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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오메, 저 썩을 년 좀 보게나. 지 새끼를 맨발로 걸음마 시키면 어떡한다냐잉?”
“오메, 오메... 미쳤구만 미쳤어... 쯧쯧쯧... 이 일을 어짜쓰까잉?”

장터에 순자씨가 나타났나 보다. 눈발이 날리는 한겨울보다도 지금의 초겨울이 훨씬 춥게 느껴지지 않던가. 바람이 살갗을 깊숙이 쑤셔대는 것이 단도리를 짱짱하게 하고 온 장터 사람들도 덜덜 떨고 있는데 얇은 홑껍데기 옷차림에 맨발이라니.., 그로 인해 인정 많은 장터 사람들의 걱정이 이만저만 아니다. 순자씨야 괜찮겠지만 그 추위에 어린것이 양볼을 발갛게 물들이고 방긋방긋 웃는 모습이란 여간 안쓰러운 일이 아니었다.

장터에 순자씨의 출현이 이상할 것도 없지만 사람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것은 그녀의 괴괴한 행색 차림이다. 머리는 남자처럼 짧게 잘랐으나 그것도 단정하지 못해 하늘로 쭈뼛쭈뼛 치솟았고, 잔뜩이나 웃음이 헤픈 얼굴에 남아있는 이보다 없는 이가 더 많으니 괴이하거나 미쳤다고 수군대는 것이다.

거기에 이제 두 돌도 안 된 아들 녀석을 양말은커녕 신발도 신기지 않는 맨발을 까만 비닐봉지로 칭칭 동여맨 채로 걸려서 나온 것이다. 이런 순자씨를 어떤 정신 나간 여자이겠거니 하고 혀를 끌끌 차면서 모른 체하면 그뿐인데 어디 시골인심이 그렇게 야박할 수가 있는가. 그렇지만 사람들은 아이가 허리춤에 찰싹 달라붙어 있어서 그나마 다행이지 않느냐는 생각을 하였다.

그 아이가 막 고개를 이기기 시작했을 무렵이었을 것이다. 그때도 순자씨는 지금의 행색하고 똑같이 장터에 나왔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아기를 싼 포대기를 이리 흔들고 저리 흔들고 오는 것이 아닌가.

그때까지만 해도 장터 사람들은 순자씨가 약간 정신이 오락가락 하는 여자인줄만 알았었다. 그런 순자씨가 넓죽하고 통통한 아들딸을 쑥쑥 잘도 낳는 것을 보고 신기해서인지 아들 얼굴좀 구경하자고 하였는가 보다. 그러나 순자씨가 옛쑤 하고 보여준 포대기 속에는 아기가 온데간데없이 없어져버린 것이다.

세상에나...... 그렇게 시장바구니처럼 흔들고 오다가 아이가 포대기에서 빠져 나가버린 것이다. 급기야 사람들은 순자씨가 눈물콧물 쏟으며 온 시장 통을 뒤흔들고 폴짝폴짝 뛰는 것을 물끄러미 보아야만 했다. 천만다행으로 장세를 걷고 있는 삼수 아저씨가 아이를 주워 안고 오는 통에 모두들 휴우 한숨을 돌렸던 일이 있었다.

이런 일이 있었던 터라 장터 사람들은 그냥 인사말처럼 욕설반 걱정 반으로 순자씨를 대하고 있었지만 그래도 내심 걱정은 되었다. 이제 막 걸음마를 시작한 아이를 맨발에 검정 봉지를 씌워서 질질 끌다시피 걸려가고 있으니 얼마나 가슴 아프겠는가.

여기저기서 순자씨를 나무라는 목멘 소리에 못 이겨서인지 누군가가 적당한 신발과 겉옷을 가져와서 서둘러 신기고 입혔다. 그때서야 사람들은 휴우 하는 숨소리와 함께 이것저것 바리바리 싼 봉지들을 건넸다. 어떻게 보면 순자씨는 돈 한 푼 안들이고 장을 다 봐간 셈이긴 하나 그것이 얄밉다거나 괘씸하게 생각되지 않는 또 다른 이유가 있었다.

순자씨가 한 손에는 큰 아이를 잡고 또 한 손으로는 작은 아이를 들쳐메고 하는 것을 보면 아이들이 여럿 있겠지 하는 짐작을 할 것이다. 그랬다. 순자씨에게는 대여섯 명의 아이들이 있다는 얘기를 얼핏 들었다. 아니다. 그보다 더 많은 아이들이 있는데 다른 집에 양자로 주었다는 얘기도 들은 것 같았다. 순자씨가 지금처럼 오락가락 하는 정신에 어찌 가족계획을 제대로 할 수 있었겠는가.

이런 순자씨가 처음부터 정신 나간 사람은 아니었었다. 하도 여러 가지 소문이 떠돌아서 어떤 소문이 진짜인지는 모르겠으나, 순자씨가 광주 5.18 민주항쟁 때 그렇게 되었다는 소문이 더 많이 돌았다.

버스 차장 일을 하고 있다가 군인들에게 심하게 맞고 난 뒤 그렇게 정신 이상이 왔었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그 또한 이상한 일이 아니가. 지금은 그에 따른 보상이 이루어지고 있는데 그 혜택을 전혀 받지 못한 걸로 보아 사실이 아닐 수도 있고, 피해자이긴 하나 내 일이 아니라서 누구하나 거기까지 관심을 두지 않고 있는 때문일 수도 있겠다.

