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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1

해성씨가 주 병장을 만난 것은 16년 전 크리스마스 이브였다. 그때 해성씨는 논산훈련소의 훈련병 딱지를 막 뗀 엉성한 폼으로 '따블빽(더블백...편집자주)'을 매고 자대에 배치됐다. 100여명에 가까운 부대원들은 잔뜩 얼어붙어 동작이 툭툭 부러지는 신병을 신기한 듯 쳐다보았다. 어쩌면 자신들의 처음 자리를 확인하려고 먼 기억을 더듬거렸는지도 모른다.

해성 씨 역시 신병이라면 꼭 거쳐야 하는 통과의례를 치러야 했다. 전 부대원들이 함께 사용하는 공동 세면장에서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채로 그놈의 오라질 씻김을 당했다. 몹쓸 병균을 달고 오는 것도 아닌데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수십 번 비누질과 함께 까칠까칠한 타월로 피부가 벗겨지듯 씻겨야 했다.

물론 그 통과의례의 주관은 내무반 최고 고참격인 주 병장이 맡았다. 신병 닦달은 아랫것들에게 시켜도 되련만 고참인 주 병장이 직접 나선 것은 해성씨와 주 병장의 그 어떤 필연을 예견하는 상견례였던 셈이다.

저녁 무렵에 세면장에 드나드는 도끼눈의 고참들은 머리를 툭툭 치든가, 아니면 발길질을 하든가 하면서 저마다 한 마디씩 던졌다. 그들이 던진 각 지방의 억센 사투리는 엄청난 무게의 무섬증으로 느껴졌다.

"와따메, 호텔에서 묵다 왔나? 희끄무리한 살갗이 꼭 기생오래비구마잉."
"이눔의 자슥봐래이, 관등성명은 어따 삶아묵었노? 군기 빠진 바람소리 들어보래이?"
"어이! 주 병장 복 터졌나 벼? 하느님이 크리스마스 선물까지 보내줬잖여?"

그랬다. 해성씨는 주 병장 내무반에 있어서는 크리스마스 선물이었다. 크리스마스이브에 내무반에 배치되었고, 얼씨구나 하는 고참들이 군기 잡는 명목 하에 요리저리 장난치려는 걸로 보아 산타클로스에게서 받은 장난감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기쁜 선물이라면 곱게 다룰 법도 한데, 부대원들은 해성씨를 아궁이 부지깽이 다루듯 이리 치고 저리 치면서 겨드랑이 터럭 하나까지도 발겨 제끼는 것이었다.

두어 시간의 세면장 통과의례는 곧장 내무반으로 이어졌다. 열 명 안팎의 내무반 고참들은 오랜만의 오락거리를 만난 듯 키득키득거리면서도 가끔씩은 연민의 눈길도 던졌다. 곧바로 주 병장의 입가에는 야릇한 미소가 번지면서 불호령이 내려졌다.

"지금부터 김 이병은 우리 3내무반을 지키는 '쎄빳또'(셰퍼드...편집자주)다. 들어오는 사람들을 향해 철저하게 울부짖어라. 알아들었나?"
"이병, 김해성! 잘 알겠습니닷."
"좋다, 문 옆에 있는 첫 관물대 안이 니가 들어가야 할 개집인 것이다. 들어간다. 실시!"
"실시!"

규칙적인 생활로 엉덩잇살이 빵빵하게 붙었는지라 그 좁은 관물대 들어가기란 여간 힘들지 않았다. 그러나 해성씨는 하느님 같은 고참의 명령인지라 꾸역꾸역 목만 내놓은 채로 관물대 안으로 들어갔다.

몇몇 고참들이 청소하느라 분주하게 내무반을 들락거렸다. 그때마다 해성씨는 눈을 부릅뜨고 짖어댔다.
"왈왈왈, 컹컹컹!"
"요런 똥개를 다봤나, 주인도 몰라보고 짖어대네. 칵! 발라버릴까보다."
고참들은 오다가다 빗자루며 밀걸레 자루로 머리통을 쥐어박기 시작했다.

한참을 얻어맞느라 정신이 없었던 차에 인상 좋은 고참이 들어서면 가끔씩 짖는 것을 놓치기도 하였다. 그럴 때면 고참들의 불호령과 발길질은 여지없이 날아들었다.
"이눔의 똥개새끼가 집 지키라 했더니, 도둑놈이 다 걷어가도 모르겠네. 에라이 요 똥개새끼..."

