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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와 참여연대, 생활정치실천의원모임이 함께 '나는 세입자다' 기사 공모를 실시합니다. 가슴 아픈 혹은 깨알 같은 재미를 느낄 수 있는 기사를 기다립니다. 세입자와 관련된 사례라면 어떤 것이라도 좋습니다. 반지하나 옥탑방 이야기도 좋고 해외에서 경험한 사례도 환영합니다. [편집자말]
좋던 싫던, 한 번 산 동네는 잊히지 않는 법이다. 가능하다면 예전에 살았던 동네를 다시 한 번 혼자 가보자. 이곳저곳에 배인 기쁘고도 슬픈 추억 속에 홀연히 어린 시절 혹은 젊은 시절의 내가 나타날 것이다.

그래서인가. 지난 7월 서울에 올라온 김에 나는 일부러 그곳을 찾아갔다. 지하철 7호선을 타고 강남에서 강북으로 올라가는 노선의 중간 어디쯤 있는 그곳. 3번 출구로 나가는 방향은 아직도 익숙하게 느껴졌고. 지하철 역 바로 앞에 펼쳐진 너른 사거리도 전혀 낯설지 않았다.

사거리 맞은편에서는 좀 더 젊은 내가, 혹은 임신한 내가 천천히 집을 향해 발걸음을 옮기는 모습이 한 편의 영상처럼 스쳐 지나간다. 그리고 나는 의식의 밑바닥에서 선명하게 떠오르는 옛 기억 속에 왠지 애잔한 마음이 되어 어디에선가 느릿느릿 한 잔의 술을 마시며 묻고 싶어진다. 너는 그때보다 행복하냐고.

[1년차] 전세대란, 신혼의 삶을 강타하다

다세대주택 밀집지역이었던 우리 동네 큰 사거리. 이곳을 지나 주택이 밀집한 골목으로 들어선다.
 다세대주택 밀집지역이었던 우리 동네 큰 사거리. 이곳을 지나 주택이 밀집한 골목으로 들어선다.
ⓒ 장윤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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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셋값이 급등했다고 했다. 그래서, 안 그래도 돈이 부족했던 우리 예비부부는 결혼을 두 달 앞두고도 갈 곳이 없었다. 손에는 달랑 2700만 원을 들고 전셋집을 찾는다 하니 부동산에서는 쓴웃음을 지었고 부모님들께선 죄 지은 표정을 지으셨다. 우리도 나이 서른이 되도록 전셋집 들어갈 돈도 마련하지 못한 부끄러움에 고개를 숙여야 했다.

2001년의 전세대란은 그렇게 신혼부부의 삶을 강타했다. 단지 몇 달 사이에 수천만 원이 오른 전셋값의 비밀을 캐고 분노하는 것은 나중 일이었다. 중요한 것은 당장 월세로 갈 것인지, 반지하로 갈 것인지, 그래도 집값이 조금은 싸다는 의정부 이북이나 경기도 광주시의 오포읍, 초월읍 등으로 가야 할지를 결정해야 했다.

"볼 것도 없어. 1층에 방 두 개고 화장실이 안에 있고. 근처에 재래시장도 있고, 뭐니 뭐니 해도 지하철 가깝고. 그냥 도장 들고 냉큼 달려와. 다른 사람도 방금 보고 갔으니까."

우리 부부와 함께 발이 부르트도록 돌아다니신 부모님에게서 긴급히 전화가 걸려온 날이 바로 나의 생일인 11월 초하룻날이었다. 볼 것도 없다는 그 말이 딱 맞았다. 전세라는 말 한마디에 계약은 빛의 속도로 이루어졌고, 부모님보다 조금 늦게 방을 보고 간 사람은 땅을 쳤다고 한다. 전셋값은 3700만 원. 모자라는 돈은 13%라는 어마어마한 이자율을 무릅쓰고 신용대출을 받았다. 집주인은 서울 시내에서 이만한 돈으로 전세를 구할 수 있는 곳은 여기밖에 없다고 목에 힘을 주었다.

그랬다. 비록 실평수가 약 8평도 채 안 되었지만, 거실은 없고 베란다는 꿈도 꿀 수 없어 잡동사니를 둘 곳이 없었지만, 화장실은 좁아터져 세탁기가 들어가는 순간 서 있기도 불편할 지경이었지만, 그래도 서울 시내에 발을 붙일 수 있다는 것에 안도의 한숨을 쉴 수 있었다. 한 번도 살아보지 않아 이름도 낯선 곳, 중랑구의 한 다세대주택 밀집지역에서 그렇게 우리의 신혼살이는 시작되었다.

13% 신용대출 받아 들어간 전셋집... 그곳에서 벌어진 '사건'

우리 동네 골목길 초입. 자매의 모습이 다정하다.
▲ 허름한 주택가를 걷는 자매 우리 동네 골목길 초입. 자매의 모습이 다정하다.
ⓒ 장윤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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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부부는 없는 살림에도 둘 다 늦은 나이까지 공부를 했다. 부모님께서 도와주실 형편이 못 되어 등록금과 생활비를 아르바이트로 간신히 해결해가고 있었고, 그것만으로도 벅차고도 벅찬 삶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공부를 계속하기로 결정했다. 그것이 당시 우리의 가치관이었다. 덜 벌고 덜 쓰고, 공부하고 글쓰고, 돈이 좀 모이면 여행을 다니고, 평생 서울에서 집 하나 마련하기 위해 인생을 걸지 않겠다고 말이다.

그래서 우리의 신혼살이 1년은 나름대로 행복했다고 할 수 있겠다. 2002년 월드컵 때는 좁디좁은 골목 가득 쏟아져나온 사람들과 함께 어깨동무를 하고 대한민국 만세를 부르며, 큰 맘 먹고 그 동네에서 가장 비싼 쇠고기 집에 가서 한우를 안주 삼아 취하도록 술을 마셨다.

