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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선생님, 저랑 같이 속초에 배정을 받으셨네요. 본사에서 전화받으셨죠?"
"네. 세 명이 한 팀이던데요. 버스 타야겠죠?"
"강남터미널에서 3시간 반쯤 걸린답니다. 근데 목소리가 왜 그러세요?"
"감기가 심해서요. 약을 계속 먹고는 있는데 잘 안 낫네요."
"에휴, 차 오래 타는 거, 이거 정말 사람 죽이는 일이죠. 아무튼 대체는 안 될 테니 조심해서 몸 관리 하세요."

집에서 강남 고속버스터미널까지는 40~50분. 거기서 3시간 30분 걸려 속초터미널에 도착하고, 또 그곳에서 택시를 타고 논술 강의를 해야 하는 속초 모 고등학교까지. 이래저래 계산해 보니 출퇴근에만 거의 9시간이 걸린다. 그래도 괜찮다. KTX가 있고 대중교통이 잘 돼 있는 대도시들, 그러니까 대구나 부산만은 못해도 왕복 10시간을 훌쩍 넘기는 순천이나 해남보다는 낫지 않은가. 우리 회사의 선생님들이 이구동성으로 하는 말은 이렇다.

"제발, KTX 있는 곳으로 갔으면 좋겠어요."
"먼 데 가도 좋으니까 정기적으로 몇 번 간다, 이런 기본 회차가 정해지면 얼마나 좋아."

'논술'로 먹고사는 사람들

대학 입시에 논술이 등장하면서 새로운 직업도 탄생했다.
 대학 입시에 논술이 등장하면서 새로운 직업도 탄생했다.
ⓒ 오마이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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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랬다. 2000년대 중후반쯤, 어쩌다가 논술을 가르치는 일을 직업으로 삼았는지 모르겠다. 그러나 지방 고등학교에 논술강사로 파견되는 일로 먹고사는 이들이 있다(지금까지도!). 논술시험이라는 전형이 생기고 확대되면서 탄생한 신종 직업이다. 거의 대부분의 지방 대학들이 논술을 보지 않지만, 거의 대부분의 수험생들은 논술을 보는 서울 소재 대학에 진학하고 싶어 하기에 생겨난 일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런 수험생들의 절대 다수가 혹은 학부형들의 대부분이 '서울에서 내려온' 강사들에게 프리미엄을 준다.

"여기 선생님들은 다 서울 명문대를 나오신 명강사분들로…."

여지없이 '서울' '명문대'에 힘을 주며 우리를 소개하는 학교 선생님들의 틀에 박힌 말도 틀리진 않다. 실제로 논술 파견 강의를 나가는 선생님 중 명문대 출신은 흔하디 흔하다. 석사, 박사는 발에 챌 정도고 해외 유학파도 있다. 그래서 우리 회사의 선생님들도 무슨 일이 있으면 이런 말을 농담 삼아 하곤 했다.

"어허, 거 배울 만큼 배운 사람들이 왜들 그래요?"

배울 만큼 배운 사람들이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는 대한민국이다. 그래서 정상적이라면 대학 강의를 하거나 학문에 몸 바칠 이들이 밥벌이를 위해 살인적인 출퇴근 시간을 마다하지 않고 사교육 파견 교사로 나서게 됐다.

완전한 비정규직, 한 달에 몇 번이나 강의를 하게 될지는 알 수 없는 불안정한 노동 구조, 그럼에도 제주도든 거제도든 순천이든 정선이든 열 몇 시간의 출퇴근 시간을 거부할 수 없는 '현대판 지식 장돌뱅이'들이 탄생한 것이다.

"저는 뭐…. 그러려니 합니다. 여기서 받는 돈 하고는 비교도 할 수 없는 돈을 받고도 대학강사랍시고 전국으로 떠돌아다니기도 했으니까요. 그래도 여기서 일하면 식구들 밥값이라도 벌죠. 시간 강사 시절에는 장모님 눈치도 보이고 아내한테는 죄인이라 기도 못 펴고 살았으니까요."

서울에서 속초까지, 택시요금은?

전날 과음으로 버스 시각을 못 맞춘 이 선생님은 결국 택시를 타고 속초까지 왔다.
 전날 과음으로 버스 시각을 못 맞춘 이 선생님은 결국 택시를 타고 속초까지 왔다.
ⓒ 오마이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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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속초로 가는 김 선생이 어느 날 술자리에서 토로했던 말이다. 그는 고속버스터미널의 커피숍에 앉아 열심히 노트북을 두드리고 있었다. 어딘가에 발표할 소논문이라고 했다.

"그런데 이 선생님은 왜 안 오죠? 시간 다 돼 가는데…."
"이 친구가 이게…, 어젯밤에 술 약속 있다고 하더니 뻗은 거 아닌가요. 이 버스 놓치면 이제 없는데…."

김 선생이 전화를 넣는다. 통화는 되지 않고, 시간은 흐른다. 초조해진다. 만약 무슨 일이 생겨 수업 진행에 문제가 생기면 그야말로 중대사건이 터지는 것이다. 선생님 일당이 날아가는 게 문제가 아니다. 경쟁이 치열한 이 바닥에서 신뢰를 잃게 되고, 그 학교에 들어가는 모든 선생님들이 다음 강의를 못 맡을 수도 있다.

"저기요, 제가 숙취 때문에 지금 일어났어요. 어떻게 하든 알아서 갈 테니까 걱정 마시고요. 학교에서 봬요."

