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오마이뉴스>와 참여연대, 생활정치실천의원모임이 함께 '나는 세입자다' 기사 공모를 실시합니다. 가슴 아픈 혹은 깨알 같은 재미를 느낄 수 있는 기사를 기다립니다. 세입자와 관련된 사례라면 어떤 것이라도 좋습니다. 반지하나 옥탑방 이야기도 좋고 해외에서 경험한 사례도 환영합니다. [편집자말]
사진은 태백산눈축제 행사장에서 썰매를 끈 시베리안 허스키.(자료사진)
 사진은 태백산눈축제 행사장에서 썰매를 끈 시베리안 허스키.(자료사진)
ⓒ 연합뉴스

관련사진보기


외로웠나 보다. 24살 무렵, 만화를 그리겠다고 '작업실'이라는 그럴싸한 간판을 달고 처음 자취를 시작한 이래, 집에 그 흔한 전기밥솥도 없는 주제에 애인은 꼭 있는 주변 선후배들을 보며 애인은 없지만 밥솥은 있는 내 처지가 스스로도 그닥 위안이 안되었나 보다.

후배를 통해 태어난 지 갓 48일이 된 시베리안 허스키 한마리를 분양받기로 덜컥 정한 것은 순전히 그 외로움 때문이었을게다. 그러면서도 굳이 암컷이 아닌 수컷을 분양받은 걸 보면, 내심 외로운 속내를 인정키 싫은 무의식의 마지노선이었으리라. 뛰어놀기는커녕 죽은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하루종일 잠만 자는 갓난쟁이를 코트 품에 안고 자취방으로 돌아온 날은 손등이 터질 듯 에이는 1월의 한겨울 밤이었다.

바퀴벌레나 쥐, 곱등이 등등 남들에게 자랑하기가 애매한 동거생물을 제외하고 난생처음 겪어보는 반려동물과의 동거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우아할 아(雅), 늑대 랑(狼)'- '아랑'이란 이름을 갖게 된 녀석은 머리가 워낙 명석해서 똥, 오줌도 금세 가렸고 내 건강과 주머니사정을 배려했음인지, 친구들과의 잦은 술약속을 못갖게 하려고 내 휴대폰도 석대나 망가뜨려 놓았다. 따지고 보면 술값보다 휴대폰 기기값이 더 들었지만 어찌 아랑이의 충정을 탓할 수 있겠는가. 하물며 그는 개인 것을.

"옆 집 아가씨들이 개 때문에 무서워 죽겠대"

그렇게 녀석이 무럭무럭 자라며 세간살이를 하나,둘 망가뜨리는 것을 흐뭇한 아비의 미소로 맞으며 지하 단칸방에서 알콩달콩 평온한 시절이 육개월 가량 지난 즈음, 살고 있던 연립주택이 재개발이 되어 졸지에 우리는 새로운 보금자리를 알아봐야 할 처지가 되었다. 동네 전봇대에 꽂혀 있던 무가지를 바닥에 잔뜩 펴놓고 발품 팔기를 수십차례. 엉덩이가 말만한 처녀와 함께라면 한층 쉬웠겠는데 엉덩이가 말만한 개와 함께 살 집을 구하는 것은 생각만치 쉬운 일이 아니었다.

손에 쥔 보증금도 선택을 강퍅하게 했고 차는커녕 운전면허도 없던 나로서는 당시 직장이었던 학원과의 거리도 따져야 했으며 지방 교외로 진출하는 것은 여러모로 택하기 어려운 옵션이었다. 어렵다면 어렵고 운이 좋았다면 좋은 방을 구하긴 하였는데 홍대 인근의 창고를 개조한 단칸방이었다. 창고를 개조했다곤 하지만 그냥 시멘트바닥에 비닐장판만 깔아놓은 형태였으므로 보일러 따위의 겨울철 난방은 언감생심 바랄 상태가 아니었다.

오히려 다행이었다. 나야 전기장판 틀고 오리털파카 싸매고 양말 세켤레씩 껴신고 어떻게든 겨울을 넘기면 되지만 '넌 명색이 시베리안 허스키, 겨울을 위해 태어난 남자. 적어도 얼어 죽을 일은 없잖겠니'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문제는 전혀 다른 곳에서 터졌다. 이사한 지 몇개월이 지나 본격적으로 겨울철이 되니 입시학원 강사였던 나는 야간강의가 늘게 되었고 어느날 새벽녘 집으로 돌아오니 주인집 아저씨가 문에 쪽지를 붙여놓은 게 아닌가.

다음날 날 밝는대로 윗층 주인집 문을 두드리니 미간을 잔뜩 찌푸리며 나온 주인집 아저씨는 대뜸 "옆집 사는 아가씨들이 무서워 죽겠대. 개 좀 어떻게 해 봐" 하며 마뜩찮은 기색을 마구 뿜어댔다. 내가 집을 비운 사이, 사무치는 외로움에 아랑이는 목 놓아 '하울링'을 하였고 오밤중에 도심 한복판 바로 옆집에서 들리는 "어우우~~" 구슬픈 늑대울음소리는 옆집 사는 아가씨들의 몰골을 송연하게 만들었음이 분명하다. 

