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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오마이뉴스>와 참여연대, 생활정치실천의원모임이 함께 '나는 세입자다' 기사 공모를 실시합니다. 가슴 아픈 혹은 깨알 같은 재미를 느낄 수 있는 기사를 기다립니다. 세입자와 관련된 사례라면 어떤 것이라도 좋습니다. 반지하나 옥탑방 이야기도 좋고 해외에서 경험한 사례도 환영합니다. [편집자말]
베란다가 없는 다세대주택에서는  빨래를 널거나 잡동사니를 놓을 공간이 부족하다.
 베란다가 없는 다세대주택에서는 빨래를 널거나 잡동사니를 놓을 공간이 부족하다.
ⓒ 장윤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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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년차] 아파트에 살어리랏다

장대비가 마구 쏟아져내리던 그해 여름, 중랑천 때문에 상습 침수 지역이던 우리 동네 역시 물이 차고 넘쳤다. 주인 아저씨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온 것은 새벽 2시쯤이었던 것 같다.

"어이, 미안하지만 같이 일 좀 합시다. 여기 반지하 부부네 집이 물이 잠겼어요. 서로 돕고 살아야지."

주인의 말 그대로였다. 하필 쌍둥이를 낳았다고, 돈도 없는데 이 아이들을 어떻게 키울지 막막하다고 늘 어두운 표정을 짓던 젊은 부부의 방이 물에 잠기고 있었다. 신랑이 옷을 갈아입고 나갔고 곧 뒤따라 나간 나는 하수도에서 물이 콸콸 넘쳐오르고 있는 반지하 방을 보고는 할 말을 잃고 말았다. 비는 미친 듯 쏟아졌고, 초라한 반지하방은 이미 발목까지 물이 차오르고 있었다. 쌍둥이는 잠시 피신한 2층 주인집에서 빗소리보다 더 크게, 악을 쓰고 울어댔다.

우리 집만이 아니었다. 곳곳에 반지하 집들의 세입자들이 여기저기 나와 유령처럼 서 있었다. 우리는 일단 당장 필요한 살림도구들을 끄집어 내어 비가 들이치지 않은 곳으로 옮기고, 일부는 우리 집에 두었다. 아직은 어려 보이는 쌍둥이 엄마는 조금 정신이 나간 듯 일을 도우면서도 간간이 눈물을 훔치는 모습이 딱하기 그지없었다.

눈에서 만 원짜리 지폐가 보일 정도로 열심히 살았건만

그러나 그날 밤의 품앗이는 다음 날 우리 집에 '난리 부르스'가 일어나기 위한 전초전이었다. 장마철 거센 바람에 옥상에 있던 물탱크가 쓰러져 버린 것이다. 천장에서 타고 내려온 물에 온 집 안이 물바다가 된 것은 물론 터진 파이프에서 쏟아져 내린 물로 인해 싱크대의 그릇들이 박살이 나버렸다.

우리는 하루 종일, 이번에는 우리 집의 물을 퍼냈다. 신랑은 연신 "이럴 수가" 소리를 내뱉었고, 나는 울음이 터지기 일보직전이었으며, 주인은 어쩔 줄을 몰라했다. 그날 저녁, 우리는 홧김에 한동안 먹지 않기로 한 한우를 구워먹으면서 이 동네를 벗어나자고 굳게 다짐했다.

'우리의 현실을 보자! 우리는 더 나은 집이 있어야 해!'

물난리를 겪고 난 후, 나는 동네에 하나밖에 없는 아파트 단지가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었다. 나는 계획했던 박사 논문 쓰기를 미루었고 신랑은 예정했던 박사 시험을 보지 않았다. 그리고 할 수 있는 한 열심히 돈을 벌었다. 쌀이 떨어져도 다시는 하지 말자던 논술 첨삭 아르바이트(이건 안 해본 사람은 정말 모르는 중노동이다)를 집으로 가져와 새벽까지 매달리고, 싼 봉급에도 학원 일자리를 하나씩 더 구했다.

마침 논술이 뜰 때라 고등학교에서 논술 강사로 와달라는 요청들이 있어 여기저기 학교에 논술 강의를 나가기 시작했다. 일단 돈벌이에만 집중을 하니 이전보다는 벌이가 나아졌고 부모님께 용돈도 드릴 수 있어 뿌듯하기도 했다. 한 달에 한 번, 통장을 찍어보는 그날이 우리 부부의 잔칫날이 되기도 했고, 초상날이 되기도 했다. 자동차는 모셔만 두고 웬만하면 대중교통을 이용했으며 그토록 쓰기 싫어하던 가계부도 꼬박꼬박 써나갔다.

