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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추선생, 엽락명이오.’

전음이었다. 함곡과 잠시 대화가 끊겼던 용추에게는 기다리던 음성이었다. 허나 내색을 하지 않고 옆에 놓인 나뭇가지를 몇 개 집어 들어 모닥불로 던졌다.

‘창월이 본래의 계획대로 좌총관의 척추를 끊어놓았소. 진운청이 좌총관을 업고 생사림을 떠났소.’

‘척추를 갈랐다?’

용추의 뇌리로 혈간의 등에 난 상처가 문득 떠올랐다. 엽락명의 말이 사실이라면 좌등은 이미 폐인이 된 것이나 마찬가지다.

‘확실하오?’

용추가 전음을 던졌다.

‘이미 지시대로 내 눈으로 본 것이고 확인된 사실이오.’

그 말에 용추는 더 이상 자신의 감정을 숨기기 어려웠는지 입가에 은근한 미소를 베어 물었다. 다행스런 일이었다. 상만천이 성곤과 손을 잡았다고 했을 때 용추는 반신반의 했다. 용추가 생각하기에 성곤은 매우 불확실한 사람이었다.

사람이란 뭔가 이루고자 하는 목적을 가지고 있거나, 뭔가 얻고자 하는 욕심이 있을 때, 그리고 그것을 혼자 힘으로 달성하거나 얻기 힘들 때 비로소 타인과 협력하게 되는 것이다. 이 승부에서 가장 확실한 협력 대상인 보주를 제외한 것은 그런 이유에서였다.

그것은 성곤도 마찬가지였다. 용추가 판단하기에 성곤은 목적이나 욕심이 없는 사람이었다. 더구나 성곤은 친구인 운중보주에 대해 매우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있는 인물이었다. 그 어떤 것을 준다고 해도 운중보주를 버릴 사람이 아니라는 생각이었다.

‘내 판단이 틀렸던 것일까?’

처음 상만천으로부터 성곤과 손을 잡았다는 말을 들을 때 조심스럽게 반대했다. 상만천의 판단력을 의심해서가 아니었다. 상만천은 자신이 가지고 있지 않은 뭔가가 있었다. 포용력이나 다른 사람들을 압도하는 위엄만은 아니었다. 사람을 확실하게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이는 묘한 능력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용추가 그 믿음을 위해 요구했던 것이 좌등의 죽음이었다. 가장 불확실한 변수는 보주였고, 그 보주를 보좌하는 좌등이 사라지면 보주의 영향력은 절반 이하로 떨어질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좌등의 척추를 갈랐다면 성곤으로서는 이미 운중보주와 더 이상 타협할 수 없는 선을 내딛은 셈이다. 운중보주에게 있어 좌등의 존재는 주종 이상의 관계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 용추로서는 더 이상 믿지 않을 수 없었다.

‘성곤 같은 인물마저도 명리에 초월할 수 없었던 것일까?’

묘한 감회가 밀려들었다. 이제 산다면 얼마나 더 살 수 있을까? 그럼에도 아직 욕심을 버리지 못한다는 것에 서글픈 생각도 들었다. 우리 인간의 본성이란 얼마나 더 악해질 수 있는 것일까? 얼마 남지 않은 여생(餘生)을 위해 친구까지 배신해야 하는 것일까?

‘수고했소. 남은 한 가지 일도 마저 처리해 주시오.’

용추는 다시 모닥불에 나뭇가지를 던져 넣으며 전음을 던졌다. 대답은 없었다. 이미 자신의 전음을 듣는 순간 엽락명은 움직이기 시작했을 것이다. 엽락명이라면, 욕심을 버리지 못하고 모든 것을 배신할 수 있다는 것은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엽락명은 반드시 남은 한 가지 일도 마저 처리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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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중선…으로…가세….”

생사림 밖까지 호위(?)를 했던 창월이 정중히 인사를 하고 다시 생사림 안으로 들어가자 죽은 듯 업혀있던 좌등이 나직한 목소리로 진운청에게 말했다.

