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10월 30일, 잠실야구장에서는 기아 타이거즈와 LG 트윈스의 플레이오프 4차전이 벌어지고 있었다. 정규시즌 막판까지 서울 라이벌 베어스와의 치열한 4위 싸움을 벌여야 했던 데다 현대 유니콘스와의 준플레이오프를 거쳐야 했던 LG 트윈스는 이미 체력의 한계에 도달하고 있었다. 그리고 숨 돌릴 틈도 없이 올라선 3선승제 플레이오프에서 기아 타이거즈에 먼저 두 경기를 내준 채 1승 2패로 몰려있었다.

타이거즈는 경기가 시작되자마자 선두 이종범의 2루타와 장성호의 적시타로 간단히 선취점을 올리며 트윈스를 압박했다. 트윈스는 이어진 1사 만루의 위기에서 기아 용병 펨퍼튼의 뜬공을 잡은 우익수 마르티네스가 정확한 송구로 홈에서 장성호를 잡아내며 한숨 돌렸지만, 관중석에서는 역부족이라는 한숨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김성근의 한계가 딱 여기까지라니까. 하위권 전력을 가지고 플레이오프에 올리는 건 잘 하는데, 그 이상이 안 돼."

자율야구와 벌떼야구의 충돌?

 심성보 선수
ⓒ LG 트윈스 홈페이지
세 번째 우승에 대한 목마름이 깊어가던 트윈스의 팬들이었지만 자타가 공인하는 '명장' 김성근 감독에 대한 시선은 복잡했다. 트윈스와 김성근은 아무래도 궁합이 맞지 않는 짝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트윈스는 누가 뭐래도 유지현, 김재현, 서용빈의 팀이었고 이상훈의 팀이었다. 그들은 자율과 신바람과 창의적 개인전술의 상징이었고, 곧 트윈스 팬들의 정체성이었다.

따라서 그들에게 김 감독이 앞서 해왔듯 '벌떼' 혹은 '기계'의 한 조각 부품으로써 움직일 것을 요구한다면, 그것은 우승의 대가라고 해도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이었다.

트윈스 팬들에게 있어서, 만년 꼴찌 돌핀스와 레이더스를 포스트시즌까지 끌어올렸던 '돌풍의 감독' 김성근의 '벌떼작전'은 존중해줄 만한 업적이기는 했지만 받아들이고 싶은 문화는 절대 아니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들에게는 김성근 감독이 떠돌던 이 팀 저 팀, 혹은 2군에서 이끌고 올라온 최동수, 류택현, 최만호 그리고 심성보 같은 '외인부대'들 역시 눈에 거슬리곤 했다. 이래저래 마음에 걸리는 게 있을 때 제일 먼저 눈에 띄는 것이 '출신성분'이 아니던가.

그러나 미국에서 거듭 방출의 설움을 겪으며 '연습장에서 훔쳐 모아둔 공을 혼자 벽에 던지며 연습하는' 쓴맛을 보아야 했던 이상훈이나 고관절 부상을 딛고 이를 악문 김재현은, 그저 밖으로 보이는 엘리트의 이미지와는 달리 속으로 다져지고 굳어져 있었다. 그것은 병역비리로 구속되는 우여곡절 끝에 정규시즌 막바지에 공익근무요원으로 입대해야 했던 서용빈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이 자신을 죽이고 팀을 위해 뛰었던 그 해, 그리고 기꺼이 외인부대들과 한 팀이 되어 헌신했던 그 해 트윈스는 하위권으로 예상했던 주변의 분석을 비웃듯 다시 한 번 작은 돌풍을 일으킬 수 있었다. 그들이 이미 올라서있던 플레이오프 무대가 그 뚜렷한 증거였다.

그러나 상대 선발 리오스의 초반 난조로 어렵게 잡은 반전의 기회, 투아웃 만루 상황에서 타석에 6번 지명타자 심성보가 들어서자 답답한 탄식은 다시 흘러나오고 있었다.

"쟤는 왜 자꾸 내보내는 거야…."

투아웃 만루 상황에 등장한 심성보

 레이더스 시절의 심성보 선수
ⓒ 쌍방울 레이더스 팬북
타석에 선 것은, 쌍방울 레이더스 시절 김기태와 더불어 공포의 좌타라인을 이루던 장타자 심성보가 아니었다. '계집애 같다'는 소리 깨나 들었음직한 곱상한 얼굴에도 단단한 맨팔뚝을 걷어 부치고 방망이를 휘둘러 홈런을 만들어내던 그는 혈당량 500에서 600을 오르내리는 심한 당뇨증상 속에 10kg 가까이 말라붙은 병색 완연한 모습으로 서있었다.

그런 수난 속에 그 해 고작 72경기에 나서 2할대 초반의 타율, 그리고 단 한 개의 홈런으로 오그라든 것이 그 날의 심성보였다. 더구나 고전에 고전을 거듭하던 그 플레이오프에서 그가 기록하고 있던 것은 고작 7타수 1안타였다.

