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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9월 28일, <오마이뉴스>에 ‘토마스 목사는 조선 복음화를 위한 순교자였는가?’란 기사가 실린 이후, 어느 독자가 오마이뉴스 쪽지를 통해 “지난 8월 우리 교회에서 신학대 교수로부터 토마스 목사가 죽기 전에 대동강 모래사장에서 망나니에게 성경을 나누어주다가 죽었고 그 열매가 맺어져 1907년 평양 대부흥이 있었다는 설교를 들었는데, 이것이 사실이냐?”는 질문을 보내왔다. 토마스 목사의 최후에 관한 이야기는 ‘토마스 순교 신화’의 핵심적인 부분일 뿐만 아니라, 미국 등 외세에 대한 기독교 보수세력의 태도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것이므로, 그 독자분의 질문에 대해 기사 형식의 공개적인 답변을 드리고자 한다. - 기자 주

구한말 시기의 영국인 청년 목사인 로버트 저메인 토마스(Robert Jermain Thomas, 1840~1866년)는 한국 기독교인들에게 개신교 순교자로 알려져 있다. 기독교계 문헌들에서 묘사하는 토마스 목사의 최후는 다음과 같다. 1866년 제너럴 셔먼호 사건 당시의 상황이다.

“1866년 7월 24일 정오 무렵 평양성의 군민(軍民)들이 제너럴 셔먼호를 일제히 공격하였다. 죽음의 위기에 처한 상황에서 토마스 목사는 죽기 직전까지 강안(江岸)의 군중을 향해 성경을 뿌렸다. 심지어 그는 자신을 죽이려 하는 군인에게까지 성경을 건네주었다. 그 군인은 그때 받은 성경을 읽고 나서 감화되어 훗날 기독교인이 되었다.”

자신이 탑승하고 있던 제너럴 셔먼호가 조선인들에 의해 공격을 받는 위험한 상황 속에서도 끝까지 성경을 나누어주면서 복음을 전파했다는 점 때문에 오늘날까지도 토마스 목사는 한국 기독교인들의 존경을 받고 있다.

그런데 그것이 진정 사실일까? 26세의 토마스 목사는 목숨이 위급한 상황 속에서도 성경을 나누어줄 만큼 과연 신앙심이 깊은 사람이었을까? 성경을 나누어주는 종교인을 살해할 만큼 조선 군민들은 과연 무지몽매하고 잔학무도한 사람들이었을까?

토마스 목사의 최후에 관한 사실관계를 2단계로 나누어 살펴보기로 한다. 먼저, 관련 문헌들의 신빙성을 검토해 본 다음에, 관련 문헌들의 내용을 살펴보기로 한다. 여기서는 학계의 최근 연구 성과를 집중적으로 살펴보되, 어떤 경우에는 학자들의 실명과 저서 명칭을 거론하지 않기로 한다. 왜냐하면, 사실은 전혀 그렇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일부 학자들이 반(反)기독교적인 인물로 오해를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먼저 1단계로, 관련 문헌들의 신빙성을 검토해 보기로 한다. 그럼, 토마스 목사와 관련된 문헌에는 어떤 것이 있는가?

토마스 목사가 최후를 맞이한 제너럴 셔먼호 사건에 관한 자료는 크게 3가지 종류로 나뉜다. 조선측의 공식 기록, 미국의 외교문서, 기독교계 문헌이 바로 그것이다.

박일근의 연구에 의하면, 미국의 외교문서는 서먼호 사건이 발생한 지 수개월이 지난 시점에 작성된 것들로서, 병인양요(1866년) 때에 종군했거나 혹은 중국으로 탈출한 프랑스 신부들 또는 셔먼호의 수로 안내를 맡았다는 중국 정크선 선장 등에게서 입수한 정보에 기초하고 있다. 그리고 미국 외교문서의 내용은 매우 소략하고 간접적인 정보에 기초하고 있다고 한다. 또한 미국의 외교문서는 토마스 목사의 최후와는 직접적 관련성을 갖고 있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토마스 목사가 순교자로 묘사되어 있는 기독교계 문헌들은 어떠한가? 기독교계 문헌은 미국인 선교사 게일(J.S. Gale)과 오문환(吳文煥) 목사의 저술을 기초로 하고 있다. 이 문헌들을 연구한 어느 국내 학자는 “두 사람의 저술은 셔먼호 사건을 목격했다는 현지 주민들의 증언에 의거하고 있으나, 그 증언들은 사건 발생 후 수십 년이 지난 시기에 수집되었을 뿐더러 주로 기독교도인 고로(古老)들의 기억에 의존한 점에서 한계가 있다”고 하면서 “게다가 토마스 목사의 죽음을 순교로 미화하려는 의도에서 증언 내용을 다분히 과장하거나 윤색한 혐의가 없지 않다”고 지적했다.

