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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이 이야기는 새로 생겨난 제 동생과 작은아버지 사이에서 일어난 이야기입니다.>

검고 빳빳한 수염을 깎지 않은 지 오래되었다. 이런 털털한 외모를 가지고 문제 삼을 만한 간 큰 사람도 없다. 누구도 이런 외모를 빌미로 흉보거나 엇물리는 소리를 했다가는 애써 말품을 판 본전도 못 찾을게 뻔하기 때문이다.

허옇게 닳아진 군화에다가 사철 내내 군복 차림을 한 지 이미 오래 되지 않았던가. 거기에다 요즘은 좀처럼 보기 힘든 짐바(큰 짐을 싣는 용도의 자전거)를 타고 다니면서 사람 몸체만한 커다란 개를 끌고 다니니 감히 어느 누가 살갑고 정겨운 말쌈이라도 붙여볼 것인가. 하지만 그 커다란 개는 마누라이자 자식이자 친구인 거나 다름없는데 사람들에게는 오금이 저릴 정도로 위협을 가져다주니 큰 문제인 것은 확실하다.

어쩌면 오십 나이가 가깝도록 장가를 가지 못했던 까닭에 어딘가 부족하지 않나 하는 눈살로부터 방어하려는 본능인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그렇게 무시무시한 방어 속에 구린내 나는 짓거리들을 감춰두고 사는 것은 절대 아니다. 아무리 어려워도 도둑질이나 강도짓은커녕 남에게 밉살스런 입방아에 오르내리거나 손가락질 한 번 당해보지 않았다.

어디에다 내로라할 만한 직업은 못되지만 그렇다고 두고두고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는 흉잡히는 직업 또한 아니다. 여기저기 너부러져 있는 재활용품들을 주워다가 돈바꾸는 게 직업이요, 시간을 다툰다거나 들고다니기 성가신 물건을 자전거로 운반해주는 심부름꾼이 직업이라면 직업이다.

그런데……. 꿈틀꿈틀한 구릿빛 장딴지 힘 하나로 세상을 버티는 사람이 며칠째 끙끙 앓고 있다니 참말로 우스운 일이다. 갑자기 찾아든 몸살 때문만도 아니고 커다란 자동차에 자전거와 한통으로 들이받친 것도 아니다.

언제부터인가 필용이 책상 위에 못 보던 비디오카메라가 놓여 있었다. 왠 거냐고 물었지만 이 녀석은 학교 동아리에서 쓰고 있는 물건이라고 하였다. 자식이 언제부터인가 학교 영화 반에 들어가더니 드디어 제 역할을 톡톡히 하는가 보구나. 참으로 대견스러운 일이 아닌가.

필용이하고는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았어도 얼마나 살갑게 지냈던지 뭇사람들은 숨겨두었던 아들 놈 하나 데려왔다고 쑥덕거리기 시작하였다. 그도 그럴 것이 외모에서 말투까지 쏙 빼닮았는지라 한 번쯤 지나가는 말이라도 그렇게 인사차 던져볼 수는 있으리라.

이런 인사치레 말들이 되레 기분 좋아지는 것은 무슨 연유에서일까. 어려서 부모를 잃어서 혈혈단신인 필용이를 잠시 대신 맡아서 길러주는 사람이 아니라, 참말로 심중 깊숙이 필용이의 아버지가 되고 싶었고, 필용이로부터 '아버지'라는 말을 듣고 싶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지금까지도 필용이로부터 듣는 '아저씨'라는 호칭이 조금은 섭섭하기까지 하지만 그래도 엄연한 사실인 걸 어떡하겠나. 핏줄 하나 없이 홀로인 채로 이 험난한 세상을 살아가는 것은 마찬가지인데 둘이 서로 '아버지, 아들'로 부르면 얼마나 좋을까마는 아직도 아버지라는 호칭이 설은가 보다. 그렇게 설은 채로 벌써 5년을 넘게 살아왔는데 뭐 새삼스럽게 섭섭하겠는가마는.

며칠 전 읍내 파출소의 김 순경이 오후 새참나절에 느닷없이 들이닥쳤다. 김 순경은 다짜고짜 필용이 책상 위에 놓여진 비디오카메라를 가리키며 출처를 다그치기 시작한 게 아닌가. 순간 아찔한 현기증과 함께 무엇인가 잘못되어도 한참이나 잘못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필용이가 어디선가 가져왔다는 말을 섣불리 할 수가 없었다.