그러나 김성근 감독은 그를 끝내 지명타자로 기용했고, 하필 그의 앞에 초반 기싸움의 분수령이 될, 아니 그 해 한국시리즈 진출의 갈림길이 될 투아웃 만루 상황이 연출되었던 것이다.

한 해 전, 당뇨 판정과 팀 해체라는 불운 속에서 휘청거리다 신생팀 SK와이번스로부터도 방출된 심성보를 끌어안은 것은, 레이더스 시절의 은사 김성근이었다. 2001년 시즌 중반부터 LG 트윈스 감독대행으로 지휘봉을 잡은 그는 아직 저물기 아까운 재능의 제자를 불러들였고, 그 해 죽을 힘을 다한 보은의 투혼으로 심성보는 2할 8푼대의 성적을 올리기도 했다.

그러나 운동에너지로 쓰여야 할 당분이 족족 소변으로 배출되는 당뇨는 직업 운동선수가 의지력과 투혼만으로 극복할 수 없는 장애물이었다. 훈련을 통해 체력을 기른다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한 일이었고, 하루하루 버텨나가기도 힘든 허기와 피로감 속에서 장기레이스는 너무나 잔인한 시험대였다.

트윈스쪽 응원석에서는 대타를 내라는 소리까지 튀어나오고 있었다. 그러나 김성근 감독은 덕아웃 한구석에 기대 선 채 팔짱을 끼고 무겁게 응시할 뿐이었다. 사실, 그 순간 대타기용은 하고 싶다고 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지명타자로 출전명단에 오른 선수는 설사 부상을 당하는 한이 있더라도 한 타석을 책임져야만 하는 것이 규칙이기도 했다. 차라리 물러설 곳도 없는 그 자리에서, 심성보의 힘이 되는 것은 그저 오기뿐이었다.

그 해 14승 13세이브의 특급투수 리오스는 아직 몸이 덜 풀린 듯, 마음먹은 대로 공을 보내지 못하고 있었다. 이미 두 개의 공을 타자의 몸에 맞히며 긴장한 듯, 그의 공은 밋밋하게 가운데로 몰리고 있었다. 어쩌면, 저런 허약한 타자 쯤 어지간한 가운데 공으로도 요리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었는지도 모른다. 심지어 트윈스 응원석에서도 그리 기대를 걸지 않는 무심한 순간이었다.

대개 팬들도 그렇지만 선수도 세 시간 내내 경기에 집중하지는 못한다. 그리고 그런 짤막한 빈틈 사이에서 승부를 결정짓는 한 방이 터져나오곤 한다.

투아웃 만루 앞에서도 달아오르지 못했던 그 순간 '딱'하는 경쾌한 타격음이 관중들의 의식의 빈틈을 찔러왔고, 시선이 모인 곳에서 하얀 공은 중견수 앞을 구르고 있었다. 적시타.

두 명의 주자가 홈을 밟았고, 스코어보드의 숫자는 2-1로 뒤집어졌다. 1루에서는 심성보가 입술을 꾹 다문 채 두 주먹을 불끈 들어보였고, '대타'를 요구하던 응원석의 힘없는 목소리는 '심성보'라는 우렁찬 함성으로 바뀌어있었다. 그 순간 김성근 감독은 카메라를 피해 덕아웃 쪽으로 몸을 돌렸다. 마치, 이미 그럴 줄 알고 있었다는 듯.

4회말, '심성보, 날려버려'라는 환호성 속에 선두타자로 다시 타석에 들어선 심성보는 기습번트를 대고 달렸다.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상황에서 기아 내야진이 얼어붙었고, 그렇게 출루한 심성보는 후속 타자의 안타로 다시 한 개의 득점을 기록했다. 그리고 그가 기록한 타점 두 개와 득점 한 개는 트윈스가 벼랑 끝에서 기어올라 판세를 뒤집고 한국시리즈로 올라서는 결승점이 되었다.

'당뇨'라는 청천벽력

 헬스클럽에서 운동하고 있는 심성보
ⓒ 김진석

그렇게 경기는 3-2로 마무리되었고, 기세를 잡은 트윈스는 적지 광주에서 치러진 5차전을 8-2로 마무리해 4년만의 한국시리즈 진출을 결정지었다. 그 분수령이 되었던 4차전, 안타 세 개를 기록하며 승리의 주역이 된 심성보는 경기 후 '수훈선수 인터뷰'에서 어색한 듯 입을 열었다.

"이런 인터뷰는 4년 만에 처음인데…, 저에겐 최고의 날인 것 같습니다. 제 타격폼을 계속 고쳐주셨고, 또 끝까지 기회를 주셨던 김성근 감독님께 감사드립니다. 앞으로도 열심히 하겠습니다."

