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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한말의 역사는 비극의 역사였다. 그런데 더욱 더 비극적인 것은, 그 비극의 당사자인 한국인들이 자신들의 역사를 주체적 관점에서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비극의 피해자이면서도 그런 사실을 망각한 채, 그 가해자가 가르쳐 준 대로 자신들의 과거를 인식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한 잘못된 역사인식의 사례로 거론될 수 있는 것이 구한말 시기 로버트 토마스 목사의 '죽음'에 관한 역사인식이다. 김대건 신부가 종교적 순교자로 과대 포장되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로버트 토마스(Robert Jermain Thomas, 1840~1866년) 목사 역시 그러한 '과분한 오해'를 받고 있는 측면이 있음을 부정할 수 없다. 우리가 구한말 역사를 올바로 인식하려면, 토마스 목사의 죽음과 관련된 진실들을 인식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본론에 들어가기에 앞서, 이 글이 종교적 순교의 의미를 폄훼하기 위한 것이 아님을 먼저 밝혀 둔다. 어떤 종교든 간에 자신의 신앙을 위해 목숨을 아끼지 않고 죽음의 길을 선택하는 것은, 실제로 그 죽음 뒤에 사후세계가 있건 없건 간에 그 자체로서 값지고 의미 있는 일이다.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죽음까지 불사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그런 사람은 그 어떤 성자(聖者)보다도 더 거룩한 사람일 것이다.

이 글에서 논의하고자 하는 것은 정치적인 죽음까지 종교적인 죽음으로 오해해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이것이 단순한 오해로 끝난다면 모르겠지만, 그로부터 수많은 인식상의 오류가 파생되기 때문에 그 진상을 정확히 파헤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한국 기독교의 문제점을 논의하기 위한 게 아니라 한국인의 역사인식과 관련된 문제점을 논의하기 위한 것이다.

그리고 토마스 목사와 관련한 부정적인 역사적 사실을 거론하는 것이 그 내용의 진실성 여부를 떠나 해당 종교인들의 감정을 거스를 수 있는 것임은 잘 알고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여 그런 사실을 그냥 묻어둘 수는 없다.

왜냐하면, 이 땅은 종교인들의 땅이기에 앞서 우리 민족 전체의 삶의 터전이기 때문이다. 어떤 특정 사안이 부분적으로 종교와 관련된 것일지라도 그것이 민족 전체와 깊은 관련을 갖고 있는 것이라면, 종교적 비판을 무릅쓰고서라도 인식상의 오류를 지적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일부 기독교인들은 하나님과 교회를 위한다는 명목 하에 한국 기독교의 어두운 측면들을 애써 숨기려 하지만, 그러한 사람들이 명백히 인식해야 할 것이 있다. 그것은 하나님은 '거짓의 하나님'이 아니라 '진실의 하나님'이라는 점이다. 그분은 허위의 사실에 기초하여 당신의 교회에 신도가 늘어나는 것을 결코 원하지 않으실 것이다.

하나님은 아무런 편견에 구애됨 없이 우주 만물을 인식하고 계시는데 그분의 신도들은 낡고 그릇된 사고의 틀 안에 갇혀 있다면, 이 또한 하나님이 원치 않으시는 일일 것이다.

먼저, 토마스 목사에 관한 한국 개신교의 평가를 한번 살펴보기로 한다. 연세대학교 출판부가 1973년에 발행한 백낙준 저 <한국 개신교사> 44쪽에서는 이렇게 기술하고 있다.

"(선교사) 귀즐라프의 성과 없는 (조선 현지) 탐방 사건이 있은 때(1832년)부터 33년 동안 프로테스탄트 선교사로서 한국 땅을 방문한 선교사는 한 사람도 없었다. …… (그런데) 영국의 한 용감한 사람이 오랜 침묵을 깨뜨렸다. 그가 바로 토마스 목사였다. 그의 두 차례에 걸친 한국 방문은 제너럴 셔먼호 사건과 함께 알려져 있다. 이 선교사는 평양에서 순교하였다."

이 글에 보면, 토마스 목사가 '한국 선교를 위해 용기를 발휘한 순교자'로 묘사되어 있다. 그런데 이 문구에서 특히 눈여겨볼 만한 점이 있다. 이 책의 지은이가 토마스 목사와 제너널 셔면호 사건의 관계를 어떻게 처리했는가 하는 점이다.

위 인용문에 보면, 이 책의 지은이는 "그의 두 차례에 걸친 한국 방문은 제너럴 셔먼호 사건과 함께 알려져 있다"고 기술하였다. '제너럴 셔먼호 사건과 함께'라는 표현은 어딘가 모호한 인상을 주는 표현이다.

