 할 일은 태산인데 하나 하나 완성 되가는 걸 볼 때마다 기분은 좋아요."

- 귀농 생각은 어떻게 하셨어요?
"귀농이라고 할 수는 없죠. 왜냐면 저는 도심에서 방송활동도 하면서 농사짓는 거잖아요. 귀농이라기보다는 농촌 문화 활동을 더불어서 함께 하고 싶다는 생각을 한 것이죠. 번잡한 도시를 벗어나 생활을 하고 싶다는 생각을 늘 했고요. 방송활동이 화려하고 바쁘고 사람들 많이 만나야 하잖아요. 도시에 있는 게 회색빛이었다면 녹색을 일주일에 2번은 봐야 한다는 강한 욕구가 있었다고나 할까요."

- 도시에 살 때와 차이점이 있다면?
"삶의 질이 달라요. 공기와 물이 다르고, 집에 있을 땐 차 소리도 안 들릴뿐더러 사람 구경도 할 수 없고, 나무나 각종 벌레들과 살죠. 벌레라고 하면 징그럽게 생각할지 모르지만 요즘 반딧불이가 얼마나 반짝반짝하고 이야기 하자며 엉덩이에 불을 켜고 다니는지 정말 예쁘고요. 동물들, 고라니들이 마당에 내려와 큰 눈이 마주치면 동그란 귀를 쫑긋하면서 날 쳐다보고요. 토종 다람쥐, 두더지, 야생고양이 춘자, 얘는 입 옆에 큰 점이 하나 떡 찍혀있어서 우리 부부가 '춘자야!' 이렇게 부르기 시작했는데, 자기 이름 부르면 '야옹!'하고 마루로 와요. 이런 애들하고 얘기하면서 살고 있어요.

내 친구가 백담사 아래서 식당을 하면서 산속에서 취나물이라든지 병풍이라는 큰 잎을 따서 귀하게 보관했다가 제가 가면 가끔 삶아서 쌈으로 싸먹으라고 주는데, 그 나물을 주면서 이 친구가 '이게 개소리 닭소리 안 들리는 곳에서만 나는 나물이다' 그래요. 그만큼 깊은 산속에서 자라는 오염 안 된 식물이라는 이야기예요. 정말 완전한 휴식 있죠, 도심은 집에서 쉰다 해도 집들에 둘러 싸여있어 좀 답답하잖아요. 여기는 자연에 둘러 싸여서 있어서 만족도가 굉장히 높아요."

"시사프로는 딱 10년만, 본연으로 돌아가려 했다"

- 논문 표절 논란 후 처음 인터뷰이신 듯한데, 당시 심경 그리고 현재 어떤 상태인지 말씀 부탁드립니다.
"당시에 문제제기를 한 인터넷매체는 저에 대해 '친노좌파' 운운 했었는데 결과 여부에 따라 저도 어떻게 하겠다는 입장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결과를 기다리고 있는 중입니다. 현재 학교에서 심사를 하고 있는 중 이라하니 무슨 말이 필요 하겠습니까? 결과를 지켜봐야죠."

- 라디오 하차 후 프로그램이 폐지되어 더욱 안타까우실 것 같아요. 논란은 시간이 지나면 잠잠해지기도 하는 문제잖아요. 해명하고 판명이 난 후 결정해도 될 텐데 성급한 선택은 아니었을까요?
"예. 그때 개편이 4월이라 4월까지는 진행하려고 했었던 건데 그만 3월에 급하게 그만두게 돼서 참 아쉽죠. 제작진에게도 미안하고요. 제작진도 학교 판단 이후에 결정해도 되지 않느냐 말렸지만 제가 시사프로를 해야겠다고 정해놓은 것이 10년이었고 제가 정해 놓은 시간에 따라서 움직이지 않으면 남이 정해준 시간표에 의해 한없이 질질 끌려갈 수 있겠다는 판단이 이었어요.

시사프로를 10년 했던 이유가 다시 제가 코미디로 돌아갔을 때 남이 경험해 보지 못한 것을 했기 때문에 그때 좋은 프로를 만들 수 있을 거란 생각을 가지고 했던 것이고 이젠 제가 정한 10년이 됐기 때문에 휴식기를 갖고 제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갈 수 있는 시간을 갖자 생각한 거예요. 그런데 막상 프로그램을 놓는다는 건 두렵고 힘든 일이거든요. 당장 먹고 살 길이 막막해 지는 건데... 하하!