또, 순자씨는 한시나 현대시를 여러 편 외우고 있었다. 콧노래처럼 그런 시들을 흥얼거리고 다녔으며 사람들이 장난삼아 읊어보라하면 신명나듯 달달달 외쳐댔다. 어찌나 진지하고 유창하던지 사람들이 깜짝깜짝 놀라면서 신기하게 여긴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이런 순자씨를 보고 사람들은 모두다 혀를 쯧쯧 차면서 안쓰러운 나머지 자기가 팔고 있는 물건들을 바리바리 싸주곤 하였다. 그리고 순자씨를 이렇게 위하고 안쓰러워하는 사람들이 장터 사람 뿐만은 아니었다.

순자씨는 사람들이 모이는 그 어떤 장소에도 귀신 같이 잘 나타났다. 잔칫집부터 시작하여 선거 유세전이며 동네에서 벌어지는 크고 작은 행사에는 절대로 빠지는 법이 없었다. 그때마다 사람들은 으레 음식이며 선물들을 꼬박꼬박 챙겨주곤 하였다.

그래서인지 순자씨는 단 한 번이라도 얼굴을 보았음직한 사람들을 보면 나이가 많건 적건 간에 오빠나 언니라고 불렀다. 사람들은 자기를 부르는 순자씨의 목소리를 들으면 그날 하루 장사 운이 따른다고 생각하고 모두들 좋아했다. 모두들 그렇게 정신 나간 여자를 불쌍타 생각한 나머지 마음속에 따뜻한 미신 하나씩 만들어 두었던 것이다.

그런 순자씨에게 나 또한 오빠라고 불렸다. 순자씨를 처음 만난 것도 몇 년 전 장터의 튀김을 파는 전에서였다. 출출함을 달래려고 고구마튀김을 먹고 있었는데 행색이 해괴망측한 여자가 대뜸 어묵 한 그릇 사달라고 했다. 생각 같아선 꽥 소리를 질러 저만치 쫓을 뻔하다가 그 여자 허리춤에 매달린 조그만 아이를 보고서 적선한 셈 치고 어묵 한 그릇을 사주었다.

얼마나 추위를 탔던지 달달 떨면서 누렇게 엉겨 붙어 있던 콧물이 그 아이를 더없이 측은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때부터 나는 그녀에게서 영락없는 오빠로 불렸다. 늘상 똑같은 표정에 똑같은 톤의 목소리였다.

그날도 꽤 오랜만에 순자씨를 보았다. 좀처럼 장터를 찾지 않았던 나는 모처럼 장터를 들렸다가 잘 아는 동네 사람을 만났다. 올해 유달리도 많이 열린 단감을 공판장에서 다 처리하지 못하고 몇 자루 장터로 들고 나왔던 것이다. 그 사람이 잠시 점심 식사하러 간 사이에 나는 얼떨결에 단감을 파는 장꾼이 되어버린 것이다.

뭐 별것도 아니지만 갑자기 찾아든 추위가 어찌나 추웠던지 달달달 떨 수밖에 없었다. 아마 홑껍데기 같이 얇은 옷을 입고 있었는지라 보기에 꽤나 불쌍히 보였을 것이다. 하필이면 그때 순자씨와 함께 순자씨를 두고 나무라는 사람들의 소리를 들었던 것이다.

아이 신발과 옷을 얻어 입힌 순자씨는 마음이 한껏 따뜻해졌는지 주위를 뺑 둘러보는 순간 오빠인 나와 눈길이 딱 마주쳤다. 깜짝 놀란 순자씨는 나보다도 훨씬 반갑고 놀라운 눈치였다.

“아따, 오빠 오랜만인 게라우? 그란디... 으짜다 요로케 짜글아들었당가? 오메 불쌍해러이.”
“하이구, 우리 순자씨가 오빠를 무지 걱정하고 있었네?”
“오라버니 잠깐만 기다려보쇼잉... 몇 군데 후딱 둘러보고 올텡께...”
“으응. 그래그래”

그렇게 순자씨가 어디로 사라진지 한 반시간이나 되었을까. 아이들은 어디다 두었는지 온데간데없고 머리에 이고, 양손에 들고 끌고 하면서 미어터질 듯한 봉지들을 잔뜩 가져왔다. 덜컥 순자씨의 아이들이 보이지 않았는지라 깜짝 놀라 물었다.

“아니, 아이들은 어데다 두었어? 그리고 이건 또 뭣이야 응?”
“워메, 우리 불쌍한 오빠가 짠해 죽겄네잉? 이것들 내가 얻은 것들인디 몽땅 가지소잉?”
내 품에 봉지를 와락 던져놓고 가는 순자씨 손을 얼른 잡았다. 나무껍질 같이 까칠까칠 하였지만 따뜻한 손이었다.

“야야, 이게 뭣이야? 도로 가져가야 응?”
“왓따메, 오빠는 참말로...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하지 말라는 말도 모른 당가? 잔말 말고 어여 가져 가소잉 히히힝.”

순간, 엎어진 봉지에서 무며 당근 그리고 사과들이 쏟아졌다. 나는 쏟아진 물건들을 주워 담느라 황급히 달려가는 순자씨를 미처 붙잡지 못했다. 그리고 순자씨의 환한 뒷모습이 내 가슴에 쏴아아 밀려들어왔다.

덧붙이는 글 | 순자(가명)씨는 남녘동네인 강진, 완도, 해남 장터에 가면 만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도 그녀의 지나간 시간들을 알려고 하지 않습니다. 저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모두들 내 일이 아니라고 여기기 때문이죠. 살아가면서 우리들은 나 아닌 다른 사람의 일들은 저만치 밀쳐내는 습관에 길들여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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