우리가 다세대주택 세입자의 삶을 다시 생각하게 된 첫 번째 사건은 꿈 같은 신혼생활이 1년 조금 지났을 때 일어났다. 집 안에 도둑이 든 것이다. 큰 방 맞은편 작은 방에 우리 부부가 뻔히 있는데도, 도둑은 큰 방의 창문을 소리 없이 밀고 들어와 얼마 안 되는 결혼 패물과 우리의 지갑, 가방을 몽땅 가지고 도망갔다.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의 말로는 이 지역에서 연이어 강도 사건이 일어나고 있다고 했다. 용의자는 고등학생 2인조였고, 옆집 반지하에 사는 할머니는 구타를 당하기도 했다고 했다. 마침 우리 부부 둘 다 인터넷으로 뭘 하느라 이어폰을 꽂고 있었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더라면 도둑과 마주쳐 칼부림이라도 났을 판이었다. 나는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며 도둑들이 남겨놓고 간 침대 시트 위의 발자국들을 멍하니 바라볼 뿐이었다. 그들은 끝내 잡히지 않았다.

두 번째 사건은 더욱 엽기적이었다. 도둑이 들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새벽에 화장실을 간 나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화장실 창틀에 누군가가 다 쓴 콘돔을 올려놓고 간 것이다. 콘돔의 비닐 포장은 화장실 바닥에 던져져 있었다. 구역질이 날 것 같았다. 신랑이 급히 뛰어나가 화장실 뒤쪽으로 돌아가 보니, 화장실과 직결된 뒷담 안의 작은 공간에서 '심상찮은' 일을 벌인 것이 확실했다. 이미 아무도 없는 뒷담의 어두운 공간에서는 이 동네의 명물로 자리잡은 고양이들만 야옹야옹 울어댔다.

아파트-다세대, 강북-강남... 세입자에게도 '층'이 있다

오랜만에 찾은 옛 동네에는 점집이 많이 늘었다.
▲ 골목 안 점집들 오랜만에 찾은 옛 동네에는 점집이 많이 늘었다.
ⓒ 장윤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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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댁에도 그런 일이 있었네요. 저는 더한 일도 겪었어요."

옆집 아가씨가 공포에 몸을 바르르 떨며 자신의 이야기를 한 것은 그날 오후였다. 20대 중반의 그녀는 우리 옆집에서 혼자 살고 있었는데, 그 옆집이라는 것도 우리 집과 구조가 똑 같았다. 그녀의 말인즉, 자기가 샤워를 할 때 누군가가 몰래 들여다보고 있었다는 것이다. 놀라 비명을 지르고 뛰쳐나와 경찰에 신고를 했지만, 그 뒤로도 두 번이나 그런 일이 더 있었다고 한다. 나는 숨이 탁 막혔다.

"이사 가지 그래요? 혼자 살면서 그런 일을 겪다니, 저 같으면 못 살 것 같은데."
"안 그래도 친구랑 같이 살려고 여기 방을 내놨는데, 1년이 다 되도록 방이 안 나가네요. 정말 미치겠어요. 저 말이죠, 너무 무서워서 밤에는 화장실을 못 가고요, 방에 요강 가져다 놓고 살아요. 상상이 가세요?"

그때 즈음하여, 우리 부부는 점차적으로 세입자들 사이에도 나름의 층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똑같은 세입자라도 강남과 강북의 세입자는 판연히 다를 것이다. 그리고 아파트 세입자와 다세대주택의 세입자는 또 다른 층이다. 전세와 월세가 다른 삶의 질을 안고 살 수밖에 없듯이, 다세대주택 밀집 지역의 세입자는 아파트 세입자와는 다른 삶의 질곡과 불편을 받아들여야 했다.

치안의 불안 외에도 하루가 멀다 하고 벌어지는 주차 전쟁과 쓰레기 문제, 소음 문제는 날이 갈수록 우리에겐 골칫거리가 되었다. 당시만 해도 우리 집이 있는 골목에는 교회 목사님이 교인을 태우기 위해 커다란 봉고차를 주차해 놓고 있었다. 그 차 때문에 안 그래도 좁은 주차공간은 더더욱 좁아졌고, 주민들은 이 봉고차를 유료 주차장에 세워야 한다고 난리였지만, 생각해보라. 누가 그러겠는가 말이다.

유료 주차장은 한 달에 13만 원이나 했다. 논술 강의와 첨삭으로 먹고 살며 늘 늦게 들어오는 우리 부부가 억지로 산 차는 우습게도 15분이나 마을버스를 타고 가서 발견한, 옆 동네 공터에 주차되어 있었다. 몇 달 전 주차공간을 두고 옆집 반지하 아저씨와 설전을 벌였으나 결국 오래된 사람에게 자리를 내준 탓이다.

우리는 점점 생각이 바뀌었다. 한 5년 정도만 열심히 돈을 벌고, 그래서 조그마한 아파트에 전세를 얻고, 공부는 그 다음에 하면 안 될까 하는 생각이 시나브로 짙어졌다. 더구나 앞으로 아이도 가질 것을 생각하면 이 작은 다세대주택의 방 안에서는 너무 힘들지 않겠는가. 그리고 어느 순간 우리는 '더 넓은 집을 얻어야 한다'는 과제에 매달리고 있었다. 이른바 '현실'에 눈을 뜬 것이다.

(다음 편에 계속)

덧붙이는 글 | '나는 세입자다' 공모에 응모하는 글입니다



태그:#사는 이야기, #세입자, #다세대주택, #전세대란, #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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