고교 시절, 팔꿈치 부상 때문에 투수의 꿈을 접고 타자로 전향한 그는 대학 1학년 때 대학과 실업팀이 참가하는 백호기 대회에서 7할대 타율에 단타보다도 많은 홈런을 때려내며 '괴물타자'로 떠올랐고, 박재홍과 심재학을 앞뒤로 거느린 채 국가대표 4번 타자로 한 시절을 풍미했다.

그리고 쌍방울 레이더스에서 시작한 프로무대. 비록 기대만큼 채우지는 못했지만 몇 해의 시행착오 끝에 홈런 24개를 날리며 김기태, 김광림, 박노준, 박철우 등과 '공포의 좌타선'을 구축했다. 그런 그가 '당뇨'라는 청천벽력을 맞은 것은 98년이었다. 할머니로부터 아버지, 삼촌, 고모까지 차례차례 쓰러뜨려 수시로 혼수상태로 허우적거리게 했던 그 검은 그림자가 결국 심성보의 몸을 덮쳐왔던 것이다.

그렇게 엉켜버린 운명 속에서, 그는 '아름다운 도전'이라는 배부른 자족을 위해서가 아닌, 하루하루의 밥벌이를 위해 이를 악물었고 힘없는 손끝을 모아 쥐고 방망이를 휘둘렀다. 그리고 그렇게 4년 만에 올라선 그 날의 인터뷰 자리는, 그런 그가 우여곡절 끝에 올라섰던 작은 봉우리였고 동시에 마지막 내뿜은 찬란한 석양이기도 했다.

김준환 코치가 붙여준 별명 '맘보'

 레이더스 시절의 심성보
ⓒ 쌍방울 레이더스 팬북
다음 시즌을 앞두고, 준우승의 업적에도 불구하고 김성근 감독이 전격 해임되자 그 역시 트윈스를 떠났고, 잠시 삼성 라이온즈에서의 생활을 거쳐 선수생활을 마감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사람들이 기대했던 '김기태와 이승엽 사이를 잇는 한국을 대표하는 왼손거포'가 될 수는 없었지만, 억센 불운에도 굴하지 않고 싸워 작지만 눈물겨운 승리와 감동을 남긴 사람이 되었다.

가난한 구단 레이더스에서 억대 계약금을 받은 거물신인이면서도 매일 헛방망이를 돌려대던 시절, 걱정스러울 만 한데도 콧노래를 흥얼거리고 부산스럽게 들락거리며 매사에 즐겁고 여유롭던 그에게 김준환 코치가 붙여준 별명은 '맘보'였다. 흔히 앞에 붙는 '닐리리'를 생략한 단어. 남들 같으면 불쾌했을 그 별명을 마음에 들어 했던 그는 팬북 자기소개란에 그걸 써넣기도 했다.

그러나 그가 정말 걱정과 괴로움에 둔감할 수 있었던 것은 결코 아니다. 갑자기 혈당량이 떨어지면 혼절해 설탕물을 들이부어야 정신을 차리던 아버지를 보며 운동을 시작하던 그 시절로부터, 성공 직전에 덮쳐온 불운 앞에서 땅을 치던 시절, 다시 '다 내 탓이다' 하고 괴로워하던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그 해 가을, 플레이오프 4차전에서 결승타를 때려내며 잊고 있던 팬들의 환호에 울먹이던 그 시절까지 그의 삶을 지배해온 것은 8할이 눈물이고 울분이었음이 틀림없다.

그래서 차라리 몸이 부서져버리라고 술을 부어대며 삶을 저주했던 시절을 지나 움직이는 것이 고통이었던 순간, 방향을 알 수 없는 울분으로 솟구치는 눈물에 속이 녹아내릴 듯 했던 순간에도 방망이를 움켜쥐며 그는 '닐리리 맘보'를 주문처럼 외웠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아마도 주변 사람들뿐만 아니라 자신마저 속여내기 위해 더 부산스럽게 그는 덕아웃 이쪽저쪽을 들락거리고 농담을 하고 장난을 쳐댔을 것이다.

이제 그의 이름을 기억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어쩌면 심성보라는 이름을 길게 담고 있기에는 우리 프로야구사가 너무 방대해져버린 탓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갑자기 달갑지 않은 병마에 발목을 잡히거나 억울한 불운에 채여 무너져 내릴 때, 나는 그의 이름을 떠올리게 될 것이다. 불운을 탓한들 재경기의 기회가 주어질 리 없는 인생에서, 내게 남은 유일한 길은 이를 악물고라도 내 갈 길을 가는 것뿐이겠기에 말이다. '닐리리 맘보'를 주문처럼 외면서 말이다.

야구 당뇨병 적시타 역전 심성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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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에 관한 여러가지 글을 쓰고 있다. 오마이뉴스에 연재했던 '맛있는 추억'을 책으로 엮은 <맛있는 추억>(자인)을 비롯해서 청소년용 전기인 <장기려, 우리 곁에 살다 간 성자>, 80,90년대 프로야구 스타들의 이야기 <야구의 추억>등의 책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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