토마스 목사가 제너럴 셔먼호 사건의 직접적 당사자이며 또 이 사건과 관련하여 최고의 스포트라이트를 받은 인물이 바로 토마스 목사인데, 토마스 목사의 한국 방문이 제너럴 셔먼호 사건과 '함께' 알려졌다고 한다면 이는 분명히 모호한 기술일 것이다.

토마스 목사가 조선을 침범한 제너럴 셔먼호 사건의 직접적 관련자이며 바로 그 사건 '때문에'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는데 그 사건과 '함께' 알려졌다고 말한다면, 이는 분명 진실을 모호하게 하려는 의도라고밖에 볼 수 없을 것이다. 이는 토마스 목사의 행적 가운데에서 '비판 받을 만한 부분'을 드러내지 않기 위한 지은이의 의도를 드러내는 것이다.

그럼, 한국 기독교가 토마스 목사와 관련하여 당당하게 드러낼 수 없는 진실은 무엇인가? 물론 기독교 지도자들과 역사학자들 사이에서는 잘 알려진 이야기이겠지만, 일반 대중에게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므로 간략하게나마 토마스 목사에 관한 진실을 드러내지 않을 수 없다.

그의 죽음, 순교로 볼 수 있을까

첫째, 그의 죽음은 결코 순교가 아니라는 점이다. 군인이 사망했다고 해서 무조건 전사(戰死)라고 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종교인이 사망했다고 해서 무조건 '순교'라고 할 수는 없는 것이다.

신분이 군인일지라도 휴가 혹은 탈영 중에 다른 사고로 목숨을 잃을 수도 있다. 마찬가지다. 직업적인 종교인이라 할지라도 그 점은 예외가 아니다. 종교인이 사망했다면, 그의 죽음을 애도하고 그의 생전의 신앙생활을 찬미할 수는 있다. 그러나 그의 죽음을 무조건 순교로 치장하고 거기에 숭고한 의미를 두고 나아가 역사적 인식마저 혼란하게 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종교인도 비종교적인 이유로 죽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토마스 목사는 조선에서 왜 죽은 것일까? 그는 조선 정부의 경고를 무시하고 조선에 침투해 온 제너럴 셔먼호라는 미국 상선에서 조선어 통역을 했던 인물이다. 그는 종교적인 임무로 그 배에 탑승한 게 아니다. 그는 제너럴 셔먼호의 한국 침투를 돕기 위한 통역관에 불과했던 것이다.

조선 정부는 침략자를 응징했고 그 배에서 일하던 '토마스 통역관'은 그 때문에 사망했다. 제너럴 셔먼호의 침략적 성격에 관해서는 더 이상 자세히 언급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제너럴 셔먼호가 통상을 목적으로 조선 영역에 침입했고 토마스 목사는 그 배에서 통역관으로 일하고 있었는데, 그의 죽음이 과연 순교일까? 그것은 전혀 종교적인 죽음이 아니다. 그의 죽음은 법률적 차원 혹은 국제정치적 차원의 문제일 뿐이다.

프랑스 함대의 조선 원정을 도우려 했던 통역관

둘째, 토마스 목사가 제너럴 셔먼호 사건 직전에 프랑스 함대의 조선 원정을 도우려 한 사실이 있다는 점이다. 그는 당시 조선 선교에만 관심을 기울인 게 아니라 서양 국가들의 조선 침공을 보조하는 일에까지 관심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역사비평사가 2005년에 발행한 김명호 저 <초기 한미관계의 재조명>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한문학자인 김명호(성균관대 한문학과 교수)는 당시 평양감사 박규수와 관련된 대외관계 기록을 면밀히 연구한 학자로도 잘 알려져 있다. 이 책의 33쪽에 보면 이런 내용이 나온다.

"(토마스 목사는) 1866년 7월 베이징 주재 프랑스 공사대리 벨로네에게서 로즈 제독 휘하 프랑스 함대의 조선 원정에 동참해 달라는 요청을 받게 된다. 이를 수락하고 프랑스 함대가 주둔중인 (중국) 지푸로 향하던 토마스는 남부베트남의 반란으로 로즈가 조선 원정을 잠시 미루고 홍콩으로 떠났다는 낭패스러운 소식을 접하게 되었다. 그러자 그는 공연히 시간을 허비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고, 지푸에서 셔먼호에 동승하게 된 것이다."

이 내용에 따르면, 토마스 목사가 선교 목적이 아니라 조선 원정 목적으로 프랑스 함대에 동참하려 한 적이 있다는 점을 알 수 있을 것이다. 프랑스 함대의 조선 침략을 위한 길잡이 역할을 자처한 사람을 과연 '하나님의 종'이라고 할 수 있을까? 하나님은 과연 침략자 프랑스 함대를 앞세워 조선을 복음화시키려 했을까?