요즘이야 꽃미남 뱀파이어와 늑대인간이 아가씨들의 팬덤을 자극하는 세상이니 "이녀석, 알고 보면 보름달이 뜰 때마다 꽃미남이 된답니다"라고 우겨 볼 여지라도 있으련만 그 당시엔 그저 민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던 바, 하는 수 없이 그날로 다시 바닥에 무가지를 잔뜩 펼치는 날이 계속 되었고 아현동 산동네 즈음에 나름 맞춤한 방을 어렵사리 구할 수 있었다.

'아랑이'를 본 집주인 할아버지의 외마디 비명

2층에 위치한 방은 널찍했고 세면과 조리를 할 수 있는 공간은 아랑이의 배변활동에도 최적인 조건이었다. 자장면에 매수된 친구 셋을 동원하여 한창 이삿짐을 나르고 있는데 계약할 때 얼굴도 못 본 집주인 할아버지가 얼굴을 빼꼼히 들이밀며 내 조촐한 세간살이를 흘끔대다가 수도 파이프에 묶여 혀를 반쯤 빼물고 천진난만한 표정을 짓고 있던 아랑이를 보며 외마디 비명을 지르는 게 아닌가.

"총각! 이 개를 여기서 기를 건가? 이렇게 큰개를? 안돼! 안되고 말고! 개오줌 때문에 시멘트 바닥이 다 녹으면 어쩔 것이여! 절대 안돼!" 
"부...부동산 아저씨는 괜찮을 거라고"
"아니 안돼! 그 양반이 뭣 모르고 한 소리고! 이삿짐 값 10만원 물어줄테니, 절대 안되는 줄 아시게!" 

개오줌이 시멘트를 녹이면 동네 골목에 남아나는 전봇대가 하나도 없을 거라고도 이야기 해 보고 모공대에 다니는 이공계 후배에게 관련 논문이나 실험데이터를 구해 반론을 제기할까도 생각해 봤지만 '개오줌이 시멘트를 녹인다'고 철썩같이 믿는 할아버지의 신앙심이 고작 논문이나 데이터 나부랭이에 흔들릴 것 같지도 않았기에 그 길로 자장면에 매수된 내 친구들은 옮겼던 짐을 다시 용달차에 실을 수밖에 없었다. 

난감했다. 살던 집은 빼고 새로 살 집은 구하지 못했으니 나야 당장 풍찬노숙을 한다 해도 저, 혀를 반쯤 빼물고 오드리 햅번 눈동자를 한 저녀석은 당장 어디에 둘 것인가. 여우목도리마냥 목에 두르고 다닐 수도 없는 노릇. 좀 무거워야지.

하는 수 없이, 각종 정보를 배우기 위해 가입하고 활동하던 시베리안 허스키 인터넷동호회에 긴급SOS를 쳤다. 그리고 동호회 회원이 운영하는 애견카페에 한달정도 녀석을 맡겨 두기로 했다. 하지만 결국 한달이 넘도록 함께 살 집을 구하지 못한 나는 다시 인천 어느 교외에서 농장을 하고 있는 동호회 회원에게 아랑이를 한동안 맡겨 둘 수밖에 없었고 일주일 후, 그렇게 인천으로 간 녀석이 가죽 목끈을 끊고 1.5미터 철창을 넘어 유유히 사라졌다는 소식을 전화로 들을 수밖에 없었다.

그 동네 주변사람들의 증언에 따르면 길거리를 유랑하고 있던 아랑이를 어느 봉고차가 와서 날름 실어갔다고 한다. 그렇게 1년 6개월 가량 한이불을 덮고 잤던 아랑이와는 작별의 운도 못떼고 하릴없이 헤어지고 말았다.

텃밭 있는 집에 개랑 같이 살고 싶다

그 누구를 원망할 처지도 아니었다. 누군가의 탓을 해야 한다면, 형편도 안되면서 덜컥 시베리안 허스키라는 대형견을 키우려던 내 주제넘음이 오롯이 그 몫이겠다. 되도 않은 치기였다고 손가락질 할 수도 있다. 당시에는 어떻게든 해결하고 타개하고자 몸부림쳤으나 종국에는 자격과 조건도 안되면서 덜컥 저지른 내 어리석음에 가슴을 친 날이 수도 없었다. 벌써 10년도 더 된 이야기다 그 후, 금붕어조차 기르기 두려워진 나는 방 두칸 전셋집에서 한여자의 설거지 머신이 되어 살고 있다.

지금도 텃밭 있는 집에서 개랑 같이 살고 싶은 꿈을 간직하고 있는 나로선 TV나 신문에 넘쳐나는 아파트 광고를 도통 이해하기가 쉽지 않지만 어느 통계에 따르면 우리나라 애견인 수는 대략 700만명에 300만 가구로 추산된다고 한다. 그 많은 사람들이 다 제집 가진 사람들일 리는 없을테고. 개를 혹은 고양이를 혹은 보아뱀을 맘 편히 키우고 싶어 죽겠는데 형편이 안되는 세입자들 꽤 있지 싶다. 팔자 좋은 소리일 수도 있지만 많고 많은 세입자들의 온갖 사연 속에 나같은 바람을 간직하고 있는 사람의 희망도 살짝 끼워 넣어 본다.

'시멘트는 개오줌에도 끄떡없다'는 사실이 세상 널리 널리 퍼져 나가기를.

덧붙이는 글 | '나는 세입자다' 응모글입니다.



태그:#세입자, #애견
댓글
이 기사의 좋은기사 원고료 20,000
응원글보기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이전댓글보기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