한참을 망설이다 얼떨결에 재활용품 쓰레기덤에서 주워왔다고 하였다. 살펴보니 쓸 만한 것 같아서 필용이 줄려고 주워왔다고 거침없이 대답하였다. 사실대로 말하라는 김 순경의 어조가 점점 높아질 때쯤 물건의 주인인 듯한 사람이 벌건 얼굴을 한 채로 들어오는 게 아닌가.

보기에 필용이와 그 남자는 잘 아는 사이였던 것 같았다. 필용이가 비디오카메라에 호기심을 보인 뒤 몇 시간 뒤에 카메라가 감쪽같이 사라져서 파출소에 신고를 하였단다. 가슴이 벌렁거리면서도 괘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필용이에게로 심증이 갔다면 한 번쯤 확인하고 신고해도 늦지 않았을 텐데 그 남자가 야속하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그렇다고 지금 와서 필용이가 가져온 거라고 사실을 밝히기에는 더더욱 못할 일이다. 가슴 한 구석에 쓰라린 통증이 찾아왔다. 데려다 키워준 것만도 고마운데 그 비싼 카메라까지 사달라고 조르지 못한 필용이의 가녀린 마음이 안쓰러웠고, 그깟 비디오카메라 하나쯤 선뜻 사주지 못하게 보인 가난이 슬펐다.

그리고는 그 녀석이 한편으로는 한없이 미워진 걸 어떡하나. 정녕 눈곱만큼이라도 아버지라는 생각이 들었다면 단 한 번쯤 비디오카메라를 사달라고 조를 수도 있었을 텐데 아직까지도 녀석하고는 보이지 않는 벽을 사이에 두고 살았나 보다.

막무가내로 주워왔다는 고집을 굽히지 않았기에 결국은 파출소로 끌려가다시피 들어가야만 했다. 필용이는 아무 잘못이 없다는 말을 수없이 되풀이 하였지만 김 순경은 학교에서 돌아오는 필용이를 잡으러 다시 집으로 찾아가는 것이 아닌가.

늦은 저녁시간인지라 파출소에서 시켜준 곰탕을 바라만볼 뿐 한 숟갈도 들지 못하겠다. 그 여리디 여린 녀석이 김 순경에게 끌려서 파출소에 들어오는 모습을 상상하니 눈물이 울컥 울컥 목에 걸렸기 때문이다.

뜨끈뜨끈했던 곰탕이 다 식어갈 때쯤 파출소 문이 열리고 김 순경이 파랗게 질린 필용이를 앞세우고 들어왔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는가 싶더니 필용이 얼굴이 흐릿해 잘 보이지 않았다. 벌떡 일어서 필용이 손을 움켜쥐면서 소리쳐야 했다.

"필용아, 이 카메라 엊그제 내가 주워다 준 거 맞지? 그렇지? 응?"
"......"
"얼른 대답해 이 녀석아! 흙먼지 잔뜩 묻어 있는 걸 주워서 너 줬잖아 그렇지? 응?"

"죄송해요. 제가 그거 훔쳤어요. 나도 모르게 그만..."
"김 순경 아닐세……. 우리 아들이 지금 거짓말을 하고 있는 거여."

"경찰아저씨, 아니에요. 우리 아버지께서 주워 온 게 아니에요. 그건 제가 훔친 게 맞아요."
"아버지, 용서해주세요. 흑흑..."
"이 녀석아, 왜 그런 짓을 한 거야 엉? 필요하면 사달라고 했어야지..."

더 이상 거짓말을 할 수가 없었다. 필용이가 부르는 '아버지'라는 소리가 가슴에서 메아리치고 있었고 그 뜨거운 메아리 속에서 필용이를 꼬옥 부둥켜안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덧붙이는 글 | 이 사고가 있었던 다음날 피해자의 따뜻한 배려로 동생과 작은아버지는 서로 뜨겁게 껴안으면서 '아버지'와 '아들'이라는 새 이름을 불렀습니다. 그 후로 둘이서는 경기도 광주의 작은 동네에서 알콩달콩 잘 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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