이 선생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내가 알기로 그는 운전을 못 하는데, 어떻게 올까. 김 선생은 구부정한 자세로 허리를 주무르며 따각따각 노트북을 두드렸고, 나는 식은땀을 흘리면서 창에 기대 잠들었다. 이날 나는 몸이 안 좋아 항생제를 잔뜩 맞았기 때문이다. 이 일을 시작한 뒤로 몸이 무척 안 좋아졌다.

나는 '아마 이 선생은 양양까지 비행기를 타고 오지 않을까' 생각했다. 이런 일이 종종 있었다. 부산 수업에 늦어 비행기를 타고 온 선생님, 해남 수업에 늦어 여수까지 비행기를 타고 또 택시를 타고 온 선생님…. 그날 일당은 물론 이전에 번 돈까지 날리면서도 지각할 수 없는 사람들이다.

"아니 쌤, 일찍 오셨네요? 비행기 시간이 잘 맞았나 봐요?"

다크 서클이 뺨까지 내려온 이 선생이 학교 정문 앞에서 우릴 기다리고 있었다. 양양에서 속초도 꽤 거리가 되는데, 어찌 이렇게 빨리 왔을까. 이 선생은 다 죽어가는 표정으로 배시시 웃었다.

"비행기는요. 택시 타고 왔어요. 비행기 시간도 안 맞더라고요."
"네에? 택시요???"

눈이 휘둥그레졌다. 아니, 택시라니. 이런 경우에는 왕복 요금을 내야 하지 않는가. 이 선생이 손을 휘휘 내저었다.

"얼마 줬냐고 묻진 마세요. 속 아프니까요. 근데 장 선생님은 목이 왜 그래요?."

각자 저마다의 사연이 있었다. 수업을 듣는 아이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래도 이 동네에서 공부 좀 한다는 아이들을 모아 겨우 한 반을 꾸렸지만, 글쓰기니 토론이니 하는 새로운 수업에 익숙하지 않은 아이들은 실력이 많이 모자랐다. 그래도 서울로 대학을 보내겠다고, 오징어 잡고 밭을 갈아서 마련한 돈으로 시작된 강의였다. 아마도 그런 사연들 때문에 목이 퉁퉁 붓고 수십만 원 택시비를 날리면서도 오게 되는 것 아닐까. 지방 수업을 하면 평소에는 전혀 느끼지 못 하던 사명감이 갑자기 생겨나기도 한다.

일이 출퇴근을, 출퇴근이 삶의 질을 결정한다

강남고속버스터미널
 강남고속버스터미널
ⓒ wiki commo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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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10시. 수업이 끝났다. 막차는 오후 11시 30분까지 있었다. 나는 무엇보다도 터미널 화장실에서 일회용 클렌징 티슈로 화장을 지워야만 했다. 맨 얼굴이 창피한 것은 초보 선생님의 경우다. 서울에 새벽 3시에 떨어지고 집에 가면 새벽 4시가 되는 이 특별한 퇴근길을 화장한 얼굴로 버티기는 거의 불가능하다. 이제, 그 먼 퇴근길에 바라는 것은 서울까지 가는 동안 깨지 말고 잠드는 것뿐이었다. 그래도 불을 꺼주는 버스가 환하게 불 켜진 기차보다 덜 피곤하다.

"선생님도 애 키우셔야 되고 더 나이 들면 이런 일 못 하실 텐데요."

으스스하게 온몸을 조여오는 한기 속에서, 이 선생이 담배를 피우며 묻던 그날, 새벽 휴게소를 나는 또렷이 기억한다. 항생제 때문에 머리가 어지럽고 구토증상이 났고, 택시비로 수십만 원을 날렸을 이 선생의 짜증 섞인 피로가 온몸으로 전달됐다. 그럼에도 이 일을 못 하게 될까 걱정하고, 다음은 어디를 가나, 본사에서 또 연락이 언제 올까 기다렸던 그날은 잊히지 않는다.

"본사에서 대치동에 학원 오픈한답니다. 장 선생님은 그쪽으로 가실지도 모르겠네요."
"글쎄요. 경쟁이 치열할 텐데…. 선생님은요? 쌤 강의력이야 다들 알아주잖아요."
"저야 뭐…. 아시다시피 전 학벌이 딸리잖아요. 지방대 출신이 대치동에 어떻게 가겠습니까. 이렇게 보따리 장사나 계속해야죠. 고향에서 학원 하나 오픈할까 했지만…. 시골에서 논술학원이 되겠습니까. 저도 답답합니다."

그 후로도 몇 년 동안 전국이 출퇴근길이었던 나의 떠돌이 생활은 계속됐다. 김 선생은 끝내 교수임용이 되지 못했다. 강의 전담만 몇 번 하다가 지금은 어떻게 됐는지 소식이 끊겼다. 탁월한 강의력을 자랑하던 이 선생은 좀 더 큰 회사로 옮겨가서 여전히 전국을 누비고 다닌다고 한다.

수많은 지방학생들은 아직도 서울을 꿈꾼다. 그리고 지금도 10시간이 넘는 출퇴근길을 견뎌내는 이 시대의 장돌뱅이들이 있다. 부디, 바란다. 그들이 건강하기를. 지각하지 않기를. 그리고 어딘가에서 덜 피로한 일을 하게 되기를. 21세기의 지식 장꾼들이여. 더 나은 내일이 있을 거라는 꿈꾸며, 서울에 올 때까지 그 꿈 깨지 마시라.


태그:#사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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