한편, 조선측의 기록은 셔먼호와 직접 대치한 일선 관원들에 의해 파악된 정보를 담고 있다. 이러한 자료 속에는 예컨대 평안감사 박규수가 조정에 올린 장계(보고서)도 포함되어 있다.

조선측 기록은 사건과의 시간적 거리로 보아서도 다른 기록들과는 차원을 달리한다. 현장을 목격하면서 작성한 기록이기 때문이다. 또 토마스 목사를 직접 대면한 관원들이 작성한 것이기 때문에 가장 신뢰할 만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역사학적으로 볼 때에는 위 3가지 중에서 가장 신뢰할 만한 사료(역사학 자료)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1단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적어도 역사학적 관점에서는 조선측의 공식 기록이 기독교계 문헌이나 미국 외교문서보다 신빙성이 더 높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조선측 기록이 신빙성이 높다고 하여 기독교인들에게 조선측 기록만을 신뢰하라고 권유하는 것은 아니다. 신빙성 여하에 관계없이 어느 쪽을 신뢰할 것인가는 독자의 자유 영역에 속하는 문제다.

앞에 놓인 여러 가지 증거 중에서 어느 증거를 채택할 것인가는 일단 ‘판사’의 재량권에 속하는 문제다. 하지만, 잘못된 증거를 채택하면 인사고과나 상소심을 통해 부정적 영향을 받을 수는 있을 것이다.

다음 2단계로, 토마스 목사에 관한 문헌의 내용을 살펴보기로 한다. 기독교계 문헌에서 전하는 토마스 목사의 최후는 기사의 서두에서 소개한 바와 같다. 그러므로 여기서는 조선측 기록에서 전하는 내용만 소개하기로 한다.

그런데 이 대목에서 이렇게 생각하는 분들이 있을지 모른다. ‘조선측이 토마스 목사를 의도적으로 폄하하기 위해 내용을 조작했을 수 있지 않느냐?’고 말이다.

그러나 당시 조선 기록은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주로 현장 보고에 기초한 내용이다. 그렇기 때문에 전체적 관점에서 사실을 왜곡하기도 힘들다. 또 사건 당시 조선측은 토마스 목사에 관해 잘 알지도 못했다. 당시 조선측의 현장 보고에 따르면, 조선측에서는 ‘조선어를 잘 하는 서양 청년’이 그 배에서 조선 관리들을 상대한다는 정도만 알고 있었다.

게다가 손에 든 조총을 자랑하는 ‘그 청년’은 조선 관리들을 상대로 전쟁 협박을 일삼기도 하고, 툭 하면 조선의 보물에 대해 진지한 관심을 표했다고 한다. 그 누가 보더라도, 제너럴 셔먼호 안에 ‘점잖은 종교인’은 없었다. 물론 실제로 있기는 했지만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조선측이 의도적으로 토마스 목사를 폄훼하는 내용의 공식 문서를 썼을지도 모른다는 우려를 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이제 조선측의 기록을 살펴보기로 한다. 여기서는 어느 국내 학자의 최근 연구 성과에 기초하여 논의를 전개하기로 한다. <운하견문록>에 수록되어 있는 <적호기>에는 다음 내용이 있다.

“(토마스는) 뱃머리에 나와 서서 중군이 잃어버린 인신(印信)을 창끝에 걸고 바치면서 살려달라고 애걸했다.”