하고 싶은 일을 다 그만두고 돈을 버는 것이니, 돈이라도 더 벌어야겠다는 보상심리와 강박관념이 머릿속을 가득 메웠다. 이전에는 생각하지도 않던 먼 곳, 경기도는 물론이고 부산, 순천, 제주도, 거제도와 정선까지도 파견 강의를 나갔고, 항상 새벽에 집에 들어오는 생활이 계속되었다. 로또도 몇 번 샀다. 그렇게, 우리는 이제 서로의 눈동자 속에서 푸른 만 원권 지폐가 보인다고 농담을 할 정도로 열심히, 정말 열심히 생활의 바다에 뛰어들었다. 그리고 전세 계약 만기일이 점점 다가왔다.

[3년차] 역전세 대란

공동화장실을 쓰는, 사실상 '쪽방'에는 이주노동자들이 많이 산다.
▲ 공동화장실 공동화장실을 쓰는, 사실상 '쪽방'에는 이주노동자들이 많이 산다.
ⓒ 장윤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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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는 역전세 대란이라고들 했다. 들어올 때만 해도 전세라고 하면 보지도 않고 계약을 했는데, 나갈 때는 기다려도 기다려도 방이 나가질 않았다. 이 도대체 무슨 조화인지 모르겠다고 푸념을 하고 분노를 해도 소용없었다. 우리의 이사 후보지였던 의정부 근처, 도봉산 바로 밑에 있던 13평짜리 아파트는 우리를 기다려주지 않고 나가 버렸다.

그리고 방을 내놓은 지 1년이 넘은 시점, 우리와 주인의 사이는 극도로 나빠졌다. 집이 나가야만 그 돈을 받아 우리의 보증금을 줄 수 있다는 것이 주인의 말이었다. 우리는 세입자보호법을 들이댔다. 기간이 지났으니 세입자에게 돈을 주어야 한다고, 그렇지 않으면 법대로 하겠다고 마음에도 없는 으름장을 놓았다. 주인은 맘대로 하라고 했다. 그런 소송이 해결을 보려면 적어도 1년 반 이상의 기간과 수백만 원의 돈이 든다는 것까지 친절하게 일러주었다.

당뇨를 앓는 집 주인의 아내는 길거리에서 마주치면 젊은 사람들이 부모 같은 사람들에게 인정머리가 없다고 들으라는 듯이 내뱉었고, 열을 받은 신랑은 지지 않고 나이 드신 분들이 자식 같은 사람들에게 뭐하는 짓이냐고 빈정거렸다. 임신 중이었던 나는 7개월째에 태반의 위치가 좋지 않으니 꼼짝 말고 누워 있으라는 진단을 받았다. 하던 일을 모두 그만두고 하루 종일, 아무 하는 일 없이 좁은 방 두 개를 왔다갔다만 하니 정신병이라도 걸릴 것 같았다.

"어이, 애기 엄마(주인은 내가 임신한 후부터 꼭 나를 이렇게 불렀다), 빨리 올라와봐요. 급히 의논할 게 생겼어."

오랜만에 화색이 도는 목소리의 주인집 전화를 받는 순간, 나는 드디어 집이 나갔구나 하는 생각이 직감적으로 들었다. 이제 정말, 꿈에 그리던 아파트에 가는 건가, 들뜬 마음에 조심조심, 무거운 몸을 움직여 2층의 주인집으로 들어가니, 왠일인지 반지하의 쌍둥이 엄마도 남편과 같이 와 있었다.

"애기 엄마네 방이 나간 건 아니고, 사실 여기 쌍둥이네도 방을 내놨거든. 내가 애기 엄마 오라고 한 건, 이 쌍둥이네가 애기 엄마네로 오고 싶다는 거야. 근데 돈이 좀 모자라요. 그래서 말인데, 일단 애기 엄마네가 이사를 가요. 한 두어 달 시간을 가지고 찾아보면 아파트 전세는 어디든 있겠지. 그리고 보증금은 절반만 줄게. 나머지 절반은 여기 쌍둥이네가 친정에서 곧 빌려준다고 하니까 그때 주도록 하고."

우리의 희망은 오직 '집'... 왜 이렇게 살아야 하는 걸까

태풍 덴빈이 북상한 지난 8월 30일 오후 전남 진도군 의신면 창포리의 한 마을이 침수돼 주민들이 가재도구를 정리하고 있다.
 태풍 덴빈이 북상한 지난 8월 30일 오후 전남 진도군 의신면 창포리의 한 마을이 침수돼 주민들이 가재도구를 정리하고 있다.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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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세상에. 나의 기대와 꿈이 산산이 부서져나갔다. 옆에서 쌍둥이네는 자신들의 계획이 얼마나 확실한 것인지 내내 열심히 이야기했지만 하나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문득 처음보는 주인집을 둘러보았다. 늙은 주인 아저씨가 한 푼이라도 더 벌어 생활비에 보탠다며, 당뇨 합병증으로 한 쪽 눈이 안 보이는 할머니와 함께 옷에 단추를 다는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다는 것을 그때 처음 알았다.