그렇게 집 주인들의 얼굴과 냄새를 킁킁거리며 달달 외울 때서야 그 지겨운 통과의례는 끝이 났다. 그리고 점호와 함께 시작하는 주 병장의 훈계는 눈물을 찔끔찔끔 짜내게 만들었다. 선임들에게 해성씨의 숨소리 하나까지도 잘 보살펴서 부대적응하는데 최선을 다해주라는 요지였다.

어쩌면 저렇게 사람이 달라 보일 수가 있을까? 무섭고 인정머리 없게 보였던 주 병장이 친 형님이나 삼촌처럼 따뜻하게 다가옴을 느꼈다. 주 병장의 못된 짓(?)은 잔뜩 얼빠져 있는 해성씨의 마음을 고참들과 함께 부대끼면서 빨리 적응하라는 배려였다는 것을 알았다.

2

잔뜩 찌푸려진 오후에 해성씨는 처남에게 전화를 걸었다.
"형님, 날씨도 찌부덩한데 목욕탕 가지 않을래요?"
"으응, 그... 그으... 래.”
힘겹게 이어지는 대답이 희미하게 꼬리를 감췄다.

혈압으로 인해 갑자기 찾아든 병마는 그 혈기 왕성했던 처남을 단숨에 무너뜨렸다. 총총했던 눈동자가 조금씩 풀리더니 사람들 눈을 똑똑히 쳐다보지 않았다. 가급적이면 눈길은 맨땅에 머물러 있었고 점점 더 혼자 있는 시간이 늘어만 갔다.

부자연스런 몸놀림과 내면으로 쌓여만 가는 할말들은 처남이 세상과의 간격을 점점 더 늘려가는 이유였다. 그런 오빠의 모습을 보다 못한 아내는 오빠와 함께 자주 목욕탕에 가라는 의견을 내놓았다. 처남이 사람들과 자꾸 부대끼는 것이 멀어져간 사람과의 간격을 좁히는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형님, 오늘은 이 매제가 형님의 전용 때밀이가 될까하는데 괜찮겠죠?"
"으...응... 나...남세...스럽다야..."
부자연스럽게 꼬여진 신체가 부끄러웠는지 등을 쉬이 맡기려고 하지 않았다.

"형님, 그때 생각나요? 제가 처음 부대에 배치 받고 형님이 저를 세면장에서 씻겨주면서 뺑뺑이 돌린 거 말입니다."
"응? 으...응...그...그거"
처남은 그때 기억이 어렴풋 났는지 입가에 엷은 미소를 지었다. 해성씨는 처남의 지금 미소가 16년 전 짓궂던 주 병장의 미소와 너무나도 흡사하다고 생각했다. 아니, 똑 같았다.

"형님, 형님을 빡빡 문질러 대서 이 사람들 앞에서 뺑뺑이 돌리고 싶어지는데 어떡하죠? 하하하."
"그...그래...허허...허"
해성씨는 정말 그렇게 하고 싶었다. 16년 전의 창피스럽고 우세스럽던 복수를 하고 싶었다.

한참이나 얼빠진 신병을 군인정신으로 꼿꼿하게 세워놓았던 주 병장이 아니었던가. 주 병장이 그랬던 것처럼 해성씨도 잠깐 얼빠져 있는 처남을 창창하게 돌려놓고 싶었다. 그리고 처남 집을 찾아갔을 때, 해성씨가 관물대 안에서 셰퍼드처럼 컹컹컹 짖었던 것처럼 처남 또한 컹컹컹 짖어주며 해성씨를 반겨 주었으면 했다.

해성씨는 처남 등의 묵었던 땟자국까지 벗겨지는 것을 보면서 마음 속 응어리들까지 죄다 씻겨나가기를 바랬다. 처남은 낑낑대며 때 미는 매제가 고맙고 짠했던지 기어코 때타올을 뺏어 들었다. 그리고는 한사코 마다한 해성씨의 등을 빡빡 문질러댔다. 허리를 비트는 간지러운 손길이었지만 해성씨 마음의 등은 시큰거릴 정도로 시원하고 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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