여기서 ‘중군’은 조선 관리의 직함이었다. 그리고 ‘인신’은 그의 신표였다. 제너럴 셔먼호가 조선 중군의 신표를 탈취했기 때문에 이 중군은 그로 인해 징계를 받기도 했다. 제너럴 셔면호 통역 담당 토마스 목사는 바로 이 인신을 ‘성경’이 아닌 ‘창끝’에 걸고서 조선인들에게 목숨을 구걸했다. 인신을 돌려줄 테니 나를 살려달라는 것이었다. 하나님이 아닌 인간에게 목숨을 구걸한 것이다. 그리고 그가 조선인들에게 건넨 것은 성경이 아니라 창끝의 군인 신표(인신)였다.

당시 평양감사 박규수의 친우이자 유명한 시인이었던 조면호(趙冕鎬)의 <서사잡절>(西事雜絶)에도 비슷한 내용이 나온다. 궁지에 몰린 토마스 목사가 배에서 뛰어내려 항복을 애걸했으나, 분노한 평양성 주민들이 그를 때리고 짓밟아 죽였다는 것이다.

<평양지>의 내용도 유사하다. 이 기록은 좀 더 자세한 편이다.

“(토마스 목사가) 항복하고 중군의 인신을 바치면서 생환을 애걸하자, 겸중군 백낙연이 ‘잔당을 모두 불러내오면 잘 대접한 뒤에 보내주겠다’고 했다. (이 요구를 받아들인) 토마스가 양서(洋書, 영어 편지)를 셔먼호에 전달했는데, 그 편지에 무슨 말이 쓰여 있는지 모르겠으나 배에 있는 자들이 나오기는커녕 도리어 총포를 마구 쏘는 바람에, 셔먼호에 화공을 가하는 한편 토마스와 자오링펑을 묶어 군인들에게 넘겼다. 그때 인민들 중에서 셔먼호 일당에게 살상된 자의 가족들이 달려들어 두 사람을 살육했다.”

지금까지 살펴본 조선측의 기록에 의하면, 토마스 목사가 죽기 직전까지 성경을 뿌리면서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한 게 아니라 사실은 조선측에 목숨을 구걸했을 뿐이라는 점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조선 관리들의 눈에 비친 토마스라는 인물은 결코 성스러운 종교인이 아니었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조총을 자랑하고 전쟁 협박을 일삼는 청년에게서 ‘성스러운 목사’의 이미지를 발견해 낸다는 것은 웬만한 경지에 이르지 않고는 불가능한 일일 것이다.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조선측 기록이 미국 외교문서나 기독교계 문헌에 비해 자료적 신빙성이 더 높은 점을 고려할 때, 토마스 목사의 최후가 여느 사람과 조금도 다를 바 없었다는 점에 더 큰 무게를 둘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제너럴 셔먼호 사건 당시 대동강에는 토마스 목사의 복음 전파가 울려 퍼진 게 아니라 실은 목숨을 구걸하는 통역 담당 토마스의 절규가 울려 퍼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죽기 직전까지 혀 꼬부라진 조선말로 “살려 달라”고 외쳐 대던 토마스의 모습을 떠올려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가 조선인들에게 들이댄 것은 성경이 아니라 창끝의 인신이었음도 알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점들을 본다면, 토마스 목사의 죽음을 순교로 미화하는 것이 얼마나 허구적인가 하는 점을 알 수 있다. 또 성경을 뿌리면서 전도하는 사람을 살상할 만큼 당시의 조선인들이 그리 잔혹하지도 않았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해적선으로 의심되는 제너럴 셔먼호를 타고 와서 강자(서양)의 약자(조선) 침탈에 가담한 통역 담당 로버트 토마스에 대한 한국 기독교의 근거 없는 존경과 미화는 이제 깊고 깊은 재검토에 들어가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약자 편에 서서 순교를 맞이한 초대 기독교의 거룩한 순교자들과 강자 편에 서서 공연한 죽음을 당한 19세기 서양 선교사들은 엄격히 구분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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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jongsung.com.일제청산연구소 연구위원,제15회 임종국상.유튜브 시사와역사 채널.저서:대논쟁 한국사,반일종족주의 무엇이 문제인가,조선상고사,나는 세종이다,역사추리 조선사,당쟁의 한국사,왜 미국은 북한을 이기지못하나,발해고(4권본),패권쟁탈의 한국사,한국 중국 일본 그들의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조선노비들,왕의여자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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