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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습관처럼 여행을 다니는 사람들이 있다. 생계가 걸려 있는 직업도 아니고 그렇다고 기분전환 삼아 훌쩍 떠났다 돌아오는 취미도 아닌, 그저 오래 전부터 몸에 익은 습관처럼 어쩌지 못해서 다니는 여행. 드물지 않지만 그렇다고 흔하지도 않은 이런 여행을 즐기는 사람들을 두고 우리는 흔히 방랑벽이 심하다거나 역마살이 끼었다고 말한다.

이병률 시인이 바로 그렇다. 그에게 있어 여행이란, 그가 거스를 수 없는 ‘피의 일’이며 스스로도 어쩌지 못하는 ‘야생의 습관’이다. 피를 다스리고 야생을 길들이기 위해서는 떠나는 수밖에는 다른 도리가 없다. 이것은 그가 펴낸 두 권의 시집 제목(<당신은 어딘가로 가려 한다>와 <바람의 사생활>)에 고스란히 드러나 있거니와, 그 시집들에 수록된 여러 편의 시들에서도 쉽게 발견된다.

그가 20대 후반부터 30대 후반에 이르는 10여 년 동안 170여 차례나 비행기를 타고 50여 개국, 200여 도시를 떠돈 여행의 흔적들은 시에만 새겨져 있는 것이 아니다. 아름다운 사진들과 짧게 적어놓은 여행 노트들과 인상적인 몇 편의 여행기들에 오히려 더 많이 담겨 있다. <끌림>은 시집으로는 다 담아낼 수 없는 이런 여행의 추억들을 한 권에 모두 담아서 펴낸 아름다운 책이다.

2.

<끌림>
▲ 책표지 <끌림>
ⓒ 랜덤하우스코리아(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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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고 이 책 <끌림>을 흔하게 볼 수 있는 일반적인 여행기나 여행산문집쯤으로 여겼다가는 큰 오산이다. 여행자의 시선으로 바라본 이국의 색다른 풍물에 대한 묘사와 낯선 문화에 대한 설명을 담고 있는 글들과 사진들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끌림>에서 마주치는 글들과 사진들의 대부분은 여행지에 대한 장황한 기록과는 한참 거리가 멀다.

이 책은 여행하는 자의 내면 기록이라고 불러야 더 좋을, 간결하면서도 섬세한 글들과 그 글들이 우리 마음 속에서 빚어내는 이미지들을 고스란히 인화해 놓은 듯한 사진들로 이루어져 있다. 표지 장정에서부터 확 시선을 끄는 <끌림>이 일단 책장을 넘기고 나면 그 끝을 볼 때까지는 좀처럼 손에서 놓기 어려운 이유도 이 때문이다.

사람이 사람을 믿어야 하는 일은 당연하고도 당연한 일이겠지만 그 일로 몇 번의 죽을 것 같은 고비를 겪은 적이 있는 사람한테는 사람 믿는 일이 가장 어려운 일이 될 수도 있을 거란 생각. 내가 아는 사람 중에는 마음 아프게도 사람 때문에 마음 아픈 일이 많아 아주 먼 나라에 가서 살게 된 사람이 있다. 정말 그렇게까진 하지 않으려 했던 사람인데 사람을 등지는 일이, 나라를 등지는 일이 돼버린 사람.

쓸쓸한 그 사람은 먼 타국에 혼자 살면서 거북이 한 마리를 기른다. 매일매일 거북이한테 온갖 정성을 다 기울인다. 말을 붙인다. 그럴 일도 아닌데 꾸짖기까지 한다. 불 꺼진 집에 들어와 불 켜는 것도 잊은 채 거북이를 찾는다. 외로움 때문이기도 하지만 자신의 손길을 필요로 하는 존재가 세상 어딘가에 있을 거란 확신으로 거북이에게 기댄다. 근데 왜 하필 거북이었을까?

'거북이의 그 속도로는 절대로 멀리 도망가지 않아요. 그리고 나보다도 아주 오래 살 테니까요.' 도망가지 못하며, 무엇보다 자기보다 오래 살 것이므로 내가 먼저 거북이의 등을 보는 일은 없을 거라는 것. 이 두 가지 이유가 그 사람이 거북이를 기르게 된 이유. 사람으로부터 마음을 심하게 다친 사람의 이야기. (#006 거북이 한 마리)


짧게는 몇 줄, 기껏해야 두세 쪽을 넘지 않는 이런 짧은 산문들을 읽으면, 마치 심야 FM 라디오 음악 방송에서 분위기 있는 곡을 틀어주고 난 후 바로 이어서 들려주곤 하는 쓸쓸한 이야기들을 듣는 듯하다. 울컥, 마음은 더 깊어진 밤 쪽으로 기울어지고, 그 깊은 밤 짙은 어둠 속으로 오래 퍼지는 어떤 소리에 저절로 귀를 기울이게 된다. 이 책에서 우리가 만나게 되는 것은 이처럼 글이 아니라 말이고 딱딱한 문장이 아니라 다감한 목소리이다.