20여 년을 동대문에서 작은 옷 수선집을 했다는 주인 내외를 보며, 정말이지 서러운 한숨이 새어나왔다. 집주인은 우리가 사는 집의 모든 세입자가 집을 내놨다면서 모든 보증금을 줄 돈이 없다고 하소연했다. 오죽했으면 은행에서 대출이라도 받아 줄 궁리까지 했지만, 자신도 집을 사서 올 때 전·월세 보증금을 끼고 들어와 돈이 없다는 것이었다.

그것은 어느 정도 사실인 듯했다. 이 동네에 사는 대부분의 집주인들은 노인층이었고 그들은 대부분 전·월세 보증금을 끼고 집을 샀기 때문에 은행 대출은 불가능하다는 것은 알고 있던 사실이었다. 그래서 집주인은 당시 우리 동네가 뉴타운으로 지정됐지만, 이에 격렬히 반대했다.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면 자신은 오히려 갈 곳이 없어진다는 이야기였다. 그의 말이 사실이라면, 그 역시 진퇴양난이긴 마찬가지리라.

다들 어려운 서민이기는 마찬가지건만, 왜 이렇게 살아야 하는 걸까. 전셋집이 없을 때는 없는 대로, 많을 때는 많은 대로, 이렇게 끝없이 풍파에 시달려가며 한 세상을 살아가야 하는 것인가 모르겠다. 참여정부도 들어서고 세상이 많이 좋아졌다는데도, 결국 한국 사회의 부동산 문제는 하느님이라도 해결하기 어려운 것 같았다.

그날 밤, 우리 부부는 나머지 절반의 돈을 늦게 받는 것이 과연 가능한 일이며 그렇게 해야 할 것인지 거의 밤을 새워가며 이야기했다. 그러나 그날의 긴급회의는 곧 파토가 났다. 쌍둥이네가 옆 동네에서 우리 집보다 더 싼 1층 전세를 얻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또 주인 부부와 불편한 인사만 나누면서 간신히 한 해를 넘기게 되었다.

쌍둥이네가 이사 간 반지하 방도 텅 빈 채 그대로였다. 우리의 아기는 100일째 되던 날, 곧바로 대전의 시댁으로 보냈다. 우리는 더더욱 눈에 불을 켜고 돈을 벌었다. 다행히도 강의 반응이 좋아 지방 학교와 계약 건수가 더 많아졌기 때문이다. 이제는 하루빨리 돈을 벌어 아이와 함께 살아야 한다는 절대적 당위성이 우리 앞에 놓여 있었다. 눈동자의 실핏줄이 터지고 입술이 부르트는 날이 많아졌다. 지방출장, 학원, 첨삭 등등 닥치는 대로 일을 했다.

그리고 공주의 어느 학교에 출장 수업을 가던 날, 나는 감기로 몸이 말이 아니었지만 난생 처음 링거를 맞고 기어이 수업을 다녀왔다. 우리는 일당을 받았기 때문이다. 수업을 못하면 일당도 없었고 학교와의 계약도 위태로워진다. 그렇게 억지로 하루를 버티고 새벽에 돌아와보니 먼저 온 신랑이 감기에 좋다는 생강차를 끓여놓고 소줏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우리, 더 이상 이렇게 살 수는 없어."
"그럼 어떻게. 대책이 없잖아."
"전에부터 생각해 온 건데, 우리 대전에 내려가는 거 어때? 어머니가 애는 잘 봐주실 거고. 우리 하는 일이 꼭 서울이 아니어도 되잖아. 물론 여기보다는 수입이 줄겠지만 대신 대전에 가면 아파트에서 살 수 있어. 이렇게 일하다가는 정말 과로사로 죽을 것 같아."

그랬다. 우리의 꿈, 가난해도 하고 싶은 일 하자, 그런 이야기는 이제 사치에 불과했다. 집, 집이 곧 우리의 희망이었다. 서민에게는 그것이야말로 현실이고 꿈이었다. 신랑과는 달리 서울 토박이었던 나이지만, 내가 태어나고 자란 이 서울을 정말 사랑하지만, 집만 보장이 된다면, 아파트 단지에서 살 수만 있다면, 대전도 좋고 부산도, 광주도 좋을 것 같았다.

신랑은 미안하다고, 자기가 못난 놈이라고 눈물을 글썽였고, 나도 아픈 목을 부여잡고 울었다. 그날로 우리는 대전을 우리의 희망으로 삼았다. 아이를 보러 갈 때마다 짬을 내어 집을 보러 다녔지만, 그러나 소용없는 일이었다. 서울의 방이 빠져야만 했다. 역전세 대란은 조금도 나아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고, 집집마다 방이 안 빠진다고 난리였다. 우리의 시름도 깊어갔다.

덧붙이는 글 | '나는 세입자다' 공모에 응모하는 글입니다



태그:#사는 이야기, #세입자, #전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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