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동북아 진단을 진행 중인 김종성 기자의 <토마스목사는 조선복음화를 위한 순교자였다?>라는 기사에 대하여 먼저 김종성 기자가 보여준 개신교회에 대한 애정에 대해 감사한다.

김 기자는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제대로 인식하려면 역사 인식부터 제대로 해야 한다고 충고해 주었다. 개신교인의 한 사람으로서 그 충고를 고맙게 받아들인다. 하지만 김 기자는 동북아문제에 대해서는 전문가일지 모르지만, 신앙의 문제에 대해서는 아마추어리즘을 벗어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먼저 순교자이냐 아니냐는 종교적 잣대로 판단할 문제이지, 결코 법률적이나 정치적으로 판단할 문제가 아니다. 순교의 문제는 기독교 역사 안에서 언제나 정치적인 문제와 연결되어 있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처형 역시 반란 혐의에 의한 십자가 처형이었다. 정치범으로 죽었다.

초대교회의 많은 교인들이, 네로 황제 시대의 많은 기독교인들이 정치적인 이유로 죽어야 했다. 역시 구한말 천주교인들의 순교와 일본강점기 기독교인들의 순교, 공산치하에서 기독교인들의 순교도 정치적인 이유였다. 그렇다 해서 그들이 순교자가 아니란 말이 가능한지 묻고 싶다.

차라리 토마스목사 사건을 신앙의 문제가 아닌 구한말 우리 민족의 외세에 대한 항거로 해석한다면 굳이 반론을 할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김기자는 동북아 진단의 연재를 진행하면서 토마스목사의 순교문제를 거론했다. 이 문제가 동북아 진단과 어떤 연관이 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순교문제를 거론하려면 이 문제는 신앙의 문제로 접근해야 옳았을 것이다. 그런데 김기자는 이 문제를 정치적 법률적 문제로 결론지었다.

토마스 목사, 신학교 시절부터 선교사 꿈꿔

토마스 목사는 영국에서 태어나 런던대학 뉴칼리지에서 신학을 공부하고 24세에 회중교회 목사가 되었다. 토마스 목사는 이미 신학교 시절 준비했던 대로 청나라로 런던선교회 소속 선교사로 헌신했다. 청나라에서 서교사로 헌신하던 중 조선에서 온 상인들로부터 조선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조선선교를 계획하게 된다. 이때부터 조선말을 공부하고 조선으로 1차 선교 여행을 다녀왔다.

1차 선교여행을 통해 얻은 경험으로 좀 더 효과적인 조선 선교를 하기로 결심하고 다시 조선으로 들어갈 기회를 찾고 있었다. 이때 마침 청나라주재 프랑스 공사로부터 로즈제독의 프랑스함대의 조선원정을 도와달라는 부탁을 받게 된다. 토마스목사는 이를 수락하고 프랑스함대를 통해 조선으로 가고자 했으나 로즈함대는 홍콩으로 향하면서 수포로 돌아간다.

김 기자는 여기서 이런 토마스 목사의 행동을 두고 제국주의에 동참한 것이라고 단정 지었다. 이사거의 표면만 보면 토마스 목사는 제국주의의 식민지 침탈의 선봉에 선 인물이다. 다시 조선으로 갈 방법을 찾던 토마스 목사는 천진에서 조선으로 교역을 하러 가려는 제너럴 셔먼호가 통역을 찾고 있다는 사실을 듣고 자원해서 승선하게 된다. 표면적으로 보면 토마스 목사는 이번엔 미국의 조선 침탈에 참여하게 된 것이다.

한 영국인 선교사가 프랑스 제국주의 앞잡이가 되려다 실패하고, 미국 제국주의 앞잡이가 되었다가 조선인들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가 김 기자가 내린 결론의 실체다. 사건을 정치적 처지에서 보면 그럴 수 있겠다.

하지만 여기서 토마스 목사의 신앙은 철저히 무시되고 있다. 토마스 목사가 그토록 조선을 향해 가려고 애썼던 이유가, 당시 아무도 알아주지 않았던 조선말을 열심히 배웠던 이유가 결국 제국주의 팽창에 이바지하기 위한 것이었을까?

토마스 목사는 자신의 선교지에 사랑하는 아내를 묻었다. 신학교 때부터 품었던 선교의 열정을 가지고 청나라에서 헌신했다. 선교지에서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귀국하지 않았으며 선교를 포기하지 않았다. 더욱이 이름도 처음 들었던 조선에 대한 선교 열정을 키워나갔다.

통상수교거부정책으로 굳게 닫혀 있던 조선땅에 선교의 열정을 가진 이 젊은 선교사가 어떻게 쉽게 갈 수 있었겠는가? 조선에 그토록 가고자 했던 토마스 목사는 제너럴 셔먼호를 통해 조선 입국을 시도하게 된다. 제너럴 셔먼호는 조선말을 할 줄 아는 이가 필요했고, 토마스 목사는 조선으로 가는 배편이 필요했던 것이다.