그런데 인생이란 게 쉬어갈 시간도 필요한 거잖아요. 너무 앞만 보고 달리다보면 브레이크를 잡을 시간이 없잖아요. 그런데 제가 그만둔 이후에 프로그램이 없어져서 미안하기도 하지만 아껴주신 분들에 대한 고마움들을 잊지 않고 있어요. 이 모든 것은 반드시 갚을 거예요. 여러분들 웃겨서 웃다가 쓰러지게.(웃음)"

- <개그콘서트>와 <땡큐> 등의 출연으로 TV 방송을 다시 시작하는 시점에서 시사 프로그램을 관두게 됐는데, 혹시 그 영향은 아니었을까요?
다시 시작하는 시점이라기보다는 좋은 분위기로 '관계 맺기를 했다'라고 표현하는 게 좋겠네요. <땡큐>에서 차인표씨를 만나고 지드래곤, 강수진씨랑 데이트 정말 좋았었고, KBS의 경우는 3년 넘게 출연을 못했는데 <개그콘서트> 특집으로 먼저 손을 내밀어줘서 화해 무드가 조성되었다는 것이 저에겐 중요하고요. 앞으로 다시 대중 연예인으로 돌아가라고 모든 일들이 벌어진 것이 아닌가 싶어요.

코미디언으로서 시사 프로그램을 하면서 너무나 많은 일을 겪어서 이제는 말랑말랑한 모습으로 돌아가고 싶단 욕구가 솔직히 커요. 당장 제 앞날이 어떻게 될지는 모지만 기회가 왔을 때 그런 기회를 얻기 위해 제 스스로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았고 노력하고 있다는 것은 알아주셨으면 해요. 앞으로 그런 기회들이 많아지기를 바랍니다."

"활동하든 안하든, 나 김미화는 늘 그 자리에"

- 공교롭게도 올해가 개그우먼 데뷔 30년이 되는 해이잖아요. 그래서 더 아쉬울 것 같은데요?
"아니죠. 안 좋은 일은 안 좋은 일 만 벌어지는 게 아니라 늘 좋은 일과 함께 터진다고 생각해요. 또 이것도 안 좋은 일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어요. 왜냐면 이일로 잠시 쉬어 가는데 이것이 제 인생에 도움이 될지도 모르잖아요. 단정 지어 안 좋은 일이라고 생각하진 않죠. 좋은 쪽으로 생각하면 '쉴 수 있는 기회를 얻었구나. 감사하다'는 생각이죠.

그렇다고 30주년을 못할게 뭐 있어요. 꼭 표 나게 '공연합니다' 해야지만 그게 빛나는 건가요? 아주 작은 공연도 할 수 있잖아요. '우리 동네 논두렁 콘서트' 이런 거 얼마나 소박하고 멋지겠어요. 또 30주년만 중요한 게 아니라 31년도 중요하고 32년도 중요 한 거죠. 굳이 딱 정해놓고 획일적으로 하는 것 보다는 생각나는 대로 재미있겠다 싶으면 할 수 있고 그런 거죠. 진짜 논두렁에서 하면 재미있겠는 걸요."

- 한 분야에서 30년을 일 한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잖아요. 개그 인생 30년을 되돌아본다면?
"30년을 돌아보면 감사하단 생각이 들어요. 살고 싶은 대로 사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지 모르지만 제 경우는 제가 생각했던 대로 살아온 것 같아요. 그렇기 때문에 감사하죠. 왜냐면 한 분야에서 오랫동안 성취했고 거기에 우리 사회의 어떤 보이지 않는 편견이라든지 시선들을 뒤로하고 당당하게 활동하는 거잖아요. 지금도 제가 농사짓고 있지만 제가 어디가나요? 활동을 하고 있든 안하든 김미화는 그 자리에 있는 거죠. 참 잘 살아온 것 같아요."

- 30년이란 시간이 짧은 시간이 아니지만 데뷔 초부터 현재까지 모두 기억 날 거 같아요, 가장 행복했던 순간과 힘겨웠던 순간을 뽑으면 언제인가요?
"행복했던 때는 제가 계획에 의해서 열심히 활동해서 성취감을 느꼈을 때죠. 그런 걸 느끼기 어렵잖아요. 그리고 힘겨웠던 순간은 참 많아요. 개인적으로는 가정사적인 아픔도 있었고 시사프로를 하면서 이런저런 일들도 많이 겪었고, 뭐라고 꼭 집어 말할 수는 없지만 당할 때는 힘들었고 극복할 수 있을까 두려움도 있었지만, 지나고 보니 그런 것조차도 저에게 일어나야 할 일이었기 때문에 일어난 것이 아닌가 생각이 들고요. 그럼으로써 제가 단단해지고 남들이 경험하지 못한 부분을 경험 한 거니까 더 성숙해진 거라고 생각하죠."