이 책에는 이렇게 깊은 울림을 주는 시적인 문체 또는 나긋나긋한 구어체로 쓴 짧은 산문들이 상당히 많아서 라디오 방송용으로는 아주 제격으로 여겨진다. 실제로 이 책에 실린 많은 글들이 그렇게 심야의 라디오에서 흘러나오지 않았을까? 한때 인기 있는 라디오 방송 프로그램의 작가로 일하기도 했던 이병률 시인의 이력을 떠올리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겠다.

너무 쓸쓸해서 가슴이 먹먹해지기도 하고 때로는 따스한 온기가 느껴져서 살포시 미소를 머금게도 하는 이런 이야기들은 대부분 여행지에서 그가 만났던 사람들이 들려준 이야기거나 아니면 그들과의 만남에서 있었던 사건들로부터 끌어낸 것들이다.

손님이 선택한 향비누로 머리를 감겨주는 기막히게 솜씨 좋은 멕시코 이발사 곤잘레스 할아버지, 미각을 잃은 어머니를 위해 요리를 만들어주다가 일류 요리사가 된 푸에르토리코에서 온 청년 페르난도, 며칠 전 헤어진 남자친구를 잊기 위하여 이태리 시칠리아 섬에 왔다는 당찬 스페인 아가씨 안젤라, 그리고 스페인의 작은 시골 마을에 살면서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난 후 35년 동안 하루도 빼놓지 않고 자기 손으로 교회를 짓고 있는 일흔 다섯 살의 쿠르도 할아버지.

이밖에도 그는 세계 각국을 떠돌아 다니면서 만난 숱한 사람들에 대한 남다른 추억들을 이 책에 풀어놓고 있는데, 이를 통해서 우리는 그가 끌린 것은 풍경이 아니라 사람이라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다. 이병률 시인은 이를 숨기지 못하고 이 책의 말미에서 고백을 하고 있다.

사람을 좋아하는 사람은 상처 때문에 떠난다. 나 또한 다르지 않았다. 사람으로부터 내가 사는 곳으로부터 떠나 눈발이 된다. 사는 일 또한 그랬다. 차곡차곡 쌓인 사람과 희망에 대한 환상으로 살면서, 때론 조용히 허물어지는 것까지도 바라보는 것. (#000 도망가야지, 도망가야지 epilogue)

낯선 나라에서 거북이를 키우며 혼자 사는 사람처럼 이병률 시인 역시 사람 때문에 상처를 받고 그 상처를 달래기 위해서 여행을 떠난다는 것. 낯선 곳을 떠돌아다니면서 숱한 사람들을 만나는 동안, 수십 년 동안 일상 위에 차곡차곡 쌓아 올린 나만의 환상들은 허물어지고 그 허물어지는 풍경을 조용히 바라보며 기꺼이 받아들이는 넉넉함도 비로소 생기게 된다는 것. 이것이 그가 여행을 떠나는 이유이며, 상처받은 그의 피를 다시 채우는 일이며, 야생의 습관을 길들이는 방법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낯선 여행지에서 만나는 사람이라고 해서 왜 환멸이 없겠는가? 이병률 시인 역시, 현지 가이드를 자처하는 어린 소년에게 바가지 관광을 당하고, 함께 여행을 하는 터라 마음 놓고 믿었던 동행에게 배낭을 털리고, 거짓말에 능한 불우한 현지인에게 선뜻 큰 돈을 빌려주었다가 한 푼도 돌려받지 못하는 곤경을 겪고는 몹시 쓸쓸해 한다.

그런데도 사람 좋은 그는 사람에 대한 믿음을 끝내 놓지 않는다. "항상 당하는 쪽인 나 같은 이에게 쓸쓸함만 남는 건 아니다. 고맙게도 쓸쓸하면 할수록 다시 사람을 떠올리며 사람의 풍경 안으로 걸어갈 힘이 생긴다"라고 말한다.