제너럴 셔먼호는 대동강을 거슬러 평양까지 올라갔다가 조선인들에 의해 불에 타게 된다. 이 와중에 토마스 목사도 죽게 됐다. 평양주민들이 토마스 목사를 죽인 이유가 종교적 이유가 아닌 정치적 이유였음에 동의한다. 그렇다 하더라도 토마스 목사가 가졌던 선교의 열정이 폄하되어서는 안 될 일이다. 한국 교회사에서 토마스 목사를 순교자라 칭하는 것은 정치적 문제와 거리가 먼 문제이다.

일부에서는 제너럴 셔먼호가 2대의 대포 등으로 무장되었던 점을 들어 해적선이라고까지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당시 열강들의 상선들이 오히려 해적들에게 자신들을 지키기 위해 일정의 무장을 했던 점을 이해한다면 제너럴 셔먼호는 무장한 상선일 뿐이었다.

그 배에는 선주 프레스톤과 페이지 선장 등 토마스 목사 외에 5명의 백인과 중국인, 말레이인 등 24명의 선원이 타고 있었다. 그들은 청나라 천진항에서 영국 해운상사와 용선 계약을 맺었다. 해적선이 영국 해운상사와 용선계약을 맺었다는 것이 있을 수 있는 일일까?

만약 이 배가 해적선이었다면 토마스 목사는 제국주의 앞잡이에서 해적의 앞잡이가 된 무뢰배가 되는 것이다. 토마스 목사는 죽고 없지만 한낱 설에 의해 망자를 그렇게 모독할 수 있는 것일까?

하지만, 제너럴 셔먼호의 선원들이 거칠었고 무례했던 것은 사료들이 공통으로 증언하고 있다. 서구열강의 눈으로 식민지 수탈에 눈이 멀었던 탐욕스런 미국상인들에게 조선인들이 얼마나 미개하고 우습게 보였을 것인가? 문제는 여기서 토마스 선교사의 역할이다.

일부 사료에서 토마스 선교사가 적극적으로 조선인들을 무시하고 무리한 통상조건을 요구했다고 적고 있다. 하지만 토마스 선교사의 공식 역할이 통역이었던 점을 기억한다면 다른 사람들 눈에 그렇게 비친 점도 무리는 아닐 것이다. 제너럴 셔먼호의 선주와 선장이 요구한 사실을 통역했었을 테니까 말이다. 혹자는 선원들 중 토마스 목사가 가장 강력한 영향력을 미쳤을 것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승선한 지 한 달도 안 되는 통역이 통상에 닳고 닳은 선주와 선장을 좌우할 만큼 영향력을 행사했다는 말을 신뢰할 수 없는 부분이다. 그는 단순 통역에 불과했다. 영국인으로서 프랑스 제국주의나 미국제국주의의 첨병 노릇을 할 만한 이유가 토마스 목사에게는 없었다.

순교의 문제는 종교적 문제로 남겨야

토마스 목사가 정치적 법률적 잘못을 범했다면 제너럴 셔먼호를 타고 조선땅에 왔다는 것이다. 하지만 토마스 목사는 이 와중에서 5백권이 넘는 성경을 나눠주었으며 최후 목숨이 끊어질 때도 성경을 나눠주었다. 정치적 목적으로 조선땅에 왔다면, 제국주의 수탈의 앞잡이로 조선땅에 왔다면 그렇게 죽을 수 있었을까 묻고 싶다.

평안감사와 조선인들에게 토마스 목사는 한낱 조선을 침범한 상선의 통역이었을 뿐이지만, 토마스 목사에게는 그 길이 당시 선택할 수 있었던 조선을 향한 선교사의 길이었다.

과연 토마스 목사가 순교자이냐 아니냐가 구한말 역사를 바로 세우는 일인가? 결국 제너럴 셔먼호 사건은 신미양요를 불러 일으키며 조선에 큰 타격을 주게 되었다. 그것이 토마스 목사 때문인가? 토마스 목사가 없었다면 제너럴 셔먼호는 조선에 오지 않았을까? 토마스 목사를 순교자라고 한다면 구한말의 역사를 주체적으로 인식하지 못하는 것일까?

토마스 목사가 순교자이든 아니든 우리는 구한말 당시 제국주의 열강의 조선 침탈에 대해서 자세히 알고 있다. 사실 토마스 목사의 순교는 기독교인이 아닌 일반인들에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제너럴 셔먼호의 의미를 좀 더 자세히 설명하자면 차라리 통역이었던 토마스보다 조선 통상을 요구했던 선주인 프레스톤이나 선장인 페이지란 인물을 조명해야 하지 않을까?

순교의 문제는 신앙의 문제이다. 토마스 목사가 순교자였느냐 아니였느냐는 기독교인들이 결정할 몫이다. 천주교에서 김대건 신부를 순교자로 규정하든 불교에서 이차돈을 순교자로 인정하든 그것은 그분들의 몫이다. 토마스 목사의 순교문제 또한 기독교의 문제다.

태그: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이전댓글보기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