- 대중들에게 어떻게 기억되길 바랍니까?
"웃기는 사람?  제 책 제목이 <김미화의 웃기고 자빠졌네> 잖아요. 그게 대중에게 외치는 저 나름의 간절한 호소일 수도 있어요. 저는 무대에서 웃기다가 죽는 것이 소망이에요. 어릴 때부터 코미디가 제 천직이라고 생각했고 지금도 변함이 없어요. 코미디에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에 시사프로도 그런 게 장점으로 작용한 것이고, 거기서 대중들이 코미디언이기 때문에 마음을 열고 더 친근감 있게 느끼고 사랑을 듬뿍 주셨고요. 앞으로도 쭉 웃기다가 자빠지는 게 저의 바람이니까 그 바람대로 되겠죠?"

- 가장 원초적인 질문일지도 모르겠는데 김미화씨에게 개그란 무엇입니까?
"인생이고 제 모든 것이죠. 그래서 정말 저는 제 꿈대로 살아야 해요. 시사프로그램 진행만 해도 그래요, 제가 코미디언이었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더 다가설 수 있었던 반면에 코미디언이기 때문에 시사프로를 진행하는 것에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저에 대해 관대했을지는 의문이죠. 저에 대해 어떤 편견을 갖고 있다거나 그것을 이용해서 어떤 다른 꼼수가 있지나 않을까 하는 자기들만의 잣대로 저를 가위질 하고 색칠하면서 바라본 부분도 분명 있었을 테고요. 하지만 그 사람에 대한 평가는 세월이 흐른 뒤에 내릴 수 있겠죠, 그래서 저는 사람들의 평가에 무덤덤한지 오래 됐어요. 알아주든 못 알아주든 코미디언 김미화의 길은 김미화가 가는 거죠."

- <개그콘서트>를 만드셨잖아요. 9일 700회를 맞이했죠. 하지만 <개그콘서트> 시청률이 예전만큼 나오지 않는데 원인이 무엇이라 생각하십니까?
"그래도 여전히 높던데요. '부자가 망해도 3년은 간다'고 아마 앞으로도 <개콘>은 한참 사랑 받을 겁니다. 하지만 언젠가는 또 시청자가 원하는 코드의 웃음을 개발해 내야하는 숙제도 있겠죠. 지난번 창사 40주년 특집에 출연하기 위해 후배들과 연습해보니까 뭐 아직 빵빵하게 웃길 수 있겠던데요 뭐, 제가 후배들은 참 잘 둔거 같아요. 아마도 이렇게 코미디언들이 부단히 노력하고 있으니까 더 좋은 웃음코드를 발견해 낼 거라 믿습니다. 응원 많이 해 주시면 더 웃게 해드릴 테니 코미디에 늘 관심 가져 주시기 바랍니다."

- 끝으로 30년이 되기까지 사랑해주신 팬 여러분께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앞으로 더 많이 사랑해주셔야 되니까 감사하단 말씀 보다는 더 많은 관심을 주세요. 어떤 사람의 인생을 겉모습만 보고 판단하는 사람이 있는가하면 그 사람 내면의 깊이까지 보고 판단하는 사람이 있잖아요. 알려진 사람들의 소식은 왜곡되거나 굴절되는 부분이 많아요. 그렇게 단편적인 소식으로 제 인생을 들여다보지 마시고 더 많은 사랑과 관심을 가지고 들여다보면 '아~ 이 여자 재밌게 사네'라는 생각으로 응원을 보내실 거 같아요.

'농사와 예술이 있는 카페 호미', 여기서 호미는 제 남편 이름 한 글자, 제 이름 한 글자 따서 이렇게 이름 지었고요. 이름 예쁘잖아요. '호미', 정직하게 땅을 일구는 농기구이기도 하구요, 어쨌든 우리들의 쉼터에 앞으로 많이들 놀러오세요!"

김미화 개그콘서트 코미디언 웃기고 자빠졌네 귀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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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들의 궁금증을 속시원하게 풀어주는 이영광의 거침없이 묻는 인터뷰와 이영광의 '온에어'를 연재히고 있는 이영광 시민기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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