“대주…일단 운중각으로 가심이….”

좌등의 큰 체구는 물을 먹은 솜처럼 축 늘어져 있었고, 무게를 느끼게 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어찌되었든 보주를 신처럼 생각하는 진운청으로서는 보주라면 좌등을 위해 어떠한 조치라도 해 줄 수 있을 것 같기 때문이었다.

“아니야, 보주께서 내 모습을 본다면 매우 슬퍼할 게야…. 그리고 모든 일이 뒤틀려 버리게 되겠지…. 어차피 나는 주군을 위해 목숨까지 버릴 수 있다….”

무슨 뜻일까? 진운청은 좌등의 말을 이해하기 힘들었다. 지금 유일하게 좌등을 구원할 인물은 보주밖에 없다고 생각하고 있는 진운청으로서는 정말 이해하기 힘든 일일 것이다.

“대주…!”

죽겠다는 것인가? 아니 죽더라도 자신의 초라한 모습을 주군에게 보이기 싫다는 것인가?

“자네도 고집이 세군. 어서 운중선으로 가세. 날이 밝기까지 겨우 한시진 반 정도 남았어.”

점점 모를 말이다. 날이 밝은 것과 운중각이 아닌 운중선으로 가는 것이 무슨 상관이 있다는 말인가?

“가장 확실하고 가장 어리석은 방법을 택할 때가 되었어.”

진운청은 머리를 흔들었다. 무슨 뜻인지 이해는 하기 어려웠지만 좌등에게 다른 복안이 있음을 감지하기 시작했다.

‘해룡신(海龍神) 위일천(魏溢天)!’

문득 진운청의 뇌리에 무식하기 짝이 없는 한 인물이 스쳐지나갔다. 같은 운중보에 머물고 있었다고는 하지만 자신은 그와 몇 마디 말도 나누지 않았다. 그는 왠지 위일천이 싫었다. 그것은 아마 위일천이 언제나 운중선에만 있었기 때문이 아니었나 싶다.

좌등과도 역시 친분이 깊지는 않아 보였다. 허나 자신의 기억으로는 유독 보주와 좌등에게만은 깍듯이 대접하는 인물이었다. 그와 뭔가 약속이 되어 있었던가? 진운청은 날렵하게 운중보의 정문을 향해 내려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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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먼저 복용해야 할 해약은 노란색 녹피주머니에 들어있는 단약 세 알이네.”

중의는 더 이상 버틸 수 없음을 알았다. 모든 일이 틀어지고 있었다. 그동안 준비해 온 원대한 야망이 이곳 운중보로부터 시작된다는 믿음을 가지고 들어왔는데 한 순간에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아직도 추태감에 대한 믿음, 아니 미련은 남아있지만 이 운중각에 상만천이 들어선 순간부터 똑같은 꿈을 꾸는 상만천에게 이미 자리를 빼앗겼다는 상실감을 맛보아야 했다.

자신과 추태감이 준비한 거사에 있어 첫 번째 걸림돌은 운중이라고 생각했다. 헌데 아니었다. 그것은 자신이 충분히 파악하고 어느 정도 타협 가능하다고 믿었던 상만천이었고, 거기에 성곤이라는 아주 치명적인 변수가 도사리고 있었다. 상만천은 첫 번째이자 마지막으로 그의 꿈을 앗아갈 상대였던 것이다.

이미 상만천은 성곤이라는 절대적으로 필요한 조력자를 얻었다. 성곤에 이어 장문위까지 얻었다. 그리고 이 운중각을 장악했다. 마지막 기회가 주어질지는 모르지만 상황을 반전시켜야 했다. 이대로 끝낼 수는 없었다. 상황을 반전시킬 계기는 이 안의 모든 사람들을 해독시키는 것이다. 특히 운중을 해독시켜주어야 한다. 상만천의 독주를 막을 수 있는 인물은 운중뿐이다.


태그:#천지, #추리무협, #연재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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