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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철한의 얼굴에 약간 곤혹스러운 기색이 떠올랐다. 입술을 달싹거렸지만 말은 나오지 않았다.

“그게… 내 마음대로…되는 것도…아니고…음…그러니까….”

“뭐 그리 절절매나? 내 비록 무공은 익히지 않았어도 눈치만큼은 누구에게 뒤지지 않는다네. 핫핫.”

함곡이 유쾌하게 웃었다. 그럴수록 풍철한의 얼굴은 일그러졌다. 그때였다. 다기를 들고 선화가 모습을 보였다.

“무슨 일이에요?”

다기를 탁자에 내려놓고 선화가 의자에 앉자 함곡이 대답 대신 손에 들고 있던 청첩을 선화에게 내밀었다. 청첩을 받아들고 읽어 내려가는 선화가 밝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오랜만에 외출을 할 수 있게 되었군요. 여기 운중보가 모두 비겠는데요?”

아무래도 운중보 내에만 있기가 답답하기는 선화도 마찬가지였던 모양이다. 그러다 문득 마지막 아래를 읽다가 선화가 멈칫했다. 그것을 본 함곡이 다시 묘한 웃음을 흘렸다.

“외출 정도가 아니지. 너 역시 청첩의 주인공이 아니냐? 아무리 생각해도 운중께서는 무림인보다는 점쟁이가 어울릴 것 같아.”

“말도 안 되요…이건…”

“나도 이미 다 알고 있다. 내가 비록 무공을 익히지 않았다한들 동생이 밤마다 운중각에 가는 것을 모르고 있었겠느냐? 그게 벌써 삼개월 째인가?”

순간 선화의 눈꼬리가 치켜 올라가며 풍철한을 노려보았다.

“당신, 이미 오빠에게 다 말했군요?”

그러다 문득 풍철한의 멍청한 표정을 보는 순간 선화는 자기 꾀에 자기가 빠졌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자기 입으로 실토한 셈이다.

“나는 절대…그런 말을….”

“됐어요.”

선화는 앙칼지게 소리를 빽 지른 뒤 얼굴을 붉게 물들인 채 고개를 푹 숙였다.

“쩝.”

풍철한은 입맛을 다셨다. 그는 두려운 사람이 없었다. 칼을 목에 갖다대 죽인다 해도 두려워하지 않을 사람이다. 하지만 중원 여자는 무섭다. 특히 선화는 풍철한이 무서워하는 유일한 존재였다. 그리고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무서워지고 있었다.

“호호. 잘 되었군요. 혼수 준비를 해야겠네요.”

찻물을 뜨겁게 데워 가지고 오던 함곡의 부인이 이미 그들의 대화에서 모든 것을 알았는지 교소를 터트리며 탁자로 다가왔다.

“언니…누가…저런 사람과…”

“호호. 운중보 내에 이미 소문이 났는걸요? 요새 두 사람이 야참을 많이 먹어서 살도 찌는 것 같던데. 혹시….”

은근한 눈길이 선화의 아랫배를 훑는다. 선화가 당황해 소리를 질렀다.

“언니!”
“험험.”

풍철한도 머쓱한지 헛기침을 터트린다. 그러고는 얼른 화제를 돌렸다.

“창월도 데리고 가야겠지?”

창월은 여전히 성곤이 사용하던 주작각(朱雀閣)에 머물고 있었다. 팔숙이라 지칭했던 인물 중 운중을 따라가지 않은 유일한 인물이었다. 그는 운중보에 남아 성곤의 묘를 세우고 제(祭) 지내는 것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이미 좌총관은 창월을 용서했을 것이네. 더구나 창월이 그리 모질게 손을 쓰지 않았고. 청첩에 창월까지 들어있는 것으로 보아 이해했겠지.”

“그 늙은이의 제자들도 올까?”

“모르지. 그래도 이미 자리를 잡은 장문위 정도는 분명 올 것이네. 요사이 제일 바쁜 사람이 모가두인 것 같더군. 부친의 가업을 이어받아 벌써 재계에서는 두각을 나타내고 있는 모양이야.”

“그 친구, 무림인이 될 사람은 아니었어.”

“아마 궁수유도 참석할지 모르겠군.”

“용추가 반군에 가담했다는 소식이 들리던데….”

“그로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겠지. 이번은 최악의 선택이 될지 몰라도 그는 무언가 추구하지 않으면 견디지 못하는 사람이네.”

함곡의 부인이 차를 우려내 찻잔을 데웠다. 그리고 다시 물을 부어 차를 따랐다.

“더구나 그는 천지가 누군가의 독점물이 아니고 만인의 것이란 생각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이네. 그는 언제나 중원을 독점할 사람을 위해 일하고자 하지.”

“머리가 터져나갈 정도의 많은 지식이 그를 그렇게 만들었겠지. 그리고 머리에 먹물이 든 사람들은 한결같이 자신의 가치관이 절대적으로 옳다는 생각을 하고 있더군.”

“틀린 말은 아니네. 무릇 인생에서 불운이란 그냥 한 번 스치고 지나가는 것이 아니란 생각이 든다네. 불운은 겹쳐서 오는 것이지. 더 불행한 것은 처음 닥친 불운 탓에 스스로 또 다른 불운을 자초하는 걸세. 그래서 더욱 파멸의 구렁텅이로 빠져들게 되는 것이지. 인간에게는 만용과 오기, 그리고 독선이 있어 자신의 불운을 인정하고 받아들이지 않는단 말이네.”

용추에게만 해당하는 이야기가 아니었다. 우리 인간은 언제나 그렇다. 현명한 사람은 자신에게 닥친 불운이나 불행에 대해 인정하고 받아들이지만 대부분 사람들은 그것을 인정하지 못하고 성급하게 만회하려 하다가 더 큰 불행에 빠지는 것이다.

“우리가 사람들을 모두 내보내고 문을 닫아걸었다는 것 자체가 행운인지도 모르지.”

풍철한 역시 고개를 끄떡이며 함곡의 말에 동의했다.

“그러니 투덜대지 말게. 묘지기도 해볼 만한 일이 아닌가?”

함곡이 맑게 웃으며 선화와 풍철한을 번갈아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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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중보에서 사건이 일어난 후 채 일년이 지나지 않아 명의 마지막 황제가 즉위했다. 황제가 처음 결단을 내린 것은 환관 위충현의 숙청이었다. 그것으로 잠시 희망이 보이던 명은 결국 대세를 돌리지 못하고 종지부를 찍는다. 이자성의 북경 함락과 청군에 항복한 오삼계의 회군으로 그 명맥마저 끊기고 중원의 주인은 청으로 바뀌게 된다.

힘의 공백. 썩은 권력이라도 그것의 공백은 가까스로 지탱하고 있던 서까래마저 주저앉게 만들었던 것일까? 아니면 역사에서 이미 사라져야 할 권력의 집단이 더욱 악취를 풍기며 소멸했던 것일까?

허나 천지는 권력자의 독점물이 아니다. 천지는 만인의 것이다. 그것을 착각하는 자는 언제나 그만한 대가를 치르게 된다. 영원히 지속되는 독점 권력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이 역사가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는 진리다.

<大尾>

덧붙이는 글 | 오늘로 1년 4개월 동안 연재되었던 <천지>를 끝맺습니다. 그 동안 애독해 주시고 성원해 주신 독자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리고, 내내 평안하시길 기원합니다. 또 뵙게 될 날이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저의 근황은 가끔 오마이뉴스의 제 블로그 '짧은 넋두리'에 남겨 놓겠습니다. 자주 들르셔서 흔적 남겨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태그:#천지, #추리무협, #연재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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