토마스 자신은 조선 복음화를 위한 방편이라고 합리화했을지 모르지만, 그는 어디까지나 침략자 프랑스의 조선 원정을 도우려 한 것뿐이다. 그의 행동이 하나님을 위한 것이었다고 옹호하면, 그것은 하나님을 침략자의 하나님으로 모독하는 것과 다름없을 것이다.

예수가 죽은 후에 그분의 제자들은 침략자의 도움 없이 오로지 하나님만을 믿고 복음 전파에 앞장섰다. 사도 베드로나 바울이 바로 그런 사람들이다. 진정한 순교는 그런 상황에서나 나올 수 있는 것이다. 약자 편에 서서 강자의 박해를 무릅쓰고 복음을 전파하다가 목숨을 잃은 사람을 진정한 순교자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강자 편에 서서 강자의 침략에 편승하여 약자의 땅에 침략했다가 약자에게 목숨을 잃은 사람들과는 차원이 다른 것이다.

제네럴 셔먼호는 미 군함이 아니라 해적선?

셋째, '토마스 통역관'이 타고 있던 제너럴 셔먼호의 정체를 검토할 필요가 있다. 현재 학계에서는 제너럴 셔먼호의 정체에 관해 2개의 학설이 대립하고 있다.

제1설은 제너럴 셔먼호는 본래 미 해군 소속 프린세스 로열호였다는 견해다. 미 해군 함대를 프린스턴이라는 무역상이 구입하여 제너럴 셔먼호라고 개칭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미 해군의 공식 문서에 의하면, 프린세스 로열호는 1865년에 퇴역했으며 1868년 보스턴의 한 회사에 팔린 뒤에 1874년 뉴오올리언즈로 항해하던 중에 침몰했다고 한다. 그러므로 제1설은 타당성을 가질 수 없다.

제2설은 제너럴 셔먼호는 중국·베트남·태국 기타 동남아 지역에서 활동하던 해적선이라는 견해다. 이는 제너럴 셔먼호에 관해 보다 많은 정보를 갖고 있는 북한측의 연구성과다. 평양 과학백과출판사가 1980년에 펴낸 <조선전사> 권13에서 그러한 견해를 확인할 수 있다. 이 학설이 세계적으로 공인된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이 학설을 논박할 만한 뚜렷한 반대 주장도 없는 실정이다.

북한측의 학설이라고 하여 무조건 그 신빙성을 의심할 사람들이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만약 북한측이 어떤 정치적 의도를 갖고 있었다면, 제너럴 셔먼호를 어떻게든 미국 국가기관과 연관시키려 했을 것이다. 제너럴 셔먼호를 민간 해적선이라고 규정하게 되면, 미국이라는 국가는 이 사건에서 그만큼 자유롭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정황을 본다면, 제너럴 셔먼호를 민간 해적선이라고 인정하는 북한측의 주장은 오히려 비정치적이고 순수 학술적인 것임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이처럼 민간 해적선으로 의심되는 제너럴 셔먼호에 탑승하여 그 배에서 통역관 역할을 하다가 그 배와 함께 운명을 함께한 토마스 목사를 과연 순교자라고 할 수 있을까? 그가 생전에 기독교인이었던 것은 사실이고 그가 죽음을 목전에 둔 상황에서 하나님의 도움을 갈구했을 것임은 분명한 사실이다. 하지만, 그는 어디까지나 조선 침략세력의 편에 서 있다가 죽은 서양인에 불과하다. 그런 그의 죽음을 순교로 미화하는 것은 역사의 진실을 왜곡하는 행위가 될 것이다.

정리하면, 토마스의 죽음은 법률적 혹은 국제정치적 차원의 문제에 불과하다. 그가 생전에 어떤 종교를 갖고 있었으며 그의 주업이 무엇이었는가는 부차적인 문제다. 그는 제너럴 셔먼호와 함께 조선을 침입했고 그 과정에서 죽은 것이다. 이것이 토마스 목사의 죽음에 관한 객관적 사실이다.

토마스 목사의 죽음을 재평가하는 것은 한국 기독교를 모독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구한말 역사를 올바로 정립하기 위한 노력의 일환일 뿐이다. '눈에 보이는' 우리 자신의 역사도 올바로 인식할 수 없다면,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올바로 인식하는 일은 더욱 더 힘든 일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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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jongsung.com.일제청산연구소 연구위원,제15회 임종국상.유튜브 시사와역사 채널.저서:대논쟁 한국사,반일종족주의 무엇이 문제인가,조선상고사,나는 세종이다,역사추리 조선사,당쟁의 한국사,왜 미국은 북한을 이기지못하나,발해고(4권본),패권쟁탈의 한국사,한국 중국 일본 그들의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조선노비들,왕의여자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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