한번 사람을 의심하기 시작하면 여행은 끝이다. 그만큼 자유롭지도 못할 뿐더러 기회도 적기 마련. 세상에 하나뿐이라고 생각한 친구를 믿은 적 있으나 그는 나를 믿어주지 않았고 한 사람을 믿은 적 있으나 그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믿음이 아닌 듯하였다. 그 울림은 더 장황해져서 다른 사람에게 믿음을 옮겨가면 그뿐이었다. 내가 사람에게 함부로 대했던 시절이 분명 있었기에 당함으로써 배우는 것이라 자위하면 되는 것.

서성(書聖)으로 불리는 중국의 왕희지가 서예를 연마하기 위해 연못물이 까매지도록 먹을 갈았는데 이를 두고 묵지(墨池)라 했다는 일화처럼 나는 사람을 믿기 위해 끊임없이 다닐 것이고 그렇게 다님으로써 사람의 큰 숲에 당도하기를 희망한다.

역사가 길지 않은 믿음은 가볍다. 그 관계에 부딪침만 있고 따분함만 있을 뿐이며 혼자인 채로 열등할 뿐이며 가벼울 뿐더러 균형마저 잃는다. 심연은 깊은 못이나 바다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한가운데 존재한다. 사람을 믿지 않으면 끝이다. 그렇게 되면 세상은 끝이고 더 이상 아름다워질 것도 이 땅 위에는 없다. (#061 페루에서 쓰는 일기)

3.

이병률 시인이 그렇게 10여 년 동안 세계 각국을 구석구석 헤매면서 마주친 사람들과 맺은 아름다운 인연이, 그 인연을 실꾸리 삼아 그들이 풀어놓은 속내 이야기들이, 그리고 그 이야기들 속에서 시인의 감성으로 길어낸 보석 같은 단상들이 이 책 <끌림>에는 가득 들어차 있다.

여행을 떠나는 설레는 마음이나 여행지에서 마주친 낯설고 매혹적인 풍경 앞에서 터져 나오는 경탄의 외침은 없어도, <끌림>은 그 어떤 여행기나 여행산문집보다도 더 뜨겁고 강렬한 목소리로 우리를 여행으로 유혹한다. 문 밖에 길들이 다 당신 것이며, 그 길에서 만나는 사람들이 모두 당신 친구라고. 그리고 바로 이어서 묻는다. 당신은 당신이 주인이었던 많은 것들을 모른 척하지는 않았느냐고, 당신은 당신의 친구였던 많은 이들을 나와 다르다고 해서 외면하지는 않았느냐고.

그런 의미에서, 여행은 목적지가 어디이든지 간에 항상 나에게로 떠나는 여행이며, 홀로 떠난다 해도 항상 친구와 동행하는 여행이다. 우리가 잊고 있었던 이 여행의 진실을, <끌림>은 쓸쓸하지만 다정한 시인의 목소리가 들리는 아름다운 글들과 날카롭지만 따뜻한 사진작가의 눈빛을 담은 아름다운 사진들로 말하고 있다. 그래도 여행을 주저하는 이들이 있다면 다음 구절을 들려주고 싶다.

‘내일과 다음 생 중에 어느 것이 먼저 찾아올지 우리는 결코 알 수가 없다!’
티베트 속담이다. 이 속담은 티베트의 칼날 같은 8월의 쨍한 햇빛을 닮아 있다. 살을 파고들 것만 같은 말이다. 내가 지금 걷는 이유는 내일과 다음 생 중에 어느 것이 먼저 찾아올지 모르기 때문이다. 올 것이 오지 않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026 내일과 다음 생 가운데)


한 사람의 삶은 사는 동안 그가 걸어 다닌 길만큼 넓어지고 한 사람의 마음은 그 길에서 그가 만난 사람만큼 깊어지는 법. 삶이 넓어지고 마음이 깊어지기 위해서는 여행만큼 좋은 것이 없다. <끌림>은 여행 떠나는 우리의 배낭에 지도와 여행안내책자보다 먼저 챙겨넣어야 할 책이다.

덧붙이는 글 | <끌림 : 1994-2005 TRAVEL NOTES>

ㅇ 이병률 사진∙글
ㅇ 랜덤하우스코리아㈜ 펴냄
ㅇ 2007년 8월 20일 초판 21쇄
ㅇ 값12,000원



끌림 - Travel Notes, 개정판

이병률 지음, 달(2010)


태그:#끌림, #이병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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